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이면서 동시에 새책, 이동화 평전

[낡은책] 두산 이동화 평전 (김학준, 1987 초판, 2012 수정증보판, 549쪽)

<두산 이동화 평전>은 같은 저자에 의해 25년 만에 다시 나왔다. 두 책을 쓴 이는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고, 1979년 <러시아혁명사>를 썼던 김학준이다. 김학준은 전두환 때 국회의원을, 노태우 때 청와대 대변인과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단국대 이사장으로 있으니 보수주의자다. 암튼 그런 인물이 30여 년 전엔 러시아혁명사를 썼다.

이동화 평전이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란 부제를 달고 1987년 민음사에서 나왔을 때 김학준은 서문에다 솔직하게 “존경하는 선배 남재희 의원이 지난 가을(1986년) 뜻밖에 두산 선생의 전기를 써 볼 것을 권했다”고 밝혔다. 김학준은 당시 평생 사민주의자로 살아왔고, 당시에도 살아 있던 이동화를 “두산(이동화의 호) 선생은 살아 있는 국내 최고령 정치학자다. 동경제대 정치학과를 나온 뒤 경북대와 성균관대, 국방대학원, 동국대에서 가르치셨다”고 평했다.

꾸준히 사민주의자의 길을 걸어

도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만들었고, 1912년 ‘105인 사건’으로 복역했던 윤치호는 철저하게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일본 유학 때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해 1928년 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를 하다가 투옥된 뒤 공개 전향한 김준연은 1955년 죽산 조봉암의 야당 입당을 반대하고 철저하게 반공주의자로 살았다. 일본 천황을 시해하려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은 전향해 해방 후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노선을 지지하고 지금의 자유총연맹의 맹아를 출범시켰다.

두산 이동화는 1907년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머리가 뛰어나 동경제국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온 뒤 파란만장한 평생을 ‘북유럽식 사민주의자’로 살았다. 일제와 이승만, 박정희 정권 하에서 4번 투옥돼 온갖 고문을 받으며 정확히 5년 11개월을 옥살이 하고도 1995년 죽을 때까지 권력의 편으로 가지 않았다. 같이 활동했던 진보당의 윤길중이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 대표위원과 국회 부의장까지 했지만. 죽을 때까지 종암동 13평 서민아파트에 살았고 80대 노구를 버스에 맡긴 채 시내를 출입했다.

그가 인텔리답게 1945년 2차 대전 뒤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낙관했고, 1955년엔 순진하게도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을 믿었고, 1960년엔 엉뚱하게도 북한에서 김일성의 몰락과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예상하는 등 수많은 허점을 남겼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해석해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등 드물게 균형 잡힌 정치이론가였다.

혹독한 고문과 4번의 옥살이

이동화는 감성적으로도 따뜻했다. 죽산을 100%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가 진보당 강령을 부탁했을 때 군말 없이 만들어줬다. 그 일로 1958년 세 번째 옥살이를 해야 했다.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자로 강의했던 이동화는 1941년 지금의 동국대 강의 내용이 문제가 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첫 옥살이를 한다. 이후 혹독한 고문은 늘 이동화를 따라나녔다. 1955년엔 서울대 문리대 초청강연 내용이 문제가 돼 두 번째 옥살이를 하고 58년엔 진보당 사건으로 세 번째,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 때 마지막 4번째 옥살이를 한다.

해방 직후엔 북으로 올라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공식기관지였던 <평양민보> 주필을 지냈고 1946년 10월부터 50년 5월까지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도 맡았다. 이동화는 5공화국 때 고정훈이 만든 민주사회당을 마지막으로 길고 긴 한국의 사민주의 정당 인생을 정리했다. 1990년 11월 혁신정당을 지향했던 민중당 창당 때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이 제일 먼저 찾아간 이가 두산 이동화였다. 그때 두산은 80대 중반의 노령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동화를 두고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한국의 노먼 토머스’라고 부른다. 노먼 토머스는 미국사회당에 들어가 뉴욕시장, 뉴욕주지사 선거를 거쳐 1928~1948년까지 6번 대선후보로 나섰던 인물이다. 저자 김학준은 이동화를 영국 노동당의 이론가였던 런던정경대학 교수 해롤드 래스키를 닮았다고 했다. 김학준의 <두산 이동화 평전>을 요약했다.

두산 이동화 평전 (김학준, 단국대 출판부, 1987초판, 2012.3 수정증보판, 549쪽)

이 책은 ‘한국에서 민주사회주의운동을 개척한 정치학자의 이념과 행동’이란 부제가 붙었다.

수정증보에 붙여 - 2011.11.3 단국대 개교 74주년의 날에 김학준

이 책은 <이동화 평전 :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민음사, 1987)을 수정하고 증보했다. 87년의 책은 3개월 미만의 짧은 시일 안에 써 미흡함이 적잖았다. 이동화가 평생에 걸쳐 존경하고 따른 몽양 여운형 관련해 그동안의 학계의 연구를 반영하기 위해서라도 개정증보판이 필요했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죽산 조봉암에게 가했던 당시 사형 판결을 무효로 만들어 신원했다. 나는 진보당과 관련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동화의 입장을 훨씬 더 확실하게 설명해야 했다. 나의 판단으론 조봉암 관련 저서들은 이미 결정적인 게 출판돼 더 이상의 평전은 필요 없다. 준산에 관한 설명을 이 개정증보판에서 부분적으로 보완하기로 했다.

