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맛, 자본의 맛

[양규헌 칼럼] 돈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공화국

돈의 욕망은 목숨까지 집어 삼킨다

[출처: 도겐우 영상 화면 캡처]
지금 우리는 디스토피아별에서 살고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돈이 둔갑한 붉은 여왕이 세상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곳에서 우리 앨리스들은 제자리 뛰기에 숨이 가쁘고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분노한 조각가 ‘도겐우’는, 우리시대 붉은 여왕의 대표로 이명박을 지목하였다. 이명박 조각상을 만들어 때려 부수고 도끼로 머리를 쿡 찍어버리고 “다시 만들어드릴게요”하며 익살을 떤다. 그는 오로지 돈돈돈! 하는 우리사회를 붉은 여왕들이 지배하는 돈 공화국이라고 치를 떤다. 최소한 물질추구와 정신추구가 같이 가는 사회를 간절히 바라는 예술가의 외침이다. 그는 예술가라서 떠들어 라도 보는데 이 거대한 감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외쳐도 메아리조차 들을 수 없는 절망에 쓰러져가는 노동자, 민중이 너무나 많다.

아이들은 돈의 욕망을 지닌 부모 때문에 유년 시대를 잃어버렸고, 청소년들은 돈의 여왕이 지휘하는 경쟁구도에 질식해서 목숨을 던져야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듯 생명을 초개 같이 벗어던진다. 청년들은 순수한 사랑을 맛볼 여유와 공간이 없이 자신을 고용해줄 붉은 여왕을 위해 쌓는 스펙으로 자신의 젊음을 먹어치울 수 있을 뿐이며, 가스통 할배들이 될 수 없는 노인들은 돈을 얻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재활용 용지를 주워 생명을 이어가야한다. 더 이상 인류의 생산(아기)이 불가능한 폐허(삼포세대)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기우가 아니다.

죽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되는 TV 예능프로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나 ‘화성인 바이러스’ 등이 있다. 상식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는 상황을 가정하여 만들어진 이 프로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능력은 비정상적이거나 비범하거나 하여 호기심을 자극해, 일반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 스펙터클을 완성해 나간다. 비정상적인 삶과 세상에 대해 충격 요법으로 정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계기라는 게 기획의 의도일 거 같다. 그러나 좀 예민한 사람들은 그것들이 은폐하고 있는 건 아픔 속에 절망이라는 걸 알 것이다.

돈을 둘러싼 경제적 고통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아픔이다. 애인을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자전거를 먹기 시작했다는 남자의 이야기. 그의 애인은 그가 돈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였기 때문에 떠났는데. 그는 너무 슬퍼 자전거를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배가 고프기도 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자전거를 먹는 남자가 되었고. 기인이 되어 전파를 타게 된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디스토피아 공화국 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 택한 특별한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돈의 맛, 자본의 맛

노동자, 민중에게 공포와 불안으로 다가오는 돈과 다르게 ‘모든 것의 진정한 정신이자 힘’인 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동화 속에선 붉은 여왕이지만 현실 속에선 자본가와 정치권력자들과 그 아류들이다.

[출처: 돈의 맛 포스터]
얼마 전에 ‘돈의 맛’이란 영화가 나왔었다. ‘돈의 맛’이란 제목보다 ‘자본의 맛’이라고 부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 맛이란 제목은 선정적이어서 상업영화의 본성에는 잘 맞는 마케팅 전략이었겠지만 돈이 갖고 있는 계급성을 부각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돈은 원래 그냥 국가가 찍어내거나 재벌이 금고에서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조차도 온전히 되지 못하고, 목숨을 연장할 정도의 ‘노동력의 대가’만 받고 일하며 화폐구성체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이 역사적인 시간을 채우며 자본축적을 해 온 결과물이다. 돈의 이런 귀한 속성과는 아랑 곳 없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오만원권 현금이 아파트처럼 쌓여있는 재벌 사금고에서 돈을 꺼내 아들의 범죄를 사면받기 위해 검사에게 돈을 건네주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건 노동자, 민중이 사용하는 생계비용인 돈이 아니라, 권력화 되어있는 돈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자본이라고 불러야 한다. 자본의 맛이라고 놓고 보면 관객들의 시선이 돈의 맛이나 탐욕에 빠져있는 캐릭터들의 인간성 문제를 비판하기 보다는 계급적인 비판의식을 조금이나마 갖게 되지 않았을까. 쌍용차 투쟁을 진압하던 경찰특공대 동영상을 한 장면이나마 삽입한 감독의 의도는 돈의 계급적인 폭력을 보여주고 싶어 한 배치 같았는데 영화의 구성에서그걸 읽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화폐공동체에 갇힌 노동자

돈을 많이 소유한 재벌도 결국은 자존감과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니 돈을 쫓지 말고 재벌들과 자본주의를 비도덕으로 비하하고 그들을 실컷 욕해주어라! 라는 정도가 이 영화 비평의 최대치를 벗어나진 못할 거 같아 개인적으론 좀 씁쓸한 기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돈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려고 노력한 일종의 디스토피아 영화로 봐도 무방한데 일말의 계몽의 코드를 잘 못 읽어내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 맛을 욕하거나 욕망할게 아니라 자본의 맛의 유래와 그 계급적 본성에 둔감해진 우리자신의 무아지경을 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오류 중에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므로 누구나 돈을 추구하고 그것은 인간의 오래된 본성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추구하고 버는데 있어서 자본가계급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보장됨으로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영원히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누구나 아무나 벌수 있는 게 아니고 누구나 아무나가 좋아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화폐가 지금처럼 완성된 형태를 보이게 된 것은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하는 근대이후이다.

