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희망버스가 마지막 취재기사였다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아내와 아들 문성이와 함께 추자도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 생계형 막기자
마르크스와 레닌은 확실히 혁명의 종군기자였지만
난 생계형 막기자였다
난 레닌의 직업적혁명가조직론에 내 청춘을 다 바쳤지만
혁명의 시간을 앞서서 실행하는 조직은 건설되지 않았고
혁명은 직업이 되지 못했다
혁명이 비어있는 중심에 세워지는 평등이라면
나의 비합사회주의활동은 반혁명의 지루한 나날들이었다
난 동지를 잃고 아내를 얻었지만
더욱 뻔뻔하게도 아내의 희생에 전적으로 의지해왔다
어떤 희생 위에 유지되는 것들은 반혁명의 뿌리였다
현대중공업 운동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울산노동뉴스 기자였다
편집장은 생계가 목적이라면 함께 일 못한다고도 했으나
내게 생계는 절박한 전망의 문제였다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과 현대차비정규직 공장점거파업을 잠입 취재 한
미디어충청 정재은 기자와 참세상 김용욱 기자에겐 더더욱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 그들은 내가 아는 한 기자정신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난 애초 기자정신이라고는 코빼기도 없었던 생계형 막기자였다
그래도 이 생계형 막기자 생활이
해고 7년 …….
그늘진 아내의 눈가에 웃음을 안겨줬고
아들 문성이 선물도 사주게 했다
이걸로 족하다
세상은 상징이 아니라 땀으로 살아내는 거다
#. 어정쩡한 위치 혹은 어떤 경계
2차 희망버스 전투 때 끌려가는 동지들을 보면서
순간, 느꼈던 서 있던 자리의 애매함
끌려가는 동지를 구출하지 못하고
결국 사진을 찍어 기사를 올리면서 느꼈던 아주 낯선 비애
난 희망버스의 내면을 보고 싶었으나
건조한 스트레이트 기사만을 기계적으로 올리고 있었다
난 희망버스 참가자들과의 풍부한 대화를 놓쳤고
즐거운 대화로 연결됐던 몸과 몸의 개화, 그 신명나는 춤의 시간을 놓쳤다
스트레이트 기사와 정치선동의 어중간한 위치
더 이상 내가 있을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3차 희망버스도 어떤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산역에서도, 청학동에서도, 한진 R&D 센터 앞에서도
희망버스 참가자들 자신의 이야기는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고
국회의원들과 제도정당의 발언만이 도드라졌다
그 연단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가
국회의사당을 통해 정치적 절충으로 해결가능하다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희망버스의 가능성이 고작 국회의사당이란 말인가
전망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힘이 관철되는 세력의 문제였다
반혁명의 힘은 가장 새로운 운동형식 속에서도 자라고 있었다
난 85크레인 아래에서 태어났으나 생존기간이 지극히 짧았던
배제된 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운동을 잊지 못한다
나의 권리를 대의하겠다고 나선 자들의 청중으로 전락하는 한
노동자들의 미래는 없다
#. 태풍 무이파의 능선을 타고 내 몸에 찾아든 민들레 홀씨 하나
태풍 무이파 때문에 추자도에 1주일 가까이 고립됐다
고립 …….
난 내가 속하거나 혹은 삶을 지탱해왔던 어떤 경향과의 단절에 만족하고 있었다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난 태풍 무이파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태풍 무이파는 내 뚱뚱한 삶의 낡은 퇴적층들을 2cm미터 들어 올리는 힘으로 다가왔다
태풍 무이파의 내부를 오래도록 걸었다
신경세포 하나까지 짜릿짜릿했다
모든 사물들은 임박한 사건 쪽으로 바싹 당겨져 있었고 더더구나 혼란스러웠다
난 이 혼란스럽고 임박한 사건의 시간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난 그 곳에서 온 몸으로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렀다
모든 경향을 다 품었으나
고요하고 비어 있는 태풍의 중심에서
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태풍 무이파가 지나간 자리, 민들레 홀씨 하나 내 몸에 찾아들었다
저 민들레 홀씨는 태풍의 고요하고 비어있는 중심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지난밤, 태풍 무이파의 능선을 타고 이 세계의 낡은 퇴적층들을 갈아엎으며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내 뚱뚱한 몸도 씨 뿌릴 자리라고 찾아온 민들레홀씨에게 고맙다
민들레홀씨를 품은 내 몸은
전 생애에 걸쳐 고요하고 비어 있는 태풍의 중심을 잉태할 것이다 (2012년7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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