해방공간 소련의 북한점령통치와 관련해 1차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발굴됐다. 이 자료들은 소련의 북한점령으로부터 6.25전쟁 초기까지 북한에서 <민주조선>의 주필과 김일성대학의 강사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국군의 평양입성을 계기로 월남한 이동화의 행동을 보다 더 폭넓게 이해하게 만든다. 이를 증보판에 반영했다.

초판 출판 이후 25년 동안 국내외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동화가 평생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으면서 비판했던 볼셰비즘은 예상대로 파산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유럽에선 생존력을 과시해왔다. 자본주의는 1990년대 이후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새 형태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가운데 항의와 저항에 직면하면서 개혁과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영국의 <더 타임스> 경제담당편집인으로 <자본주의 4.0>을 펴낸 아나톨 칼레츠키의 분석을 믿는다면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스템의 개발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진화할 것이다.

남재희 선배는 이 책 초판 출판 뒤 내게 “두산의 생애는 한 마디로 ‘비장함’의 연속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 측면이 덜 부각됐다”고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두산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관련해 평생에 걸쳐 4번 감옥생활을 했다. 통산 5년 11개월에 걸쳤던 감옥생활은 혹독한 고문을 동반한 것이었다.

책 머리에 (초판) - 1987년 1월 11일 저자

존경하는 선배 남재희 의원이 지난 가을(86년) 뜻밖에 두산 선생의 전기를 써 볼 것을 권했다.

두산 선생은 살아 있는 국내 최고령 정치학자다. 동경제대 정치학과를 나온 뒤 경북대와 성균관대와 국방대학원, 동국대에서 가르치셨다.

1장 구한말의 풍운과 망국의 비애 속에서의 사상적 조숙

1절 두산의 어버이와 안중근

평남 평양부에서 16km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동군 승호면 승호리가 나온다. 이 부근에 만달산이 있다. 다시 동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화천리’가 있다. 두산은 화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달경, 어머니는 이희경이었다. 두산은 1907년 2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지주여서 생활이 어렵진 않았다.

1908년 안중근이 두산의 아버지를 찾아왔다. 이달경 초치와 안중근, 황해도 대지주의 자제 한씨는 대동강 상류의 석탄지대에서 공동으로 광산업을 시작했다. 집안이 넉넉한 안중근과 한씨가 재정을 대고 이달경은 주로 노력을 제공하면서 사업의 경영에 책임을 지기로 했다. 얼마 뒤 경영이 점차 좋아졌다.

그러나 사업은 1909년 늦은 봄 종지부를 찍었다.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사업을 접었다.

2절 박동화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

두산은 만 7살 때인 1914년부터 천자문과 한학을 배웠다. 이때 두산의 스승은 박동화였다. 박동화는 두산 아버지의 고모의 손자였다. 박동화는 두산의 성 다른 6촌형이었다. 박동화는 두뇌가 명석했다.

3절 3.1독립운동에 참가하다
항일민족운동단체 신민회의 회장이던 윤치호는 고문과 감옥생활을 겪은 뒤 친일의 길을 걸었다. 3.1운동 만세시위는 만 12세의 소년인 두산은 목격담에 귀를 기울였다.

4절 평양의 신식학교에 입학하다

3.1독립운동 직후부터 두산이 살던 작은 마을에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가들이 나타났다.

두산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1920년 4월 중순부터 평양의 신식학교에서 새 학문을 공부했다. 두산은 숭덕학교 보통과 4학년에 편입했다. 사립 숭덕학교의 마페트 교사는 항일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미국 선교사였다. 교장 정두현은 동경제대 농학부 출신의 훌륭한 애국적 교육자였다.

두산은 1921년 4월 급우 김기현과 함께 입학시험을 치고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 제1학년으로 진학했다. 이 학교의 교장 김득수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해 광성에서 줄곧 교편을 잡으며 광성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5절 민족지도자들의 강연을 듣다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는 쪽의 집회에도 두산은 자주 참석했다. 이 운동을 평양에서는 고당 조만식이 주도했다.

2장 일본유학, 그리고 정치학도로서의 민족적 자각과 마르크시즘 수용

1절 세이세이코중학에서 민족주의 청년으로 성장하다

만 18세 1925년 두산은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정세를 이러했다.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지하조직으로 창당됐다. 두산은 1925년 3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김대우가 나와 두산을 기다렸다. 김대우는 광성에서 교사로 일하다 큐슈제대 공학부를 마치고 하카다에 머물었는데 두산의 일본유학은 김대우가 주선했다. 두산은 큐슈제대 기독청년회관으로 갔다.

2절 야마구치고교에서 사회주의를 접하다

1926년 봄 두산은 야마구치고교에 들어갔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총재 마츠오카 요스케가 고향으로 와 야마구치고교에서 강연했다. 일본이 만주를 완전히 지배해야만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을 뿌리 뽑을 수 있고 한인들의 독립운동 전체를 뿌리 뽑을 수 있다는 논지였다. 앞줄의 한 학생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으로 항의했다. 퇴장한 건 두산은 아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즉 대정 민주주의(1912~1926)로 상징되던 다이쇼 시대가 끝나고 천황제가 급속히 파시즘의 길에 들어서든 시기였다.

두산은 기독교 파시즘의 목소리도 들었다. 1926년 초가을 야마구치교회의 한 설교자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극구 찬양했다.

두산은 크로포트킨 때문에 무정부주의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두산은 무정부주의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두산은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시즘 책도 읽었다. 두산은 소년시절의 순수한 민족주의로부터 넓은 의미에서의 진보적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이행했다.