근대정신은 자유계약 정신으로 포장해서 개인들을 화폐공동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근대 이전의 인류들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돈의 사적인 이용을 경계하거나 수전노를 아주 미워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 이라고 경고까지 했다는데, 작금의 금융자본에 대해 한번 정도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인류가 꿈꾼 해방세상은 누구나 능력껏 일해서 골고루 나눠먹는 사람들의 사회였고, 돈이 필요 없거나, 있어도 가치를 표시하는 지불수단이거나 순수증여의 선물로 필요할 때 정도였다.

즉 돈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수한 발전의 산물이고 어느 한시기 체제의 거울일 뿐이다. 미국 발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대공황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현재에도 독점자본가나 금융권력들은 거울이 우리의 잘못을 보여준다고 거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며 새로운 착취조건을 찾기 위해 눈깔을 부릅뜨고 있다. 그들은 돈을 어디서 어떻게 뺏어올지를 연구하며 지구를 초토화 할 때까지 횡단하거나 배회할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의 농노나 노예가 지불하던 생존비용보다 ‘명목상 자유계약 정신’의 토대에 있었던 노동자는 화폐발달로 이중의 착취(국가나 자본가에게 세금이나 상품의 부가세 등으로)를 당하게 되어 실은 더 빈곤해 질 수밖에 없다. 총 생산력은 더 발달했으나 노동자들은 이전 인류보다 더 가난하고 궁핍한 일상을 살아야했다. 사람들이 믿듯이 노동자들도 먹고 살만하게 되지 않았냐고 역사진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 좀 넌센스이다. 산업혁명이라는 역사 발전이 다수 인간의 발전과 반비례의 모습으로 굴러 온 게 돈의 발달사이고 근현대사의 실체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빈곤화가 그걸 말해 주고 있지 않는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해 반드시 위기와 공황이 시차를 두고 반복하게 되어 있으며 그 시차사이에 노동자 계급이 알뜰살뜰 마련해 놓은 돈마저 여러 가지 금융기법의 착취기술로 싹 쓸어가 버린다. 자본가의 위기란 세계의 구조를 새롭게 재편해 돈을 긁어모으는 ‘기회’이고 노동계급에게는 일할 권리를 포함, 기본권이 박탈되고 쥐꼬리만큼의 쌈짓돈 조차도 털리어 완전 개털 되는 ‘위기’상황이 되풀이 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다.

화폐는 처음부터 국가의 관리품목이 아니었다. 대외무역이 서유럽 대륙의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던 자본주의 발달 초기 시대에서 화폐를 취급했던 것은 환전은행가들과 상인들이었다. 이후 부를 획득하게 된 은행가들이 권력자들에게 돈을 대부해주고 권력자들은 그 채무를 민중에게 세금으로 부과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화폐세금징수를 은행가들이 한 것이다. 이후 국가는 은행가들의 권력을 중앙은행으로 이전해오며 조세정책을 정비하여 국민국가를 완성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전 민중을 종교나 도덕이 아닌 돈으로 관리하는 화폐공동체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국가의 착취적 성격을 말해준다. 국가와 자본가는 한 몸의 괴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게 본성이다.

노동자, 민중은 돈으로 관리되고 돈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돈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려워한다.

돈을 못 벌면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국가나 체제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은 잘 던지만 체제에 대한 투쟁에는 쉽게 결집되지 않는다. 소수가 게을러 취업을 못했거나 불안정노동에 허덕인다면 그건 게으른 개인 탓이겠지만 다수가 취업을 못하고 불안정노동으로 절망 상태에 처해있다면 그건 국가의 구조 탓이다. 자본가들이 자신의 능력과 술수로 돈을 축적했다고 믿는 것은 거짓말이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세상건설

국가와 자본의 돈의 비밀은 노동계급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은 다수의 것이고 민중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되는 것이다. 디스토피아 반대 세계는 해방된 세상이다. 해방된 세상을 우리는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며 그 사회는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임으로 사람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인간다운 생활을 누린다. 그곳은 누구나 능력껏 자신의 적성에 맞는 사회적 노동을 하여 물자를 공동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시간과 생과 재능을 펼쳐 정신이 풍요로운 사회이다. 자본주의 세상처럼 국가나 돈이 사람들을 억압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돈을 더 가지려고 피를 말리지도 않는다. 사적소유가 없고 돈이 필요 없는 사회인데 돈을 가지려고 애쓰는 미친놈들이 왜 있을 것인가?

언론과 이전에 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은(지금은 정치권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사회주의는 이미 망해 자빠졌고 존재하지 않아서 그냥 이상향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낡아빠진 것이라고 악평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지금 여기 이곳의 자본주의는 디스토피아이고 문제 많은 현실을 걷어내려는 모든 우리들의 노력은 새로운 해방 세상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모든 것은 그것과 정반대의 것을 품고 있다. 나쁜 것들 안에는 좋은 것의 씨앗이 들어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지금의 국가나 자본주의는 언젠가 해체될 것이다. 지금처럼 나쁜 모습으로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며 좋은 씨앗이 왕성하게 새싹을 피워 거대한 변혁의 동력으로 해방세상으로의 이행이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이다. 노동자계급의 당면과제가 해방된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모순을 부수고 계급적인 정치세력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 투쟁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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