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기

[명숙의 무비,무브](1) ‘케빈에 대하여’가 던진 질문들

[편집자주] <명숙의 무비, 무브>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로 인권 감수성으로 영화를 보고 세상이야기, 생활얘기, 감동한 순간들을 가볍게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꼭지 이름도 <무비, 무브>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당부드려요.


20대부터 영화는 나에게 쉼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영화를 즐겨봤다. 자정쯤 집에 와서는 피곤해도 영화 한 편을 보고 잤을 정도였다. 당시는 비디오 대여점이 유행하던 때여서 좋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일과 관련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 쉼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나와 엮여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거리를 두고 보는 조율이기도 했으니까. 더구나 내가 영화를 즐겨보던 90년대는 무한 소비의 시대로 감각적 영상과 이미지, 스토리텔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은 일정하지는 않다. 영화에 따라, 나의 상태에 따라, 세상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어떨 때는 영화에 풍덩 빠져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해소(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으로는 정화됨!)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왜?’, ‘정말?’이라는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며 영화에 저만치 거리를 두고 보기도 한다. 얼마 전 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후자에 가까웠다.

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해야하지?

보통은 영화에 대한 내 느낌과 생각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서 영화에 관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본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와 보는 거라, 영화를 잘 고른 건지 걱정도 되고 해서 예매 후 몇 개의 감상평을 보고 갔다. 그래서일까? 영화 초반부터 몰입되지 않았다. 영화의 스토리를 알고 있어서인지, 영화를 본 사람들이 불편해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인지 물음표가 계속 떠다녔다. 보통 이 영화는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여자와 엄마의 사랑을 갈증하는 아들의 무차별 살인 복수’라는 게 대개의 평이기에 그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해야하지? 자식은 왜 어머니를 사랑해야만 하나?’라는 도발적 질문.

왜 우리는 부모와 자식은 사랑해야 하는 관계여야만 한다는 당위로 이해할까? 더구나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고, 자식을 선택할 수도 없다. ‘케빈’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아니 엄마 ‘에바’를 노골적으로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를 무조건 사랑하라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여성으로서 모성 본능에 따른 것이니 당연하다는 명제를 들이밀 때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성이 ‘결핍’된 것이라고 비난해도 그 비난을 고개 끄덕이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주인공인 에바는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는 유명한 여행가로 사랑하는 남자와의 취중 섹스로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한다. 헐렁한 옷으로 임신한 몸을 감출 정도로 그녀에게 임신은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울음을 달래는 것도, 산책을 시키는 것도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도무지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서 멀어지기 위해 시끄러운 공사장에 한참을 서 있기도 한다. 사실 처음 출산한 많은 여성이 에바처럼 육아에 힘들어한다. 모두가 아이를 처음부터 사랑하며 잘 돌보는 것은 아니다. 에바만 그런 게 아니다. 그래서 에바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가 불편하다. ‘모성은 본능이라는 신화’에서 비롯되는 시선을 마주할 때,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이다. 영화 내내 나오는 붉은색도 낙인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물론 엄마의 배에서 갓 나온 아이를 둘러싼 피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탯줄처럼 모자의 숙명적 관계가 보인다.)

모성신화에 대한 비판과 연구는 여러 여성학자들이 이미 말해 왔다. 수지 라인하르트는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에서 모성신화는 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이며, 16세기까지 가족을 중심으로 경제활동과 가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육아가 여성 혼자의 몫이 아니었다고 한다.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도 17세기의 가족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근대의 가족처럼 부모와 자식이 자애와 친밀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라인하르트가 인터뷰한 13명의 여성 중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남미나 마야족에서 발견되듯 산모들은 출산 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진화생물학자인 세라 브래퍼 흐르디에 의하면 첫 출산을 하는 산모 40%가 처음 아기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아이를 낳고 기쁨의 감격에 휩싸이는 경우가 전부는 아닌 셈이다. 그러니 에바는 특별한 게 아니다. 더구나 “엄마라는 위치는 늘 책임이 막중한 연중무휴의 고된 일과 배려와 이해심,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자리”이다. 케빈의 아빠처럼 퇴근 후나 주말에 잠시 아이를 봐주거나 놀아주는 정도로 가벼운 위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성본능 신화’가 떠도는 것은 희생적 모성의 인격체로서 어머니를 상정하여 여성에게 일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비용과 연구가 들어가는 양육정책보다는 가부장적 국가에서는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 바탱대르의 ‘만들어진 모성’에 따르면 인구통계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군사적·경제적 자원으로서의 의미가 확실해지면서 아이의 중요성이 생겨나자, 육아에 대한 국가정책이 생기고 어머니의 헌신적 역할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생겨났다고 한다.