3절 동경제대 정치학과에서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이다

야마구치고교 문과 갑류를 졸업한 1929년 4월 두산은 동경제대 법학부 정치학과에 합격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지성계는 유럽의 사상에 주목하면서 유럽의 이념들과 제도를 깊이 연구했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다이쇼 시대의 후반기에 접어든 때로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혁명 등등에 관심이 깊어갔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본정치학계의 관심도 깊어졌다. 1922년 일본공산당이 비합법2적으로 지하에서 창당된 것을 계기로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년)을 복음처럼 여기면서 마르크시즘과 레닌이즘을 전파했다.

식민지지식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각이 강했던 두산은 어느 분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혁명가나 투쟁가가 될 결심도 아직은 서지 않았다. 두산은 그저 망국의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자세를 지키면서, 민족의 살 길을 향해 고뇌하는 정치사상가로 성장했으면 하는 소박하고도 정직한 꿈을 안고 정치학과를 선택했다.

동경제대의 오우치 효에이, 야마다 모리타로 교수는 마르크스시트 경제학자였다. 히라노 요시타로 교수는 마르크시스트 법학자였다. 두산의 도다이(동경제대의 약칭) 법학부 정치학과 후배 김상협 전 고대 총장은 “도다이 법학부에선 이동화 하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이상한 책들’만 읽는 학생으로 알려졌다”고 회상했다.

두산은 동경제대 법학부 입학 동기생 두 사람은 법학과의 이충영(칠곡 출신)과 정치학과의 장철수였다.

이충영은 대구고를 나와 뒤에 평양복심법원 부장판사까지 올랐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법원을 떠났다. 그 뒤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어려운 동포들을 많이 돌봤다. 1948년 8월 초대 정부의 법무차관으로 천거됐으나 일제 때 판사 경력을 부끄러이 여기며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거물급 변호사로 좌익운동가들도 적잖게 도왔다. 6.25때 숨어 지내던 그를 찾아내 북으로 끌고간 사람은 그의 도움을 받았던 좌익분자였다.

이충영의 아들 4명은, 서울법대 교수와 총리를 지낸 이수성과 영남대 행정학과 교수 이수인, 정문연 정치철학 교수 이수윤,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박사후보 이수억 등이다.

이수성은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다. 이수인은 국회의원을 역임한 뒤 2000년 죽었다. 그 사이 2001년 모친 강금복 여사가 별세했다. 이수성의 여동생의 남편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이다.

다른 동급생 장철수는 한인으로 유일하게 일본 고문 외교과시험에 합격해 벨기에와 프랑스, 아르헨티나에 주재하는 일본의 공사관에서 영사로 근무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땐 외무부의 초대 정무국장을 지냈다. 장택상 장관 밑에서 3개월 남짓 정무국장을 지내는 동안 갖가지 ‘튀는’ 언행으로 주변에선 기인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가 탈출해 경북대 교수를 지냈으나 간암으로 1955년 5월 47살에 죽었다. 아내도 자녀도 없었다.

4절 폐결핵과 싸우면서 마르크시즘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다

두산은 1930년 4월 상순에 1학년을 마치면서 폐결핵으로 일단 휴학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요양을 마친 두산은 1931년 4월에 다시 동경으로 돌아왔다. 두산은 그해 6월 말 다시 귀향했다. 병이 심하게 악화됐다. 두산은 6년의 두병 끝에 1935년 만 28살에 죽음의 질병에서 소생했다. 두산은 1935년 2월 다시 동경으로 돌아갔다.

5절 군국주의시대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유물론적 폭력주의를 버리다

일본은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길로 치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두산은 우연히 기독교에 다시 접근한다. 하숙집 바로 옆집에서 미국인 선교사 앤드슨이란 이가 성경반을 운영해 두산도 참가했다. 두산은 야마구치 고교 때 파렴치한 일본인 설교 때문에 버렸던 기독교를 다시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두산의 정신세계에는 기독교와 민주사회주의가 공존했다.
1936년 3월 두산은 만 29살에 도다이(동경제국대)를 졸업했다.

3장 일제말기 여운형과 만남, 그리고 민족해방준비와 1차 투옥

1절 민족지도자들과 교우하다

두산은 1936년 서울로 올라와 평안도선배인 현상윤을 찾았다. 현상윤은 와세다 사학과 졸업생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현상윤은 인촌 김성수와 무척 가까웠다. 총독부가 <동아일보>의 복간을 자꾸 늦춤으로써 두산의 언론계진출은 이뤄지지 않았다. ‘몽양집단’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두산은 종로구 원서동의 고하 송진우의 사랑을 자주 찾았다.

2절 중앙불교전문학교와 혜화전문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

두산은 1938년 1월 서울의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전임강사로 일했다. 이 학교는 지금의 동국대다. 두산은 불전에서 만 31~34살까지 4년 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스탈린적 소비에트체제에 실망하면서 두산은 1940년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모택동이 발표한 신민주주의론에 관심을 가졌다.

두산은 ‘몽양집단’에서 핵심지도부의 일원으로 열심히 일했다. 갑과 을 두 연구서클은 마침내 박헌영의 지하항일조직체인 경성콤그룹과 연결됐다. 두산은 자신이 이끈 두 서클이 느슨한 형태로나마 ‘몽양집단’과 연결된데 이어 경성콤그룹에도 어느 정도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성콤그룹 쪽에선 자기들이 ‘몽양집단’의 두 서클을 흡수한 것으로 여겨 두산도 자기조직원으로 생각했다.

