“혁명가 예수씨, 당신은 죽으며 억울하지 않았소?”

[새책] ‘혁명을 기도하라’ (한승훈 저, 문주, 2012.05.03)

혁명을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혁명을 아는 자들은 기도를 인민의 아편으로 후려치고 기도를 아는 자들은 혁명을 마귀라 낙인찍기 때문이다.

권력에 빌붙어 혁명을 마귀라 낙인찍는 기독교인들의 꼰대 율법학자 짓은 2천년전 예수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고, 수도서울을 통째로 하나님께 봉헌하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하다고 ‘명성도, 학위도 없는 어린 학자’ 한승훈이 패기있게 지적한다.

가난한 자들과 나누기 위해 가진것을 모두 내놓는 것이 아니라, 더 부자되기 위해 헌금을 내고 더 큰 성전을 쌓아 야훼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에게 회계는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서 살기위해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인식의 전환이 아니라 나쁜짓을 하고도 죽어서 천당가기 위한 보증수표 일뿐이다. 그런 자들에게 혁명적인 예수가 마귀라 낙인찍히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식상하기도 하다.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의 못된짓을 해석하기 위해 굳이 예수의 삶을 반추해야 할 이유도 없어보인다.

문제는 이땅에서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20년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나의 고통이다. 너나없이 평등한 세상, 더불어 나누어 행복한 세상을 위한 혁명을 향해 달려가는 빛나는 과정중에 고통을 말하면 안된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혁명은 고통과 아픔을 숨기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할수 있는것이 아닌것처럼 느껴졌다. 노래의 가사는 강철처럼 단련되어야 하는것이었고, 소설조차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였으니까.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에게 아픔과 고통따위는 없노라고, 잃을것은 쇠사슬이요 얻을것은 온세상이라는 말속에는 현실의 고통을 견디어 싸우면 행복한 미래가 온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이 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혁명이 오고있나? 이것은 오늘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회주의자의 정신분열이라 할만하다.

‘지금’ 고통스럽다.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고통스럽게 살지 않을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대 사회주의는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묵시록처럼 알려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과 착취모순, 신자유주의 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예노동과 그로인한 고통을 분석하고 불평등이 철폐된 세상을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정의롭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관료제의 그늘에서 인민들에게 재앙이 되어 무너진 이후 우리는 아직 평등한 세상, 그 아름다움 꿈을 실현할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혁명을 언제 어떻게 누가 할것인지, 그리하여 언제까지 노동자들이 관용어의 죽음이 아니라 현실적인 죽임을 강요 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말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열사라 이름붙인 동지들의 죽음이고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땅에 묻을 수 없는 그 모든 죽음을 가슴에 묻어, 내가슴이 묘지가 된지 오래다. 그 모든 죽음이 자본가들의 악행이 아니라 실력없는 사회주의자, 나의 잘못인 것만 같다. 사회주의자인 내가 착취질서를 끝장내고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전망을 만들어 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오늘 삶의 고통이 죽음만 못하게 만드는 참혹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미련하기도 하지.

한승훈이 해석하는 예수는 나처럼 우직하지만 미련한 사회주의자들이 롤모델로 삼아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다.

2000년전에 술꾼 예수가 있었다. 그는 하늘나라가 이미 이땅에 와 있다고 선언하였다. 권력을 쟁취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권력을 무시하고 권위를 조롱하는 프로젝트. 그를 따라 인식을 바꾸어 회계한 자들은 재산을 탁탁털어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가족을 버리고 가난하고 비천한자들, 여성과 거지, 병든자들과 함께 떼로 몰려다니며 날마다 술마시고 잔치하며 놀았다. 신났겠다.

한승훈이 읽어주는 2000년전 예수를 따라가다보면 “이보게, 여기가 바로 해방세상일세.” 억눌리고 소외되어 그동안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회계하고 서로 존중하고 아껴주며 진흙탕 먼지를 뒤집어 쓰고도 신명나게 노는 장면이 보이는 것 같다.

사막의 잡신, 노예들의 신이었으니 마땅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철거민들 성소수자들 장애인들의 신일터이다.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예수처럼. 예수가 되어.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재능기업 농성장과 철거민들 장애인들의 싸움터, 희망버스를 타고 85호 크레인으로 갔던 기억을 굳이 환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다. 사회주의자로 20년을 살아온 것이 그냥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혁명을 살던 술꾼 예수가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사형당하고 2000년이 지난 오늘, 예수의 삶과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한번 묻는다. 한승훈은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야훼의 전통을 따르는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믿음이 억압받는 자들에게 강대한 힘에 맞설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해석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게 신나고 살고 예수는 사형 당했다. 그가 부활했는지 안했는지 관심없다. 부활이란 이미 죽은 예수의 몫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예수처럼 오늘을 행복하게 투쟁하며 살수 있겠다. 그런데 난 여전히 죽음은 잘 모르겠다. 예수처럼 살다가 처형당해 죽으면, 그게 어떻게 이기는 것일까? 내 죽음의 차례를 기다리며 오늘을 사는것이 어떻게 행복할수 있는걸까? 더 이상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왜 안되는 걸까? 여전히 나는 억울하다. 저 천박한 자본은 저따위로 기세등등하고 왜 우리는 그렇게 버티며 싸워도 여전히 죽임을 당해야 하냐고 예수에게 물었더니 한승훈이 대답한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장의 한구절을 인용한 한승훈이 책 마지막문장으로 내 등을 떠민다.

“구원자는 당신이다. 당신을 신뢰하라.”

솔직히 김빠지는 마무리다. 20년동안 사회주의자로 살며 소외된 자들이 모여 싸우면 더불어 풍요롭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죽음앞에 고통스러워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나에게, 나를 신뢰하라는 격려는 심심하다.

눈에 띄는것은 한승훈과 여사도의 인터뷰다. 두사람의 대화는 논리적인 마무리이자 책의 가장 빛나는 중심이다. 예수처럼 살기로한 젊은이들, 인터뷰에 실린 혁명기도원의 여사도같은 동지들이 예뻐서 한승훈의 구라를 굳게 믿기로 한다. 자기를 신뢰하며 스스로 해방시키는 자가 되어 살아보겠다고 톡톡튀는 저잣거리의 언어로 예수를 들이미는 젊은이에게 죽음에 가위눌려 “니네가 죽음을 알아?” 대답하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누군들 죽음을 알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기도할수 있는거겠지. 예수를 믿지 못하고 나도 믿지 못하지만 발랄하고 경쾌한 한승훈과 여사도, 이 신통한 젊은이들을 믿어 인민의 아편이었던 예수와 화해하고 기도한다. “혁명가 예수씨, 당신은 죽으며 억울하지 않았소?”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리지 않고 즐기며 혁명적 예수를 발칙한 언어로 경쾌하게 재구성할수 있는 재능이 있는 친구와 동시대를 더불어 예수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 어쩌면 십자가형에 처해질만큼 자본과 권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투쟁의 전선을 만들며, 행복하게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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