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키던 송 대위가 강정 지킴이 된 사연

[인터뷰] 강정마을 지킴이 송창욱의 신나고 짜릿한 투쟁

“기자님도 이 차 타고 이동하시면 되겠네요”

취재차량도 없이 동진과 서진을 오갈 일이 막막하던 차에 단비 같은 목소리였다.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에 뒷 자석에 실려있는 기타, 나이 성별을 불문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던 그는 전형적인 ‘평범하고 인자한 옆집 아저씨’의 인상이었다. 그러나 사양 없이 올라탄 차에서 들은 그의 이력은 ‘평범한 옆집 아저씨’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행진단 곁에서 기타를 치는 송창욱 씨

강정마을 지킴이, 제주 읍면동 대책위 활동가인 송창욱 씨는 육사를 수석입학 했던 예비역 장교다. 사관학교 졸업 이후에는 맹호부대로 더 널리 알려진 수도기계화 보병사단과 대통령 경호실 직속부대인 55경비대에서 복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대통령 경호실 직속 부대의 중대장은 군인으로서 출세가 보장된 탄탄대로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55경비대 중대장 송창욱 대위는 지금 강정마을 지킴이 ‘욱 꽃’이 됐다. (강정마을 지킴이들은 서로를 꽃으로 부른다. 이름의 ‘욱’ 자를 따서 그는 ‘욱 꽃’이라 불리고 있다)

안보를 위해 제주 해군기지는 안된다

육사를 수석입학하고 군 요직에 있던 예비역 장교가 해군기지 건설반대 현장에서 활동한다. 이 조금은 생소하고 특이한 이력에 그는 “나는 생도시절과 군인시절의 마음가짐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줄 것”이기 때문에 강정마을에 있다고 했다.

“언제까지 우리가 미국의 비호아래 있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해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해군기지를 짓겠다는 것은 중국의 입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는 해군기지 건설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지적하면서 자국 영토에 소련의 미사일기지를 허용했다가 미국의 압박을 받고 있는 쿠바와 명-청 교체기의 외교적 실책으로 전란에 휩싸였던 조선시대 역사까지 언급했다. 해군기지가 오히려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단순한 그의 머릿속 발상이 아니라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 얻은 결론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나아가 그는 외교적 선택보다 더욱 중요한 ‘안보의 근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안보의 근간은 국민들이 정부와 국가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부터 기인합니다. 군인 출신인 저도 강정의 상황을 보고 있자면 이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바칠 수 있느냐에 대한 회의가 들어요. 온갖 편법과 탈법이 난무하고 있거든요”

그는 강정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서 정부와 국가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적 판단이나 정책적 결정은 토론과 논의를 통해 결정사항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걸 집행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원칙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정부의 태도는 그렇지가 않아요. 용산이나 쌍용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강정은 그 모든 과정을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강정마을에는 정부나 국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강정마을은 정부와 국가가 ‘안보의 근간’인 국민들의 마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있는 곳인 것.

그는 왜 강정에 왔나

해군기지 건설 논의가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그가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화순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에는 그저 추상적인 수준의 반대였어요.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중국 관광객들이 제주를 찾지 않겠다는 생각 정도였죠” (해군은 2002년 제주 안덕면 화순항을 해군기지 건설 ‘최적지’로, 다시 2006년에는 남원읍 위미항을 최적지로 선정했었다. 강정이 세번째 최적지가 된 것은 2007년 4월이다)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로 선정되고 주민들이 반대투쟁을 벌여나갈 때에도 그의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광우병 촛불집회와 용산참사를 지나면서 온라인 공간을 통해 강정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접하고 또 강정마을이 해군기지로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에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부터 “강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작년 4월 양윤모 선생이 폭력 연행, 구속되고 신구범 전 도지사가 양 선생이 계시던 중덕사에서 동조단식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야 5당이 강정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강정으로 가보자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그의 결심을 실행에 옮겨준 것은 ‘운동권 출신’의 고교 동창이었다. 축구 모임에서 운동을 마치고 가진 뒷풀이 자리에서 한 의기 투합이 그를 거리로 이끈 것이다. “내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며 강정 얘기를 할 수 있을 것”란 친구의 푸념에 그가 “그럼 내가 노래 부를 테니 네가 유인물을 나눠주라”며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활동이 이제는 ‘사람’에 엮여서 계속하게 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양윤모 선생님, 문규현 신부님과 함께 첫 연행을 당했어요. 문 신부님과 저는 나왔는데 양 선생님은 그대로 구속되셨죠. 이젠 빼도박도 못 하는 상황이 된겁니다”

신나고 짜릿한 싸움

그는 기타를 친다. 노래도 부른다. 강정마을 밴드인 신짜꽃밴과 영상취재를 위한 차량지원을 맡은 대행진에서도 틈틈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행진단의 힘을 북돋는다. 고교시절 중창단과 사관학교 시적 밴드활동의 경험을 살린 활동이다.

