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머리에 미리 밝히고 싶다. 이 글은 글쓴이의 확고한 생각과 주장이 드러나는 칼럼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르포르타주 역시 아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해 글쓴이의 입장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다분히 불명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차라리 ‘질문’이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다시금 고민을 꺼내들었으면 좋겠단 바람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타인에 의해 존재의 의미가 강제된, 그 강요된 존재라는 것이 ‘가장 불쌍’하거나, ‘가장 천박’한 극단의 선택만 있는, 그 존재들에 대한 질문이다. 이 글은 독자들에 던지는 질문이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이 너무 섣부른 해답을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가운데서도 기자가 알게 된 오직 한 가지는 “그동안 당연한 것이라 알고 믿어왔던 것 역시 그저 한 단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켜보고 듣고 고민해야 할 ‘삶’이라는 것은 훨씬 더 다양하지 않을까.
‘그녀들’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이사 직후 아직은 낯선 동네 어름을 헤매다 들어선 골목, 헐거운(?) 옷차림의 그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가 심드렁하게 날 쳐다보던 모습이 ‘그녀들’에 대한 첫 인상이다. 있어선 안될 곳에 들어섰다는 생각만 들었다. 황급히 골목 밖으로 나서는 길을 찾으면서도 눈은 그녀들을 힐끔거렸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녀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왕성한 성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을 비하할 목적으로 그녀들의 직업을 사용했다. 사춘기의 남자애들이 떠올릴 수 있는 직업군에서 상대에게 가장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직업은 그랬다. ‘창녀’, 욕설의 끝판왕.
많진 않았지만 머리가 좀 굵고 또래 보다 조금 일찍 철이든 아이 몇몇은 그녀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잘 풀리지 않은 인생이 내던진 기구한 삶의 여성들. 나중에 대학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고나선 ‘계급구조’나 ‘가부장제’ 같은 말들로 표현이 바뀌었지만 그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까운 그녀들, 구제의 대상.
창녀, 성매매 피해여성, 성노동자
근대 이전 성적 서비스를 담당했던 여성들에 대한 이름으로는 기녀, 창녀, 유녀, 해어화, 갈보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이름들은 이들 여성에게 ‘노는 (娼)’여자라는 이름을 붙임으로 규방 여성들과 상반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말 하는 꽃’이라는 의미의 해어화 같은 경우도 남성들에 의해 감상되는 꽃에 그녀들을 비유함으로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근대 이후에도 그녀들을 지칭하는 언어는 그녀들을 수동적인 존재라 단정하고 있다. 성매매특별법에서는 “성매매를 강요당하거나, 마약 등에 중독됐거나, 청소년이거나, 사물을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미약한 자, 장애인, 인신매매된 자”까지 포함해서 ‘성매매 피해여성’이라고 보고 있다. 성특법의 관점대로면 성매매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된 것’이며 성매매여성은 곧 성매매 피해여성이다.
반면 자신들을 ‘성노동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성매매 피해여성’이라는 이름은 성서비스를 거래하는 여성들을 적극적인 경제활동 주체, 일을 하는 노동자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부르는가, 어떻게 불리는가, 누가 부르느냐는 문제는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다. 그 이름 자체로 존재가 가시화되기도, 은폐되기도, 대상화, 타자화 되기도 한다. 지금 그녀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분명히 인신매매나 빚더미에 억눌려 원치않는 성판매(‘성매매’라는 언어는 분명히 잘못됐다. 여성은 성을 매매(賣買)하지 않는다. 오직 판매한다. 성매매라는 말은 이 관계에 존재하는 명백한 남성권력을 은폐한다. 이 글에서는 ‘의미의 전달을 극히 방해하지 않는 한’ 성매매 대신 성판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를 강요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이는 성판매를 생계유지를 위한 자발적 수단으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혹은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 패러다임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성급한 일반화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혹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기도 한다.