두산은 해방 직후 박헌영의 계략에 빠져 월북하는데 이 대목을 회상할 때도 자신이 박헌영을 만난 일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4절 첫번째 투옥, 그리고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

두산은 1941년 9월 서울로 올라왔다. 두산은 혜화전문에서 강의를 하다가 형사의 안내를 받아 종로서로 갔다. 악명높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고문과 취조가 시작됐다. 경찰은 김한성이 숨은 곳으로 대라고 강요했다.

두산은 종로서에서 서대문서로 옮겨져 11개월 가까이 지냈다. 1941년 10월엔 일본의 도조 히데키 내각이 들어섰다. 1941년 12월 8일 마침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두산의 은사 가와아이 교수는 재판을 받았고 최고재판소에서 벌금형을 확정 받았다. 로야마 교수와 히라노 교수는 변절해 정부를 위해 일했다.

1942년 7월 어느 날 두산은 종로서로 다시 옮겨졌다. 여기서 10일쯤 아주 심한 고문을 당했다. 열을 뒤 두산과 관련자들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형무소 의사가 두산을 본감 병사 중환자실로 옮겨줬다. 두산은 완전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보름만인 1942년 12월 26일 가석방 명령이 내렸다. 의사의 노력이 컸다. 두산은 1943년 1월 6일 살아서 형무소를 나왔다.

5절 일제의 종말을 바라보며 여운형의 해방준비를 보좌하다

1945년 봄 두산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두산은 곧바로 은밀히 ‘몽양집단’과 연락을 취했다. 몽양은 향리에 은거한 채 앞날에 대비하기 위한 본격 활동을 전개했다.

두산은 건국동맹에서 적극 확약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몽양은 두산이 출옥한지 오래지 않고 또 계속 감시를 받아 지하조직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1945년 7월 초 두산은 몽양을 방문했다. 두산은 사흘 뒤 <현하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란 제목으로 2백자 원고지 70매의 초고를 작성해 몽양에게 전했다. 두산은 2차 대전 뒤 세계사의 전개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두산은 미구고가 소련의 관계가 대결보다는 협력의 방향으로 나갈 것임을 낙관했다. 두산은 일제패망 뒤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될 것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두산 스스로도 “당시 우리들은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내지 스탈린의 정책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고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성격변화 내지 민주화 문제에 너무도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고 시인했다.

1945년 8월 12일 두산은 코수술을 핑계로 경성여자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조용히 숨어서 정세전환을 기다려보자는 생각이었었다.

4장 해방으로부터 6.25전쟁까지 남과 북에서 활동

1절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 결성에 참여하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은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한다고 결정했다. 건준은 기대와 달리 좌우 협력의 형태로 발전하지 못했다.

두산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꾸며낸 일종의 정치극이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공화국’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이것을 정통의 정권기관으로 발전시킬 것으로 생각한 건 ‘일종이 과대망상 내지 자기도취’에 지나지 않았다.

2절 북행과 <민주노선> 주필 취임

두산은 남동생인 이동서를 데리고 평양에 도착했다. 당분간 평양에 머물면서 일했다.

소련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14일 마침내 김일성을 등장시키는 대회를 열었다. 두산은 편집국장인 한재덕, 논설위원인 김광순, 총무국장인 주호석 등과 함께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평양의 공성운동장에 나타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두산은 우선 “김일성은 거대한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연설을 계속했다. 대회장에 운집했던 군중의 대다수가 김일성을 용감한 항일투사, 빛나는 ‘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평양 시민들이 김일성은 가짜라고 웅성댔다는 건 두산이 보기에 사실이 아니었다.

두산 같은 공산주의 이론가조차 잠시 희망적인 기대를 걸었다. 두산은 뒷날 김일성의 연설이 “민중적 인기를 겨냥한 일시방편적 발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몽양은 ‘인공’이 미군정에 의해 거부되자 ‘인공’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조선인민당을 만들어 중간 좌파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승만세력과 김구세력은 모두 그를 경원했다.

3절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 3개국 외상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을 발표했다. 요지는 미소공위가 남북한의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조선임시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되 5년 이내의 기간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국민당 정부) 등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하며, 이 기간에 이들 4개국은 조선의 민주적 발전을 도와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성장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모스크바 결정을 놓고 한민족은 찬반으로 나뉘었다. 북한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기독교 및 우파 민족주의세력은 반탁이었다. 두산은 이때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했다. 두산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찬동지지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평양민보>에 게재함으로써 이 결정에 적극적 찬의를 나타내기도 했다. 두산은 자신의 입장이 옳았다는 신념을 그 뒤에도 일관되게 유지했다.
두산은 “만일 반탁이 없이 모스크바 결정이 제대로 실시되었더라면 나라는 통일됐을 것이고 김일성 독재정권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높은 견식과 명석한 판단력을 지닌 고하 송진우와 설산 장덕수는 이것을 내다보았기에 모두 탁치를 찬성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송진우와 장덕수는 모스크바 결정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비쳐졌고, 이것이 무조건적 반탁을 부르짖는 세력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불행히도 그들에 의해 암살됐다.
두산을 비롯한 모스크바 결정지지자들의 입장도 상당한 논리적 타당성을 지녔다. 문제의 신탁통지도 1차 대전 직후 국제연맹이 실시한 위임통치와 많은 차이를 보였고 문제의 탁치기간도 5년이 아니라 5년 이내로 한정됐다.
두산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미소협력의 지속성에 대한 그의 낙관이었다. 두산은 토지개혁에 대해선 찬성했고 <평양민보>를 통해 그 뜻을 명백히 밝혔다. <평양민보>는 북조선임시인민위의 공식기관지로 결정되고 1946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민주조선>으로 개명될 때도 그대로 주필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두 달 뒤 두산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1946년 10월 두산은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이 한직마저도 1947년 2월 해임됐다. 두산은 1946년 10월부터 강사로 출강했던 김일성대학에서도 강의를 접었다.
두산은 북한의 공산체제에 환멸을 깊이 느꼈다. 학문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 같은 건 점점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두산은 김일성을 가까이에서 꼭 두 차례 만났는데 그 눈이 잔인하고 포악한 기울을 지녔음에 놀랐다.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 된 뒤엔 더 오만불손해지고 사람들을 험하게 다루었다. 두산은 1950년 5월 유일한 사회적 활동이던 김일성대학 출강도 그만 두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4절 북한의 6.25남침을 보고 대한민국을 선택하다

