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부터 할 듯 말 듯 망설였던 3차 양적완화가 13일 발표되었습니다.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무제한으로 400억 달러의 모기지 채권(MBS)을 매입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데요. 매입대상은 다른 채권도 가능하다는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또한 초저금리 기간을 2015년까지 연장한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한 달 전부터 3차 양적완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 세계 주식시장이 과열되고 있었는데, ‘있기 없기’를 반복하던 숨바꼭질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죠. 고용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는 하나 실업률이 8.1% 수준에서 더 악화되지 않는 상황임을 볼 때, 지금 과연 ‘3차v양적완화’를 해야 할 급박함이 있는가는 다소 의문입니다.
혹자들은 오바마 정부와 공화당이 ‘재정절벽’(2013년부터 감세조치가 만료되고 매년 자동적으로 재정삼각) 문제에 타협점을 못 찾는 상태에서, 자칫 이런 균형재정 시행이 경기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정부의 적자재정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경기부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경제 살리기가 생각만큼 잘 진행이 안 되어 가뜩이나 지지율 답보상태에 머물렀던 오바마 정부 입장에서는 어찌되었든 ‘재정절벽’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더구나 이번 주 리비아 영사관 반미시위로 대사가 사망하는 등 공화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날로 증폭되는 터라,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연준의 이번 결정은 재정절벽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앞두고 ‘통화완화 정책’으로 선제 대응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연례행사가 된 ‘양적완화 숨바꼭질’
하지만 그동안 실행되었던 양적완화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 있는 터라, 이번 조치가 경기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아래 표를 보시면 양적완화 정책은 매년 시행돼 왔습니다. 연준의 FOMC 회의가 시작될 때마다 전 세계의 모든 시선은 버냉키 연준 의장의 입에 쏠렸습니다. “이번에 한대, 안한대? 얼마 푼대?”
적자재정의 한계와 ‘통화완화정책’의 남발
원래 경기부양의 교과서적 해법은 정부 부채에 의한 고용확대입니다. 그래서 불황으로 발생한 실업을 해소하고 불안정한 노동을 안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처분 소득의 지속성이 담보되고, 안정된 소득을 기반으로 소비가 늘어나고 투자가 발생하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입니다.
2009년 G20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대규모의 적자재정이 펼쳐졌습니다. 다행히 세계적 대공황은 피했지만 2010년부터 유럽 채무위기가 계속 불거지자 적자재정에 대한 보수주의적 공세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보수, 진보 양 진영에서 그 해법을 두고 심각한 격론이 벌어지고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가부채수준(740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이지만, 준정부기관인 공기업이나 지방정부까지 합하면 그 수치가 상당히 높아집니다(1,310조, 2011년 GDP 대비 99%).
이렇다 보니 적자재정을 해야 하는 재정정책보다는 중앙은행에 의한 통화정책에 의존한 경기부양책만 남발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증가합니다. 항상 모든 언론은 돈을 얼마를 풀었느니 하면서 부양효과 띄우기에 한 몫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금리인하’, ‘지준율 인하’, ‘채권 매입’ 등등으로 유동성 공급에 주력하지만 이렇게 풀린 돈들은 금융시장에만 맴돌 뿐, 원하던 고용을 촉진시키는 실물투자로 들어가질 못합니다. 미국이 언제 3차 양적완화를 하느냐를 가지고 전 세계 주식시장이 들썩였던 최근의 몇 달간의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 이상기후로 작황이 나빠져 식량공급에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이렇게 풀린 투기성 자금들이 상품시장만 과열시켜 전 세계적인 식량파동의 주범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적자재정이 불가피하다보니 궁여지책으로 감세부양 유혹에 빠지게 되고, 요란한 ‘양적완화책’만 난무합니다. 하지만 돈의 흐름이 실물경기로 제대로 못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방식이 국채를 직접 발행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채권유통시장에서 매입하여 금융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지난 13일 발표한 ‘월 400억 달러의 모기지증권(MBS) 매입’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채매입만으론 한계가 있자 주택시장부양을 위해 모기지증권을 직접 매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모기지증권은 주택담보대출을 기초로 하는 채권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부분 은행들이 이러한 채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요. 이렇게 풀린 돈들은 은행을 비롯한 여러 금융기관으로 직접 흘러들어 갈 것입니다. 한편으로 모기지증권 매입으로 모기지 이자율을 낮춰 주택대출을 활성화해 주택시장을 회복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채권 말고도 다른 종류의 채권을 매입하겠다고 했는데, 가령 회사채나 CP(기업어음)도 매입하여 자금을 필요로 하는 금융당사자에게 직접 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일본중앙은행이 2010년부터 양적완화 방안으로 시행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Comprehensive Monetary Easing (CME)]. 심지어 일본중앙은행은 ‘성장 강화 기구’를 만들어 여기서 판단하면 시중은행을 통해 구체적인 프로젝트 사업에 돈이 전달되도록 조치를 취한다고도 하는데[Growth Foundation Strengthening Facility (GFSF)], 그래서일까요? 일각에서는 미국 연준이 다음 ‘4차 양적완화’에서 무엇을 발표할지 참 궁금하다는 반응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양적완화’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한가 봅니다. 금융채권자들은 걱정 없겠네요. 중앙은행이 항상 사줄 대기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양적완화’로 경기부양이 가능한가? 금융시장만 부양할 뿐
원래 ‘양적완화’의 의미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중앙은행이 직접 사서 바로 정부재정으로 자금을 공급해 대규모 적자재정을 일으키는 걸 말합니다. 국가기관이 직접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9년 미국에서 1차 양적완화를 했을 때, 언론들은 버냉키 미국 연준 의장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그림으로 인플레이션을 묘사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양적완화’ 방식은 금융시장의 자산가치를 유지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금융시장에만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물의 성장에 기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금융상품들의 자산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건 투기적 거품일 뿐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미국 주식시장만 놓고 보면 벌써 미국은 위기를 탈출하고도 남을 만큼 회복했습니다. 심지어 2007년 버블시기의 정점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또 양적완화를 한다고 합니다. 고용지표가 원하는 만큼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죠. 아마도 조만간 ‘4차 양적완화’를 가지고 금융시장 참가자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드라마가 또 한 번 상영되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이렇게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로 풀린 돈들이 금융시장에만 맴돌고 있다는 건 다른 지표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요. 현재 미국은 0~0.25%의 초저금리로 시중은행에 자금을 공급하고 있지만 공급된 돈들이 대출처를 찾지 못해 다시 연준은행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계속되는 2008년 양적완화 정책 이후, 국채나 모기지증권 등을 매입한 미국 연준의 자산규모는 3배 가량(빨간색) 뛰었습니다. 그러나 예금기관들이 남는 돈을 다시 연준에 예치함(파란색)으로서 시중에 풀린 돈(노란색)은 연준이 의도했던 효과만큼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인 적자재정이 가능한가?