영화 ‘레드 마리아’를 연출한 경순 감독은 ‘레드 마리아’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당시 있었던 일화를 언급하며 일방적으로 그녀들을 규정하는 언어의 실례를 들었다. 당시 ‘레드 마리아’를 단체관람 한 어느 여성단체의 활동가들은 감독과의 대화에 토론자로 참석한 성노동자들을 ‘성노동자’로 지칭하는 것을 거부했다. 활동가들은 그녀들을 ‘성노동자로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경순 감독은 “당사자가 성노동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지만 활동가들은 한사코 그녀들을 ‘성노동자’로 부르지 않았다. 경순감독은 “근절론과 폐지주의에 입각한 이들 입장에선 성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판매, 혹은 성서비스가 노동일 수 있는지 여부는 논란거리일 수 있고 또 저마다 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정체성을 마음대로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그저 옳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레드 마리아’는 성노동자들을 비롯한 여성의 ‘몸’과 ‘노동’에 관한 영화다. 영화에는 한국과 필리핀의 성노동자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영화는 성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임노동 관계를 부정한 여성 홈리스 등을 통해 노동이 어떤 것이냐는, 특히 여성의 노동과 그에서 차지하는 몸의 역할, 여성의 몸과 노동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창녀’라는 말이 갖는 음란함과 ‘금지’에 낄낄거리던 사춘기의 남자 애들과 ‘피해여성’이라는 말로 동정과 구제대책을 얘기하는 이들. 또 ‘윤락’(윤락은 타락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이라는 말로 그녀들의 도덕적 해이를 강조하는 말까지. 이 모든 말에서 그녀들은 대상으로 존재한다. 다른 논의들을 잠시간은 차치해두더라도 자신들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규정한 본인들의 언어로 그녀들을 지칭하는 것은 경순 감독의 말마따나 그저 ‘예의’수준의 일 일지도 모른다.
▲ 영화 '레드마리아'의 한 장면 [출처: 시네마 달] |
나를 동정하지 마Thㅔ요, 피해자가 아닙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성노동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한 가지는 피해자가 아니므로 동정어린 눈길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성노동자권리모임 GG의 활동가이자 성노동자인 혜리 씨는 “성 노동은 기자가 기사를 쓰고 타이핑을 해서 돈을 버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특별히 권장할 만한 직업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죄의식을 가질만한 잘못도 아니”라고 했다. 그녀들에게 성판매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버는 경제행위, 그저 돈을 버는 일이다. 성노동자 연희 씨도 성노동이라는 ‘직업’을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오히려 아르바이트 하던 바(Bar)에서 사장에게 당했던 일들이나 등록금을 벌기 위해 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더 ‘착취’에 가깝다고 했다.
“바에서 시급 5천원짜리 바텐더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장이 유리잔을 제 얼굴에 던졌어요. 손님이 하는 얘기에 틀린 부분이 있어서 지적해줬더니, 손님이 마구 화를 냈거든요” 연희 씨는 일하던 바에서 임금을 받지 못했다. 억지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셔서 매상을 올리라는 사장의 강요에 구토와 음주를 반복하며 건강까지 해친 다음이었다.
인신매매 같은 폭력으로 강제되는 성판매가 일부이듯, 일부의 사례겠지만 혜리 씨와 연희 씨는 성판매 업소의 ‘업주’들이 다른 업종의 사업주들보다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아파서 더 이상 술을 못마시겠다는 종업원에게 술을 먹이고 얼굴에 유리잔을 던지고 오히려 손님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사장과 달리 끼니며 휴식시간을 챙겨주는데다 돈도 떼지 않고 일이 끝나면 바로바로 챙겾는 ‘이모’가 더 친절하고 가족 같았다고.
거듭 강조하지만 모든 성판매 업소의 업주들이 ‘이모’같은 친절함을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폭력배 같은 포주가 지키는 방에 감금당해 성판매를 강요받는 여성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혜리 씨가 성노동을 생계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 비혼모인 혜리 씨는 “식당을 비롯한 갖은 시급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아이들과 한께 생활을 유지하는데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노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넉넉하진 않아도 아이들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됐단다. ‘허영심에 쉽게 돈을 벌려고 시작했다 거듭할수록 빚만 늘어가는 성매매 피해자’라는 낙인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말이다.