두산은 한국전쟁 때 국군의 평양진격을 틈타 백선엽 장군 형제의 알선으로 박용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1950년 10월 말에 서울로 왔다. 가족은 그대로 남겨놓은 채였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두산은 그때 대한민국정부의 공보처장이던 김활란 박사를 찾아갔다. 백선엽 백인엽 형제는 두산에게 육군본부 정보국 제5과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두산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1951년 1월 4일부터 14개월 정도 일하고 1952년 3월 군문을 나왔다.

5절 두산의 북한공산체제 비판

두산은 “이 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두산과 같은 지성인이 북한체제 아래서 다섯 해 동안 숨 막히는 생활을 통해 마침내 북한을 버리기로 결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산이 살던 당시의 북한은 소련이라는 ‘큰 조국’의 철저한 노예였다.

5장 미소 평화공존론의 옹호로 말미암은 2차 투옥

1절 경북대 교수로 래스키와 켈젠을 강의하다

두산은 1952년 만 45살에 경북대 법정대 정치학과 주임교수로 초빙 받았다. 두산은 경북대 강의에서 영국 노동당의 정치이론가였고 런던정경대 교수였던 해롤드 래스키의 이론을 꽤 많이 소개했다.

2차 대전의 기간에 영국에서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을 총리로 하고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를 부총리로 하는 거국내각이 성립됐을 때 래스키는 애틀리의 정치고문으로 활동했다. 래스키의 민주사회주의는 두산이 지향하는 이념이었다. 1945~1955년 한국의 거의 모든 정치학자들은 래스키의 정치학에 몰입했다.

두산은 1953년 한스 켈젠 교수의 명저 한 권을 골라 번역해 언론인 조풍연이 운영하던 출판사 진문사를 통해 <볼셰위즘 정치이론의 비판>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두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상백과 오영진 등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평양에서 함께 월남했던 박용재와 더불어 한국내외문제연구소를 열고 그 소장에 취임했다. 부산에 있는 미국공보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2절 성균관대 교수로 뒤베르제를 강의하다

두산은 이듬해 봄에 환도의 대열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강사로만 나가던 성대 법정대 정치학과에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이즈음 두산의 주요 활동은 <사상계> 1955년 4월호에 발표한 <볼셰비즘 비판>이란 글이다. 볼셰비즘은 왜 폭력, 독재로 변했는가. 그 해답은 제정러시아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폭력적이고 절대적인 짜리즘을 타도하려는 혁명가들의 의지는 자연히 폭력주의 혁명주의 급진사회사상에 대한 맹신적 경향과 강렬한 실천적 정열로 흘렀다.

1955년 5월 두산은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전면 취급한 시론을 발표했다. 2백자 원고지로 90매 정도의 분량이다. 이 글에서 두산은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등장한 소련공산당의 새 지도자들이 미국과 소련 사이의 평화공존을 제의하는 사실에 주목했다.

3절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의 평화공존론 강연이 문제가 돼 구속되다

두산은 1955년 5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의 자치기구인 정치학과회가 주최한 정치문제강연회에 연사로 초청 받았다. 강연내용이 문제가 돼 두산은 곧 동대문서에 연행됐다. 서울지검은 두산을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수사과정에서 두산은 다시 혹독한 고문을 겪었다. 서울지법은 1955년 7월 30일 두산을 선고유예했다. 두산은 풀려났지만 심리적 충격은 컸다. 두산은 공안당국의 폭거에 위축됐다.

4절 흐루시초프의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 연설을 분석하다

흐루시초프는 곧바로 몰로토프를 비롯한 스탈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이후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 모스크바에서 20차 당대회를 열고 유명한 ‘비밀연설’을 했다.

흐루시초프의 연설을 접하고 두산은 1956년과 57년 각각 논문을 발표했다. 1956년 5월 두산은 논문에서 흐루시초프 연설의 진실성에 회의를 표했다. 두산은 1957년 논문에선 생각을 바꿔 흐루시초프가 훨씬 더 큰 자신감을 갖고 볼셰비즘의 자기수정을 추구한다고 단언했다.

5절 볼셰비즘에 비판활동을 계속하면서 민주사회주의론을 반복 제시하다

두산은 <고시계> 1957년 6월호에 <러셀 경의 볼셰비즘 비판>을 기고했다.