중요한 건 적자재정 그 자체가 아니라 유휴 노동자원을 가치창출의 원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성장과 분배로 나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실업수당, 보조금, 감세는 모두 가치를 이전시키는 효과일 뿐, 새로운 가치창출의 직접적인 원동력이 아닙니다. 적자재정을 펴는 이유는 국가가 대규모 적자를 보고서라도 노동을 직접 조직화(고용)하여 국가적인 가치창출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도로, 댐, 다리, 철도 등등 국가자산이라 일컬어지는 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이었습니다. 미국의 뉴딜정책으로 상징되는 공공사업들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은 산업화가 고도로 진행되어 있어, 더 이상 이런 방식의 국가적 대규모 사업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를 계속 깔아봐야 소모성 실업수당을 나눠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일본이 90년대 대규모 적자재정으로 경기침체를 탈출하려 했으나 건설토목에 관련된 사업만 벌이다 재정만 고갈되는 결과를 겪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4대강 사업’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느낌이 확 오실 겁니다. 환경파괴와 이후 관리비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손해만 본 대규모 실패작이죠. 아래 그림은 제가 예전에도 한번 인용한 것인데요. 지금까지도 장기불황을 겪는 일본이 적자재정을 10년간 실시했던 90년대 성장률 자료입니다.
보시듯 재정지출 확대로 몇 년간 잠시 성장률이 회복하다가 재정투여가 끝나자마자 곤두박질칩니다. 그러다 다시 재정투자를 하면 수년간 상승하다가 다시 뚝 떨어지고요.
90년대 2000년대 세계적 호황에 힘입어 수출로 경제를 지탱한 일본도 내수불황으로 20년째 고생하고 있는데, 일본처럼 수출이 경제성장의 주요한 동력이 되지 않는 나라들은 이마저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이나 내수부양의 여력이 있고 금융시장의 투기적 외풍을 견딜 수 있는 중국 정도만이 대규모 적자재정을 투여할 수 있을 뿐, 어느 나라도 현재 과감한 적자재정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어떤 나라가 적자재정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통화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곧바로 외환투기세력들의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면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외환보유고는 소진될 것이고, 방어에 실패하면 외환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경기부양을 위해 대규모 적자재정을 한다면, 2009년 G20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동시에 했던 방식이 유력합니다.
현재 유럽 위기 극복의 논쟁을 봐도 수출로 돈을 많이 버는 독일에게 돈을 팍팍 좀 쓰라고 요구할 뿐 위기국가들이 주체적으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2년 동안 지리멸렬한 논쟁 끝에 최근 도출된 대안 이라는 걸 보면, 유럽중앙은행이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까다로운 조건에 맞춰 단기국채를 매입해 주는 정도입니다. 대규모 적자재정은 입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기부양’이라는 이름의 말잔치
이제는 우리가 좀 솔직해져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금융위기의 주범들에 대해서 시스템 개조를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게 4년 전 일인데,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 금융시장 ‘부양’ 정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파생상품에 과세를 붙이는 것조차 열렬한 ‘반대자’들에 의해 흐지부지되고 있으니 참으로 복장 터질 일입니다. 위기극복은 지연되고 지연된 틈을 타 다시 위기를 불러올 투기꾼들의 위험한 불장난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계속 양적완화에 환호하는 주식시장만 화면 앵글에 잡혀 있으니 참으로 또 한 번 복장 터질 일입니다.
위기 때마다 매번 경기부양을 외치지만, 정작 그 부양책으로 풀린 돈이 누구의 이익으로 돌아가는가에 대해서, 이제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양적완화’, 과연 누굴 위하여 돈을 뿌리는 건가요? 헬리콥터에서 뿌려댄다는 그 돈들은 증권거래소 옥상 위에 차곡차곡 쌓일 뿐입니다. “그럼, 증권거래소 기둥뿌리라도 뽑아야 그 돈 좀 만져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