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백홍석,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봉당풍경](4)가족 신화를 넘어, 우리를 보호할 사회의 어떤 것들

최근 화재가 됐던 드라마 추적자를 소재로 가족과 사회구조에 대한 고민을 열어본다. 물이 새는 20평 연립에서 벗어나 딸아이가 대학을 가기 전까지 내 집 마련이 꿈이었던 백홍석 형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시대 가장의 전형이다.

그럭저럭 평온했던 백형사의 삶은 교통사고로 사망에 이른 딸아이의 죽음이 살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뿌리째 흔들린다. 설상가상 교통사고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딸아이를 살해했던 권력집단은 철저하게 재판을 조작한다.

부모 속 꽤나 썩일 사춘기였던 딸은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일해서 식구들이 살아갈 수 있는지를 벌써 알아버린 명랑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였다. 그런데 조작된 재판으로 딸아이는 마약하고 원조교제하는 십대문제아가 된다. 그 과정에서 백홍석의 아내는 분함과 억울함을 가누지 못하고 딸아이 곁으로 가게 된다. 뭐 이렇게까지 처절해야 할까 싶기도 했지만, 우리의 현실과 견주어 봤을 때, 드라마가 더 극적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평범했던 가정이 몰락에 이른 것은 추적자에서처럼 극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가장의 실업, 가족의 질병이나 죽음, 아이들의 사고 등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 수 있는 요소는 너무나 많다. 특히 2000년대 불안정한 일자리와 소득감소로 인해 서민 가정의 경제적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도시의 보이는 곳은 화려해지고 풍요롭게 변해 보였지만, 우리네 삶은 그와는 다른 모습으로 삭막해지고 불안해졌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시킬 만큼의 불안정성은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그래서일까? 결국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는 신화는 더욱 강화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외로울 때에...’ 결코, 아직까지 이 사회는 ‘여러분’으로 다가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은 어떡해서든 식구를 부양해야하고, 홀벌이 가구는 소득이 낮을수록 찾아보기 어려워 졌다. 또한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신분의 수직적 상승이 더욱 어려워져서 부모들은 자식들 교육에 올인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업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하고, 공부이외에 자신을 드러낼 방법이 막힌 아이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탈선을 보여도 교육정책과 부모들의 태도는 일관되게 고집되어왔다. 내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아비와 어미는 과도한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돈이 되는 모든 것에 노출되었고, 사교육을 충분히 시켜주지 못하는 부모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짜인 구조에서 각자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부모의 인생은 자식의 출산과 더불어 현금인출기가 되어야 하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20년을 그들의 희망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한가? 그렇게 가족의 연대와 생존은 보장받고 있나?

가장이 해고되는 순간, 운영하던 가게가 망하는 순간, 아이들이 명문대를 입학하지 못하는 순간,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하지 못하는 순간... 그 많은 순간순간 가족의 시름은 깊어지고, 생계수단은 막막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막막함과 시련이 조직된 사회연대로 확산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고 가족중심의 사고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추적자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백형사의 삶을 늪으로 빠지게 한 주체는 재벌가 와 그들과 공모한 국가공권력이다. 백형사는 평범한 시민이었지만 자본과 국가를 대항해서 싸웠다. 그의 가족을 산산조각 낸 자본과 국가의 잘못을 국민들 앞에 낱낱이 밝히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 엄청난 일을 성공으로 이끌게 해준 힘은 그를 지지하고 도왔던 동료와 양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가족 밖의 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백형사는 좌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수많은 백형사들이 있다.

여전히 대한문 앞을 지키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장기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 가족을 잃고, 사법적 처벌까지 받고 있는 용산참사 유가족들, 건설 및 군수자본과 군사 확장에 맞서 평화를 지키려는 강정마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백형사만 해도 이렇게 많다. 또한 그들 곁에서 가족은 아니지만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함께 하는 사회적 관계 또한 넓고 깊어졌다.

가족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것은 가족만이 아니다. 그러기에 가족중심적인 사고의 틀을 깨야한다. 개인적으로 추적자에서 가장 두려웠던 존재는 서 회장이었다. 그의 대사 중 기억나는 두 가지가 있다. “명절 때마다 소싸움에서 내리 몇 년을 이긴 황소가 모기한테 물려 죽었다”는 것과 “옳은 일 한다고 자식들 굶기는 가장은 가장이 아니다”는 소리.

서 회장은 극 중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자로 군림한다. 그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는 세상 이치를 다 통달한 듯 신처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의 위치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그런데 두 대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첫째, 결국 거대한 어떤 대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시작은 아주 사소한 혹은 아주 작은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모기와 같은 노동자 민중의 저력을 저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주체인 우리 스스로가 그 저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둘째,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끊임없이 분리시킨다는 점이다. 저들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수단으로서 가족이데올로기이다. 무슨 일을 해서든 제 식구를 책임진다는 것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부분은 가족을 책임진다는 결과 때문에 미덕이 되어버렸다.

우리에게 어떤 선택과 자유가 존재할까? 내 자식만 성공시키면 된다는 식의 사고에서, 우리 가족만 안전하면 된다는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뼈 빠지게 충성을 다해도 자본의 이윤창출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사람일지라도 철저하게 제거된다. 여기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예외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단 말인가?

가족을 지키고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야를 넓히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한 움직임과 주체형성으로부터 제도화된 사회복지는 자본이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적 복지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영혼을 잠식시킨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만큼의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는 남성생계부양자 가족의 쇠퇴에 적응하기 위해 발전된 측면이 있다. 또한 아동 및 여성에게 지워지는 불평등한 짐이 사회복지를 통해 완화되기도 한다. 가족의 쇠퇴와 불평등 증대는 체제 유지의 관점에서 매우 불안정한 요소이기 때문에 자본에게도 해결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가족이 보호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매우 잔여적이거나 질 낮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가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우리는 보호할 사회의 어떤 것을 만들어 간다면 적어도 자본의 수준이상은 넘게 될 것이다. 가족의 불안정성을 사회의 공간으로 맡길지, 혹은 개인의 영역으로 그대로 둘지는 정치인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가족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가족의 신화를 깰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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