6장 조봉암 서상일과 만남, 그리고 제1공화정 시대에 전개된 혁신운동 참여

1절 혁신운동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국내정치적 상황

2절 조봉암과 서상일이 걸어온 길


조봉암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일시 종전평화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남로당출신의 민간인으로 동족상잔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월북해 북한의 몇몇 남로당계 요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박진목 등이 요청한 면담에 응해 6.25전쟁의 조기 종전을 시도하는 데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동조했다. 조봉암은 부산정치파동 때 이 대통령을 면담하고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발췌개헌안의 통과에 동조했다. 당시 전쟁 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서상일은 1886년 대구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1905년 보성전문 법과에 입학해 1908년 졸업했다. 서상일은 1923년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을 맡아 1940년 강제폐간까지 동아일보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서상일은 한민당 창당에 참여해 총무위원으로 취임했고 미군정청 경제고문으로 취임했다. 조봉암이 섬의 빈농출신이었음에 비해 서상일은 도시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상일은 조봉암에 비해 13살 위였다.

서상일은 제헌국회 안에서 자신이 주도해 마련한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이 곧 대통령으로 당선될 이승만에 의해 거부되고 대통령제로 수정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반대노선을 걸었다.

3절 조봉암과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진보당 창당운동

사사오입개헌을 계기로 발족된 호헌동지회는 1955년 초부터 신당조직촉진위를 구성하고 신당창당에 들어갔다.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 사이 갈등이 일었다. 자유민주파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등 민국당계 보수주의자들은 ‘좌익전향자나 독재행위 부패행위 가담자’를 신당에서 배제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준연 역시 일제 때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의 책임비서를 하다가 잡혀 공개전향한 ‘좌익전향자’였다.

서상일 신도성 장택상 등 민주대동파는 여당에 반대로 정권교체에 찬성하는 사람은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봉암은 1955년 2월 23일 성명을 내고 신당 가입을 천명했다. 신당참여를 권유받던 장면 전 국무총리는 조봉암의 신당참여에 반대했다. 자유민주파는 조봉암을 배제한 채 1955년 7월 신당발기준비위를 발족시켰다. 준비위내 원내자유당 탈당인사들은 일제 때 군수 판사 검사나 총독부 관리, 은행 등에서 일한 사람이 많았다. 민국당 인사들은 민주당에서 이른 구파를 형성하고 흥사단 인사들 및 원내자유당 탈당인사들이 이른바 신파를 형성했다.

민주대동파는 둘러 나뉘었다. 이범석과 장택상 배은희 등은 1955년 12월 공화당 창당을 발기했다. 이 공화당의 대변인이 김대중이었다.

민주대동파의 다른 한 파는 혁신을 부르짖는 조봉암과 서상일 중심의 진보세력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공간엔 주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4절 진보당 창당준비위가 발족하다

1955년 12월 서울서 진보당 추진위가 발족했다. 조봉암과 서상일, 박기출 신숙 김성숙 이동화 등 12명이 참가했다. 두산은 경북대 교수시절 대구서 가까워진 대구의 원로 서상일의 초청을 받았다. 진보당은 총무대표위원과 선전대표위원에 각각 최익환과 윤길중을 뽑았다.

진보당 창당은 순조롭지 못했다. 집권 자유당은 물론이거니와 제1야당인 민주당도 진보당에 차가웠다. 이들은 진보당을 용공으로 의심했다.

진보당은 1956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에 들어가면서 조봉암과 서상일의 갈등이 드러났다. 진보당은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외과의사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뽑았다. 진보당 총무부엔 최익환, 조직부엔 김기철과 김두한이 있었다. 김두한은 해방공간에서 우익청년단체를 이끌었고 서울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자유당에 입당했으나 3선개헌에 반대해 제명되자 탈당하고 이범석의 공화당에 참여했다가 이마저 탈당하고, 진보당에 들어왔다가 다시 탈당해 노농당으로 옮긴다.

5절 진보당 강령을 기초하다

두산은 주저하지 않고 강령을 초안해주었다. 여기서 두산은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제점들도 지적했다. 대신 서유럽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두산은 <자본주의의 수정과 변혁>을 논했다. 여기서 언급한 사회적 민주주의 국가란 북유럽의 나라들을 뜻한다.

1956년 5월 5일 대선 유세 도중 신익희는 전북 이리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죽었다. 진보당은 재빨리 박기출 부통령 후보를 사퇴시키고 민주당의 장면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대신 민주당이 조봉암을 밀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연합은 실현되지 않았다. 민주당이 조봉암과 진보당에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가운데, 민주당 안에서 김준연 등 반공주의 지도자들은 이승만 지지를 공언했다.

7장 진보당 이탈과 민주혁신당 참여, 그리고 제3차 투옥

1절 진보당의 창당 및 민주혁신당의 창당

조봉암과 그의 지지자들은 1956년 10월 2일 진보당 창당으로 방향을 바꿨다. 여기에 반발해 10월 8일 서상일은 진보당 창당추진위를 떠났다. 이때 노령의 최익환과 조선일보 논설위원 고정훈(36살), 두산 이동화도 떠났다.

서상일은 진보당 창당준비위를 떠난 뒤 두산 등 이탈파를 묶고 장건상 계열을 끌어들여 새로운 혁신정당 민주혁신당은 만들려 했다.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은 강령이 사실상 동일하다. 강령은 같으면서도 당이 둘로 나뉘었다. 어렵게 출발한 민주혁신당도 서상일과 장건상 사이에 이념논쟁이 일어났다. 서상일은 단독으로 1957년 10월 창당대회를 마쳤다. 두산은 그 당의 정치위원과 정책심의회 위원장이 됐다.

2절 진보당 사건의 발생과 제3차 투옥

1958년 5월로 예정된 4대 민의원 총선이 가까워졌다. 1957년 11월 서울시경은 ‘근로인민당재건사건’을 발표했다. 장건상 김성숙 등이 체포돼 뒷날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검찰이 선거를 앞두고 혁신계를 위축시키려고 조작했다.