  송창욱 씨가 이동을 담당하고 있는 신짜꽃밴의 공연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결사반대 같은 구호나 전투적인 말들이 싫었어요. 이제 이 싸움은 도민들, 국민들에게 다가서야 하는데 그래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강정 평화대행진도 그를 비롯한 읍면동 대책위의 기획이다. 현장에서만의 투쟁으로는 더 이상 어렵다는 판단으로 도민들과 만날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한 결과다.

“정치권에 기대거나 선거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직접 알리자는 고민으로 순례 촛불 문화제를 기획했어요. 그걸 마을회와 범대위, 전국대책회의에서 받아 더욱 큰 판으로 확장 시켰죠”

그는 “도민들이 모두 강정마을의 상황을 알기만 한다면 다음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대행진에 제주도민들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아쉬워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새로운 동력이 끊이지 않는 강정은 신비한 곳

그는 강정마을에서 자신의 역할을 “새로운 동력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초에 해군기지 건설 예산이 전액 삭감되고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도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구럼비가 발파되면서 주민들도 활동가들도 지치고 상처를 많이 받았었죠. 그럴 때 마을 주민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닌 평범한 제주도민이라는 새로운 동력이 된거죠. 활동가도 주민도 아닌 평범한 주민이 같이 유치장 가주고 같이 싸우니까 힘이 됐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강정마을에 신기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구럼비가 발파되고 전부터 활동해오던 이들이 많이 지치고 패닉에 빠져있을 때 저 같은 새로운 동력이 투입됐었고, 지난 4월 총선이 끝나고서 멘붕이 왔을 때 또 새로운 동력이 들어왔어요. 그 때 결합한 친구들은 구럼비를 구경도 못 한 친구들이에요. 지치고 다시 힘을 얻을 때까지의 공백을 메워줄 이들이 계속 유입되고 그 힘으로 싸움이 지속되고 있는거죠”

그는 이렇게 새로운 동력이 계속 들고 또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그 힘을 얻어 싸우기 때문에 “이 싸움은 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안이한 불의보다 험난한 정의를 택하라”

군 전역 이후 송창욱 씨는 잘나가는 학원을 운영했다. 벌이도 남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강정마을에 들어선 이후 그에겐 이렇다 할 수입이 없다. 생계의 문제. 가족들의 걱정이 없을 수 없다.

“제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겨줘서 많이 응원하고 지지해줬어요. 다만 벌써 7개월 째 벌이가 없다보니 생활의 문제 때문에 아내가 걱정을 하고 있죠” 올 해 고3인 딸도 아무래도 관심이 소홀해진 아빠에게 서운 할 수밖에 없다. “아빠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랑스러운 마음과 그래도 자신에게 소홀한 것에 서운해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31일 대행진에는 중학교 2학년 아들과 함께했다. 아들은 아빠의 연행과 재판도 모두 지켜봤다. 아빠가 만약에 감옥에 가면 어쩔거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대답하는 씩씩함을 보였다. 걱정과 서운함이 동반되지만 가족들은 어디까지나 그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연행소식에 “그럼 오늘은 구럼비 누가 지키냐”고 물었다고.

사관학교 시절과 군복무 시절의 동료들도 그를 염려한다. 어떤 선배들은 그가 해군기지 건설 반대하는 내용을 그의 SNS에 포스팅하자 그를 격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엔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군 시절 동료들도 늘고 있다.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해군사관학교 출신 선배는 평화대행진 전야제에도 참석해 그를 응원했다. 그는 이런 지지와 응원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금만 알아보고 공부하면 이게(해군기지 건설)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보통 시민들은 정보도 제한적이고 군에 대한 전문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 할 수 있지만 사관학교를 나온 군 전문가들이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고 강정마을 주민들을 종북좌파니 하며 비난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동진과 서진을 누비며 움직이는 그와의 인터뷰는 대행진단의 일정이 모두 끝난 늦은 시간에 이뤄졌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 인터뷰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다음 일정을 챙기고 마을에 남아있는 활동가들의 안부를 묻던 그는 다음 날에도 새벽같이 대행진단을 향한다. 자동차 뒷좌석엔 기타가 실리고 신짜꽃밴과 취재차량 없는 기자를 태우고 갈 것이다.

‘군인 출신의 활동가’라는 특이한 이력에 주목했지만 그는 “지금도 군인정신으로 살고 있다”며 그의 생활 신조라는 사관생도의 헌장을 들려줬다.

“안이한 불의보다 험난한 정의를 택하라”

그가 택한 정의는 ‘해군기지 건설 반대’였고, 그것은 대부분의 정의가 그렇듯 험난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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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 제주 해군기지 , 송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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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뭐뭐

    기사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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