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상품에만 의존하게 되었는가?

[새책] 마그나카르타 선언 (피터 라인보우, 정남영 역, 갈무리, 2012.8)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충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에게 자립의 삶이란 꿈에 가깝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몸뚱이뿐. 오직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살아가는 삶이 지배적인 형태다. 그것이 99%의 삶이다.

피터 라인보우가 쓴 <마그나카르타 선언>은 왜 이러한 삶이 현대의 지배적 형태가 되었는지, 다른 삶의 방식은 없었는지, 그것에 있어 마그나카르타 선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책이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커먼common을 기본형으로 하는 여러 단어다. '공통의', '공통적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 단어들을 역자는 대부분 음역하고 있는데, 그건 역자의 말처럼 "이 단어의 바탕이 되는 '공유지'the commons의 삶이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어 그 의미가 준거할 현실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시 대상이 사라졌으니 그것을 가리킬 언어가 마땅치 않은 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다시 저자의 질문을 따라가 보자. 왜 우리는 상품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저자에 따르면 그건 우리가 공유지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18세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들판은 대체로 개방되어 있었고 자작농, 아이들, 여성들이 커머닝commoning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쇠나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가 물질문화를 구축하던 시대에 숲의 공유지는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숲은 난방과 조명, 건축자재, 신발, 쟁기손잡이 등 다양한 재료가 될 수 있는 나무를 제공해줌으로써, 자급농업의 토대를 제공해 준 에너지원의 보고이자 "민중의 안전망"이었다. 또한 사유화되지 않은 황지荒地는 사회적 보장으로 기능했다. 황지는 방목권이 없는 사람들을 커머너commoner로 만들었고, 유용한 산물을 주었으며, 다른 커머너들과 교류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 즉 황지를 거점으로 한 커머너들의 교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커먼즈가 단지 공유하는 땅,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물질적 사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이며, 다른 삶의 방식이었고, 공통적인 것에 대한 공통적인 관리를 뜻한다.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던 이 활동을 뒷받침한 문서가 바로 마그나카르타 선언과 삼림 헌장이다. 1215년 6월 존 왕은 템스 강 옆의 러니미드라 불리는 초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과 마그나카르타의 63개 조항을 맹세로써 약속하였다. 헌장은 교회, 봉건귀족, 상인, 유대인들의 이익을 보호함과 더불어 커머너를 인정하였다. 공유지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공유지에서의 삶은 종획enclosure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구의 삼림지대들은 상업적 이익을 위해 파괴되었고, 전 세계의 원주민들-커머너들-이 수탈되었다.

"…… 교활한 유럽인들은 …… 삼림청이라는 거대한 상부구조를 세웠다. 모든 산과 구릉들, 그리고 미개간지와 방목지가 삼림청의 통제하에 두어져서 가난한 농부들의 가축은 땅 위의 어디에도 숨 쉴 곳이 없었다."

세계의 공유지가 울타리 속으로 가두어진 것이다. "종획은 땅과의 정신적 유대를 파괴했고, 커머너들을 다양한 노동규율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예비작업을 했다." 추방된 커머너들은 이제 도시의 공장에서 착취되는 노동하는 신체가 되었다. 이것에 있어 종획에 의한 커머닝의 근절은 절대적인 요소였다. 이와 함께 마그나카르타는 경제적 자립을 보장했던 삼림헌장과 분리되어 오히려 사유재산의 보호와 확대에 바쳐진 지배계급의 우상이 되었다. 저자는 이것이 미국에서 마그나카르타가 차지하는 모순적인 양상이라고 말한다.

마그나카르타가 대부분 정치적, 사법적 권리와 관련되어 있다면, 삼림헌장은 경제적 생존을 다룬다. 그러나 두 헌장이 분리되면서 삼림헌장은 사장되었고, 정치적 권리를 다룬 마그나카르타는 외려 착취를 정당화하는 법적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현상은 근대 국가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는 것과 일치한다. 공적인 것은 국가의 영역이 되었고, 사적 영역은 '자유로운 개인'이 경쟁한다는 시장이 되어 자본에 맡겨졌다. 커먼즈의 영역은 사라졌다. "땅은 도둑맞았다." 이것이 상품 교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다. 때문에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삼림헌장이 뒷받침된 마그나카르타이다. "정치적·사법적 권리는 경제적 토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다. 자본주의적 삶이 하늘이 내려준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1%의 풍요를 위해 99%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방식이라면, 커먼즈를, 공통의 부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축적의 양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공유지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산업자본주의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성장했다면, 지금은 다시 수탈의, 그러나 새로운 수탈의 양상이 나타난다. 비물질 노동이 점점 더 지배적으로 되는 현대 도시에서 과거의 공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메트로폴리스 전체가 공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젠트리피케이션은 대표적인 자본축적의 장치다).

이제는 삶 자체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집합적 활동이 수탈되면서 역설적으로 자본축적의 도구가 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창조적인 활동이 차이를 생산할수록, 그 차이는 지대를 생산하고, 그것은 다시 그들을 착취하는 도구가 되었다. 공통적으로 생산되는 부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라는 울타리가 만들어 놓은 회로를 따라 흐른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도시는 새로운 수탈의 장소다. 우리의 숲은 어디에 있는가? 필요한 것은 이 차이가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벗어나 다른 경로를 따라 흐르게 하는 일이다.

이제 이 도시에 황지는 없다.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은 대지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커머너가 된다는 것, 커먼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 울타리에 박힌 못을 뽑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헌장이 왕의 영역에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의 영역에 자급적 생계를 제공하였듯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가로지르고 공통의 것을 공통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새로이 발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국가에 의한 관리도, 자본에 의한 착취도 아닌 또 다른 길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공통의 감각을 발달시키고 실험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에 따르면 "공통권은 지역의 독특한 생태계 속에 함입되어 있다". 공통의 감각은 단지 선언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방식은 부단한 실험의 연속일 수밖에 없고, 그 양상은 저마다 독특할지도 모른다. 그 독특함은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벗어나는 독특함이자, 저마다가 자리한 생태계가 주는 독특함이다. 그러나 그 때의 차이는 지대로 가는 차이가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차이를 열어주는, 그러면서도 커머너로서 함께하는 삶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실험들이 이미 여러 도시의 광장에서 계속됐음을 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헌장을 써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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