[출처: (주)티케스트]

어머니의 희생을 강조하는 모성신화는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육아의 책임자인 어머니에 대한 비난으로 손쉽게 이어진다.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케빈이 아빠와 동생, 학교 친구들을 죽인 책임을 어머니인 에바에게 묻는다. 그녀는 재판을 받고도 마을에서 손가락질 받는다. 취업도 쉽지 않다. 케빈이 반사회성, 이른바 사이코패스(원작인 소설의 설정이 사이코패스다)가 된 것은 어머니의 탓인가? 그녀가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을 주지 않아서 아이가 살인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어떤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강력범죄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족의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끔찍하다. 그 힘든 양육을 여자에게 맡기는 것도 모자라서 그 아이의 잘못까지도 뒤집어쓰다니!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도대체 엄마(여성)들은 어디에서 숨을 쉴 것인가. 아이는 엄마나 부모의 전제(專制))아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친구와 동네 사람, 지역사회에서 함께 커가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던진 또 하나의 질문

왜 케빈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지? 케빈의 말대로 좋아하지 않더라고 익숙해지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집착에 가까운 그의 욕망이 불붙기 전에, 인간의 감정은 불안정하고, 사랑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모자관계여서 더 특별하고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케빈과 에바가 독립적 개인으로 만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삶과 생활을 공유하는 시간만큼 사랑도, 감정도 달라질 수 있다는 유동성을 케빈이 알았더라면 말이다.

[출처: (주)티케스트]

난제, 범죄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만남

직업병인지 영화를 보며 인권-차별을 떠올린 장면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케빈 때문에 에바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에바의 집과 차에 빨간 페인트를 던지는 장면을 보면서, 인권운동을 하는 나로서는 ‘범죄자 가족에 대한 낙인과 차별’의 심각성을 생각했다. 저런 일이 발생할 수 있겠구나, 사람들이 조금만 더 이성적이라면 그녀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어쩌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몇 주 후 신문에서 통영에서 살해된 초등생의 아빠가 살인범의 가족과 마주쳐서 너무나 힘들어서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며 ‘아뿔싸!’ 했다. 범죄자의 가족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도 정말 힘들겠구나, 만나면 떠오르고 가슴이 미어지겠구나 싶었다. 범죄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만남은 서로에게 난제이다. 이건 그냥 논리로 풀 수 있는 것도, 제도적으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겠구나 싶었다. 제도로 풀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산적해있을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픈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동료로서 보내는 위로가 아닐까.

최근 일어난 강력범죄와 성폭력으로 큰 상처를 입었을 모든 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북돋움인 위로의 한마디를 건넨다. 많이 아프시죠? 조금만 힘내세요. 우리도 당신의 아픔을 압니다.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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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 모성신화 , 여성학 , 케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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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성은 허구라? 그런가? 유수한 학자들의 그런 경험적 연구가 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라고 하고 싶지만 왠지 찝찝. 동물들은 자신의 애기를 어느 순간까지 애지중지 한다. 인간도 동물인데. 그런 것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변형과 발전이 있을 수 있지만. 모성이 허구라는 것과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살아남은 것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이라고는 좀 생각하기 힘듦.공동체적으로 육아를 하지 않는 문제점과 모성 자체의 부정이 혼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답은 어렵습니다만.

  • 독자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하겠습니다.

  • 의견남겨요

    태아는 엄마의 감정을 고대로 느낍니다. 아무래도 케빈의 엄마는 케빈이 태아일때부터 그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없이 케어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신을 해서 그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사랑은 본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의무적으로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한 인간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로 케빈이 그런 결말을 초래한대에 대한 그의 엄마의 책임은 응당 있다고 보여집니다.

  • 얼마전에 봤음

    이 영화가 좋았던 건, 모성은 신화라는 식의 어설픈 이념으로 에바를 옹호하기에 급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반대야 말할 것도 없고.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 없는 것. 그게 잘못인가? 처음부터 케빈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 에바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타인과의 긴밀한 유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갓 태어난 존재라면. 케빈이 결핍을 느끼며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그저 집착일 뿐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에바가 케빈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건, 단지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성성의 강제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에바와 케빈은 서로 너무나 잘 이해하면서도,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욕망의 불일치, 부딪힘 속에 어쩔 수 없는 힘듦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저런 부족하고도 불만족스런 시도를 교환하며.

    그러나 머리는 좋아도 아직 어렸던 케빈은, 에바와는 달리, 결국 자신의 불행을 무기화하여 타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더 이상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선을 넘을 때까지.

    구원의 기회는 있었다. 케빈이 아플 때, 엄마-자식이라는 당위적 관계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사랑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에바는 케빈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처음으로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한 사랑이 아니라, 익숙한 불행과 권력의 관계를 케빈이 다시 선택하면서, 짧았던 사랑의 관계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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