한 달 뒤 1957년 12월 서울시경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을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그 역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58년 1월 부장검사 조인구는 남파간첩 박정호가 ‘북괴’의 평화통일론을 남한에 전파하기 위해 암약했다고 말하면서 평화통일론은 ‘북괴’가 대한민국을 적화하기 위해 내놓은 기만적 통일론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북괴’의 평화통일론에 동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안당국이 진보당 수사에 착수했음을 의미했다.
서울지검 정보부는 조봉암이 북괴의 남파간첩 박정호와 접선했음을 강조했다. 체포된 9명의 피의자 가운데 당원이 아닌 사람은 두산이 유일했다. 두산은 체포돼 남일사로 끌려가자마자 고문을 당했다.

두산은 1989년 5월 부인 유순덕 여사의 별세 때 안암동 자기 집에서 “자유당정권 때 공안사건을 다루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고 회고했다. 두산을 포함한 진보당 간부들은 조봉암을 제외하고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석방됐다.

4절 진보당사건 직후의 대학복귀와 회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동국대 총장 백성욱 박사는 두산을 동국대 도서관장으로 초빙했다. 백성욱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때 대한민국 공안기관들의 실질적 최고책임자로 위세를 떨치던 오제도 대검검사가 공공연히 ‘간첩’으로 단정한 두산을 초빙할 수 있었을까. 총장 백성욱은 3.1운동과 임정에 참여한 뒤 독일에 유학해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던 승려였다.

1959년 10월 31일 두산은 만 52살에 결혼했다. 두산의 인품에 감화된 <사상계> 기자 유순덕이 신부였다. 유순덕은 당시 만 29살이었다. 결혼식 주례는 백성욱 총장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1961년 7월 23일 아들 인국이, 1965년 8월엔 딸 정심이 태어났다. 이인국은 군을 마치고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나와 출판사 등에서 일하다 현재 서울서 건축사업을 하고 있다. 이정심은 동국대 사회개발학과를 나와 결혼해 딸과 아들을 둔 채 학습지 사업을 하고 있다.

두산은 조봉암 30주기 이전까지 진보당 사건에 체계적 증언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때 잡혀 고생한 경북대 교수시절의 정치학과 1학년생 이상두에겐 미안하다고 했다. 두산은 죽산의 30주기 때 꽤 긴 회고를 출판했는데 죽산의 간첩혐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것 외엔 특별한 건 없었다. 두산은 조봉암이 해방 이후엔 공산주의와 담을 쌓았다고 확언했다.

5절 조봉암 처형 이후 진보당 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 조봉암의 신원

조봉암 처형에 가장 의혹을 제기한 선봉은 <한국일보>다. 한국일보는 1959년 3월 6, 7일 연속사설로 대법 판결에 용기 있게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서울법대 출신의 청년 사회부기자 임홍빈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홍빈은 그 뒤에도 주심 대법관이던 김갑수와 논쟁을 벌이며, 조봉암이 사실상 집권세력에 결탁한 사법부에 의해 부당하게 처형됐다는 취지로 그를 옹호했다.

대법원은 조봉암 사건을 재심해 2011년 1월 무죄를 선고했다.

8장 과도정부와 제2공화정 시대에 전개된 혁신운동에서 주도적 역할 수행

3절 혁신세력의 재등장과 평화통일론의 재대두

사회대중당이 60년 5월 2공의 혼란된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창당에 성공했다. 두산은 사대당에 적극 참여했다. 사대당엔 이동화(정책위원장) 박기출 김달호 송남헌 윤길중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혁신세력은 파벌과 분열이 계속됐다. 전진한은 한국사회당을 발기해 김성숙 이강훈 김철(노동운동가) 등이 참가했다. 한사당은 사대당에 비해 온건했다. 혁신동지총연맹은 장건상 김창숙 유림 등이 참가했다. 고정훈은 사회혁신당을 발기했다.

60년 총선에서 두산은 사대당으로 대구 무구에서 민의원에 입후보했다. 대구 갑구엔 언론인 최석채, 대구 을구엔 서상일, 병구엔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변인 김수한, 정구엔 대구대 정치학 교수로 사상계 편집위원 양호민, 기구엔 농림부 국장을 한 이영옥이 나섰다. 그 선거에서 ‘혁신 붐’은 부산, 대구 등 영남이 주력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혁신정당에 냉담했다.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표를 몰아주었고 혁신계는 겨우 5명만 당선됐다. 사대당은 서상일 윤길중 박환생 박권희 4명이 당선됐다. 두산은 차점으로 낙선했다.

4절 통일사회당 참여와 주도적 역할

60년 7.29 총선에서 참패한 혁신계는 새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세포분열만 거듭했다. 비진보당계 대부분이 60년 9월 15일 사대당을 이탈했다. 기획위원장이던 두산도 그들과 함께 이탈했다.

사대당 이탈자들은 61년 1월 통일사회당을 준비했다. 서상일 박기출 윤길중 김성숙 이훈구 정상구 이동화 등이 참여했다. 이 당 당수엔 두산이 정치위원장으로 나섰다. 고정훈 김철도 이 당에 참가했다. 그러나 군사정변으로 창당은 못했다.

7.29 총선 이후 혁신계는 모두 4갈래로 나뉘었다. 가장 좌쪽은 사회당 준비위, 그 다음엔 사대당과 혁신당, 온건파는 통사당이었다.

