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의 죽음과 쌍차의 죽음

[칼럼] 노동의 죽음이 교육의 죽음을 불러왔다

시지를 비롯한 대구 지역의 학생들의 잇따른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과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세상이 이어져 있고 서로 연결될 것이라면 고딩의 죽음과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 또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고딩의 죽음과 노동자들의 죽음이 서로 연관된 것은 아닐까.

학생들이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을 알 리는 없고 교실의 왕따와 교육이 아닌 사육으로 혹독한 수능을 치러야 하는 탓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학생들의 죽음의 원인은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 탓일 수 있다. 학생들이 수능 점수를 잘 받아 스카이 대학 못 가고 지잡대에 들어가면 결국 그 학생들을 기다리는 것은, 성골/진골과 6두품으로 나누어진 이 골품제사회 혹은 카스트사회에서 9등급의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 뿐 아닌가. 그 나락이 두려워 고딩들의 죽음이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고딩들의 죽음은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과 연기緣起의 관계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난 11일 또 한 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당일 입시경쟁교육을 비판하기 위해 228공원에서 추모촛불집회가 열렸다.

그렇다면 고딩들의 죽음의 행렬을 정지시키는 방법은 한국 사회가 9등급이든 5등급이든 여하한 등급 간의 임금 격차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혹은 9등급 밑의 10등급 아니 11등급 노동자라 하더라도 노동자의 임금이 제대로 보전된다면 고딩들이 아니 고딩들의 부모가 내 자식이 8등급 수능 점수를 받든, 혹은 9등급 수능 점수를 받아 설령 노동자가 되더라도 노동자로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이 나라 꽃잎 같은 고딩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물리적인 나락에 몸을 맡길 일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최근 대학을 혁신하고 사교육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일이 대선의 신기루에 사로잡혀 또다시 시작하는 모양이다. 대학교수마다 전교조 교사마다 2012년 대선 후보들에게 고등학교는 이렇게 대학교는 이렇게 혁신시키고 바꾸어 달라며 선거공약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보적인 교수들이나 교사들에게 자본주의적인 노동 시장 구조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하거나 적어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대학교수들이 그리고 그 이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교육 문제만 나오면 자본주의적인 노동 시장 구조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진다니 참으로 이상하다.

한국 사회 교육 개혁의 미션이 고딩들의 죽음을 막는 길이라면 계급적으로 지역적으로 스카이대학을 나오든 지잡대를 나오든 동일 임금 혹은 엇비슷한 임금을 받으며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의 도래 아닌가. 그렇다면 이 나라 교육 혁명의 미션은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진보적인 교수들이나 교사들에게서 나오는 교육 개혁 안이 권역별 지역별 국립대 네크워크 같은 레알하지 못한 것이라면, 지역 간 권역 간 임금 격차는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는 그조차 실현 불가능한 것 아닌가.

교육 개혁 안에 공동 학위제를 둔다 해도 경제 꼴찌인 대구 경북의 대학생 졸업자들이 부산이나 서울로 유출되는 현상을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정신은 스카이 대학 혹은 평준화된 대학 졸업장을 받고 몸은 대구 경북이든 강원도 원주이든 나누어져 있다면 공동학위제는 그 실효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신의 스카이 대학이라는 것도 몸 자체가 대구 경북 출신이고 경상도 언어를 구사한다면 그대로 대구경북 몸의 정체가 탄로 날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그 몸이 대구경북의 몸이든 부산 광양의 몸이든 정책적으로 그 몸을 도와 정신을 스카이 대학으로 업그레이드 시킨다 해도 임금 격차 안의 노동력 이동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육 개혁 안의 핵심은 고딩들의 죽음과 쌍차 노동자들의 연결 끈 혹은 연기의 관계를 끊고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 방식은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 행렬이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나락,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나라가 구축된다면 고딩들은 더이상 스카이로 비상해야 할 이유가 없고 스카이에 닿지 못해 아파트 밑 맨바닥에 몸을 던져야 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학생들의 부모가 보기에 스카이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노동자가 되어도 살아갈 수 있는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딩들이 최저임금을 거부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도대체 그 돈을 받고는 살 수 없다는 통찰 탓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고딩의 죽음을 사육의 수능으로 우회해 풀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인 노동 시장 구조의 혁파로 나아가며 죽음이라는 난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 아닌가.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쌍차 노동자들처럼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 임금 체불, 빈번한 구조 조정, 불안전 노동, 사람 장사에 시달리고 휘둘리는 한, 고딩들의 죽음의 행렬은, 유감이지만, 이어질 수밖에 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딩들의 죽음과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 사이를 잇는 연기의 끈은 누가 끊을 수 있는가. 문재인도 안철수도 박근혜도 그 정답은 아니다. 세 사람 모두 교육 문제를 사교육 잡기 같은 엉뚱한 곳에서 풀려고 하기 때문이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을 만나고 쌍차 유가족들을 만나 눈시울 적실 일이 아니다. 노동의 죽음이 교육의 죽음을 불러오고 있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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