도덕적 낙인 - 섹스의 의미에 대해서
성노동자들을 지칭하던 말 중에는 ‘갈보’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 어원에는 여러 짐작이 있지만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전갈처럼 피를 빨아먹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를 갈아가며 성교를 맺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 결국 둘 모두 성행위에 대한 비하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그렇게 ‘성’ 자체를 음습하고 불결한 것,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한다.
성판매, 매춘 행위가 “스스로 타락하여 몸을 버리는” ‘윤락’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된 것은 그 때문이다. 성노동자들은 이를 ‘결혼제도와 남성중심적 성권력의 작동’이라고 지적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관계에서는 인간생산을 전제로 하는 성행위, 즉 부부관계에서의 성행위만이 허용됐으며 쾌락생산을 위한 성행위는 철저히 통제받으며 터부시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신, 출산 등이 신성시되고 결혼제도 바깥의 불특정인과의 성행위는 불결한 것으로 취급됐다.
혜리 씨는 “섹스가 그렇게 신성하고 특별한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위하면서 그 일을 신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섹스도 그저 욕망을 해소하는 일상적인 행위일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연희 씨는 “성적 관계라는 것이 전적으로 당사자 간의 합의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일인데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제 3자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입을 모아 “연인관계에서 이뤄지는 성관계와 손님과 하는 섹스는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섹스란 것이 감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일일 수도 있고 동시에 오직 욕망을 해소하거나 ‘일을 하는’수준에서 이뤄지는 일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희 씨는 가끔 “섹스하고 싶으니까 빨리 손님이 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혜리 씨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동시에 엄마와 함께 사는 ‘딸’이다. 출산과 육아의 최전선에 살고 있으며, 양방향으로 ‘모성’을 체험하고 있는 여성. 그녀는 임신과 출산의 신비함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돈벌이 수단으로써의, 쾌락 생산을 위한 섹스를 모두 겪었으며 긍정한다.
“내게 재봉틀에 대해 말하지 말라, 내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하라”
전직 매춘인 마고 세인트 제임스는 “한 시간의 서비스에 대해 돈을 받는 것과, 한 시간 타이핑에 돈을 받는 것, 무대에서 한 시간 연극함으로써 돈을 받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구분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통한 노동이든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의미.
‘레드 마리아’의 경순 감독은 “비단 성노동뿐 아니라 여성의 몸과 노동에 대한 통제”를 이야기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이미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성노동을 비롯한 모든 노동에서 제대로 된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순 감독의 영화 ‘레드 마리아’에는 기존의 임노동관계를 거부한 여성들의 ‘노동’이 등장한다. 영화를 통해 경순 감독은 기존의 생산/재생산 담론을 벗어나 출산, 육아, 요양, 섹스 까지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규정한다.
경순 감독은 “성노동을 단지 성판매, 매춘 뿐 아니라 여성의 몸과 노동전반에 대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레드 마리아’에 기륭전자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와 필리핀의 성노동자, 일본의 ‘(임)노동거부자’가 동시에 등장하며 동시에 노동자로 규정지어지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성매매근절주의’에는 남성중심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성판매, 매춘의 착취 / 피착취의 구조와 억압구조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러나 GG의 밀사 씨는 “다른 분야의 노동에서도 억압과 착취구조가 발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노동과 산업이 잘못됐다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성노동만을 특별히 다른 층위에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각 노동이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듯 성노동에도 대항해야 할 특성과 인정해야 할 특성이 있는 것”이라며 성노동을 특별히 사유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성노동도 여타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몸을 써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노동’이라는 것. 또한 동시에 ‘성노동’을 포함한 여성의 노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지난 노동절 행진에 참가한 성노동자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피해자 아니면 범법자, 그 이분법 ‘넘어’ 어딘가
성노동자들은 현존의 ‘성매매방지특별법’을 넘어 성노동의 ‘비범죄화’를 주장한다. 한국여성연구원의 정의에 따르면 “성매매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규정은 없는 것, 규제하지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비범죄화를 규정하고 있다. 핀란드나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비범죄화는 성판매 행위를 국가가 불법화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들 국가에는 매춘관련법이 없으며, 동시에 처벌조항도 없다.