사대당과 사회당은 통일을 위해 북한과 무조건 협력과 외군철수 아래 한반도영세중립화를 제의했다. 반면 통사당은 한반도 중립화에 찬성하면서도 전제로 남한체제의 공고화와 민주적 절차에 의한 남북총선거를 제시했다. 두산이 위원장을 맡았던 통사당은 민통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를 반대했다. 즉 두산의 통사당은 반공을 전제로 한 민주사회주의론을 전개했다.

5절 제2공화정 기간에 민주사회주의 이론을 전파하다

두산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곧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난 공산주의로 변할 걸 기대했다. 그 기대는 매우 약한 논거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 두산은 “김일성 일파가 쫓겨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말했지만 당시 김일성의 독재권력 장악은 완벽에 가까웠다.

두산의 생각이 가장 잘 선명하게 나타난 글은 그가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적 사회주의의 길 : 험난한 과거를 더듬고 미래를 전망한다>이다. 공안검사 오제도는 두산을 간첩으로 매도했지만 이 글에서 두산은 건전한 민주주의사상을 지녔고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대체로 옳게 파악했다. 이 글은 사상계 1960년 11월호와 1961년 1월호에 실려 있다.

9장 5.16군사혁명과 4차 투옥, 석방 이후 혁신계 원로로 민주사회주의 운동 지도

1절 혁신계 지도자들, 소급법으로 처벌되다


두산은 물론 혁신운동의 지도자들은 군부의 무력개입을 전혀 내다보지 못했다. 두산이나 박정희나 모두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를 높이 평가했다. 두산은 군사정변 때 거족적으로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자고 했다. 두산이 이처럼 군사혁명에 호감 했지만 군사정부는 두산을 구속시켰다.

두산은 61년 5월 25일 치안국장을 찾아가 자수해 즉시 중부서에 유치됐다. 거기서 두산은 다시 물고문과 몽둥이 고문을 당했다. 두산은 7년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64년 8월 26일 두산은 형집행정지로 안양교도소를 나왔다.

65년 7월 혁신우파가 통일사회당을 준비했다. 이 당엔 김성숙과 김철이 참가했다. 서민호는 66년 2월부터 민주사회당을 준비했다. 서민호는 원래 한민당 보수파로 입신해 반이승만 투쟁으로 투옥됐다.

두산은 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투쟁에 동참했다.

통사당은 70년 다음 해의 대선과 총선을 준비하면서 두산을 당수로 뽑았지만 두산은 취임을 거부했다. 두산은 이미 윤보선의 국민당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두산은 국민당이 자기 노선과 다른 보수정당이지만 윤보선을 도와 정권교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두산은 박기출이 국민당 대선 후보가 되자 그 당을 나와 대중당에 입당한다. 73년 6월 대중당은 해산된다. 이후 두산은 4공화국 끝까지 어떤 정당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3절 민주회복운동과 민족통일운동에 참여하다

유신체제에서 정당과 손을 뗀 두산은 민주회복운동에 참여했다. 두산은 75년엔 이영근 통일일보 사장의 초청으로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4절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다

전두환은 국보위를 출범시켰다. 국보위는 모두 81명으로, 혁신계 인사 조향록 목사와 윤길중 변호사가 들어갔다. 윤길중은 이후 민정당 대표위원이 되고 국회 부의장까지 했다.

고정훈은 5공 들어 61살의 나이에 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두산은 그 당에 들어갔다.

한편 김철은 한국사회당을 준비했다. 1983년 3월 신정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이 존재했다. 신정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은 86년 통합해 새로운 사회민주당으로 창당했다. 이 시기 두산은 민주사회주의연구회를 통해서도 활동했다.

5절 민주화합추진위 활동하다

두산은 우선 노태우 정부가 대통령직선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았다’고 인정하고 대통령직선제로 정통성을 인정받은 정부가 출범한 것은 ‘모든 국민의 승리’라고 단언했다. 80살이 넘은 두산은 민주사회주의 글과 여운형 글을 힘 있게 발표했다.

그러나 두산은 1989년 82살에 완전 은퇴했다. 1990년 11월 민주사회주의적 혁신정당을 지향하는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이 민중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두산은 자신이 노령이라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두산은 1995년 1월 안산의 아들 집에서 향년 89살로 죽어 포천의 천주교 혜화동성당 묘지에 묻혔다.

맺는 생각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두산을 한국의 ‘노먼 토머스’라고 부른다. 노먼 토머스는 1884년 11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장로교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행복한 소년을 보내고 프린스턴대를 거쳐 유니온신학대를 나와 목사가 됐다. 토머스는 뉴욕시 빈민가의 복지관에서 일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토머스는 미국사회당에 입당해 뉴욕시장, 뉴욕주지사 선거에 나섰다. 1928~1948년까지 6번이나 대선후보로도 나섰다.

나는(김학준) 두산을 보면서 래스키가 떠올랐다. 래스키는 두산처럼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나와 언론계에서도 일했고 정치학 교수로 일했다. 점진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노동당의 이론가요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봉사했다.

나는(김학준)은 두산을 독일사회민주당의 칼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으로 생각해본다. 베른슈타인은 따뜻한 인간미에 넘치고 지력이 출중한 이론가여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산에겐 베른슈타인적 요소가 보인다.

두산의 생애는 정치학도가 된 1922년 이후엔 가시밭길의 기록이었다. 50살 이후 80대 노령까지 종암동 13평 서민아파트에서 정직하나 넉넉하지 않게 살았고 노구를 버스에 맡기고 시내를 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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