GG의 밀사와 연희 등은 뉴질랜드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4대보험이나 의료보험도 되는 케이스도 있다”며 국내에서도 ‘성판매 비범죄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성특법은 ‘성매매 금지주의’를 법의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성매매가 불법이며 그에 대한 처벌조항이 명시돼 있다. 즉, 성판매자를 재교육되거나 처벌받아야 하는 범죄자 혹은 일탈자로 인식한다.
성노동자를 범법자, 일탈자로 인식하지 않더라도 ‘보호와 구제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매춘은 강간과 같다”는 미국의 여성주의자 케슬린 베리와 같은 입장이다. 국내의 대표적인페미니즘 연구자 정희진 씨도 “성매매는 강간할 권리를 사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입장에 대해서도 성노동자들은 “성노동과 강간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금품이든 재산상 이익이든 어떤 약속도 전제되지 않는 것이 강간이라면 성판매에는 약속이 전제돼 있다는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금전을 대가로 성인들에게 허용된 행위를 하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목숨’과 관련된 살해, 상해 등이 아닌 이상 문제화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금전을 대가로 받기로 약속하고 성서비스를 판매하는 판매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비범죄화가 단순한 입법조처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성판매, 매춘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전환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범법자라는 윤리적 낙인을 찍는 것, 피해자라는 동정주의적 시선을 보내는 것을 ‘넘어선’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과 노동 - 경순 감독과의 대화
“섣불리 정답을 내려하지 마세요”
‘레드 마리아’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에 출연한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배’를 내보이는 장면이다. 그동안 가려지고 은폐됐던 여성의 몸과 노동을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았던 장면.
경순 감독은 “레드 마리아가 성노동자들만을 위한 영화처럼 전유되고 있지만 사실 성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몸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레드 마리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은 성노동자들 보단 일본의 ‘(임)노동거부자’이자 홈리스인 이치무라 씨다. 세상이 규정한 노동행위를 거부하고 살아가지만 분명히 노동하고 있는 이치무라 씨의 이야기를 통해 노동에 대한 규정과 그 규정에서 여성들이 배제되고 있는 과정을 살펴보고 싶었던 것.
“출산, 육아, 감정, 정서, 섹스까지 모두 노동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경순 감독은 이러한 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돼온 ‘가족주의’에 기인한다고 정의했다.
“아직도 뚫지 못한 가족주의의 굴레가 일방적으로 노동의 의미를 규정하고 거기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 그리고 여성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 여성들의 몸을 통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 ‘레드 마리아’성노동자 뿐 아니라 성노동을 포함한 여성의 노동을 규제하는 가족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었던 것.
그녀는 규정된 사실만을 강조하며 납득시키고 동시에 납득하는 교육과 태도가 본질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답을 상정하고 정답만을 가르치는 일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는 것. “가족주의와 성담론, 노동에 대한 규정 등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을 상정해 놀고 그것만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규정이 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노동, 성판매, 성매매도 “모두 본인이 규정해놓은 상태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인식을 전환 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태도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어른들은 돌아가시기 전, 결국 정답은 없었다고 말해요. 섣불리 정답을 규정해선 안돼요”
경순 감독은 “답을 아직 모를수도 아직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니 논의가 진전되지 않는 것”이라며 의심하고 또 고민하는 태도를 주문한다. 그녀의 주문은 결국 타인에 대한, 규정된 정답에 대한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
성노동자를 취재하고 인터뷰하게 된 계기는 취재나갔던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러 온 혜리 씨를 만나면서다. 그녀는 ‘노동자’로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연대하고 있다. 혜리 씨의 소개로 찾았던 성노동자 권리모임 후원 파티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며 자신의 삶을 내보이는 그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파티 장소에는 ‘업소’전경과 그녀들이 일하는 모습을 스케치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않는 태도.
취재를 하며 부딪힌 노동의 개념과 여성주의적 관점, 여러 주장들에 대한 입장을 명징하게 정리할 순 없었지만 삶의 층위는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녀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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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글
성노동,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연구팀
성이론, 고정갑희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