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문이 열렸다

[명숙의 무비,무브](6) <옥탑방 열기>와 에이즈감염인 인권

뜻하지 않은 만남, 예기치 않은 인연. 이것들이 삶의 행운처럼 다가올 때도 있고, 저주처럼 삶을 온통 헝클어뜨릴 때도 있다. 이러한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만남을 삶의 영역에서 쫓아낼 수는 없다. 사람의 삶에 만남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많은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적 존재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인천인권영화제에서 본 <옥탑방 열기>의 만남과 관계, 사랑과 이별로 가슴이 아렸다. 다큐멘터리이지만 너무나 극적이고 생생한 인물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사랑... 아리다

영화 <옥탑방 열기>에는 에이즈감염인 인권운동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가브리엘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또 한 명의 주인공 두열이 나온다. 가브리엘의 삶과 운동은 활동이나 책 등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에이즈치료제인 푸제온을 한국에 공급하지 않았던 초국적 제약회사 로슈에 맞서 함께 활동해 본적도 있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삶이 어찌 활동만 있을 수 있으랴. 특히 그의 사랑 얘기를,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영화 속에 드러난 사람과 삶이 싫지 않은 것은 우리가 관음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 모습을 비춰보기 때문이 아닐까. 옥탑방 문을 연 카메라를 따라 우리는 그이들의 삶과 사랑을 만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에이즈감염인 인권운동을 하는 가브리엘은 쉼터에서 만난 다른 감염인인 두열을 사랑한다. 10년 만에 찾아온 사랑, “나 애인 생겼다”라고 문자를 보낼 정도로 그는 정말 설렜다. HIV/AIDS감염 이후 처음 만난 사랑이자, 가브리엘의 게이 인생 최초의 열렬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두열은 가브리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태도로 오락가락이다. 그만큼 두열은 가브리엘과 한 살림을 꾸린 옥탑방에서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두열은 자신은 일반(이성애자)이지만, 가브리엘을 만났을 때 전부라고 생각할 만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며, 일반과 이반(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뚜렷하게 분리한다. 두열의 성적지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가브리엘은 그를 사랑하고 그래서 그는 비참할 만큼 괴롭다. 언제나 그렇듯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게 사랑인가보다. 자기 마음이지만 자기도 어쩌지 못할 때가 있듯이 두열은 자기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지 독립하겠다고 옥탑방을 나가서도 가브리엘에게 종일 전화를 한다. 사랑일까? 외로움일까? 의존일까? 사랑을 어찌 날카롭고 단순하게 하나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리다. 나의 사랑도 떠올리기도 하고, 내주변의 사랑도 떠올려 봐도 그렇다. 명약관화(明若觀火)라는 단어는 사랑과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게 사실이잖은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본 <마리아리치 마링고>도, 장국영이 주연한 <해피투게더>도 생각났다.

전태일이 생각났다

영화를 보며 나는 두열에게 많이 감정이입됐다. 아마도 그의 변화가 영화에 잘 드러났기 때문이리라. 둘은 참 다르지만, 두열이 가브리엘을 만남으로써 두열의 삶이 바뀌었다. 만남이 주는 변화가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걸 나는 좋아한다. 두열이 가브리엘을 만나기 전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 그는 삶을 포기했었다. 약도 끊고 인연도 끊고.

둘은 참 많이 다르다. 가브리엘은 젊었을 때부터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고,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를 안아주며 따뜻한 위로를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두열은 감염사실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고, 삶의 저주로 여기며 빨리 삶이 소멸하기를 바라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두열이 “조금 더 일찍 나를 안아주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일어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라며 울 때,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고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다행히 그는 가브리엘을 만났다. 삶을 포기한 끝에서 가브리엘이 열어준 삶의 문에서 두열이 다시 삶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가브리엘은 아프겠지만 말이다.

내면화된 낙인과 차별

두열이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낙인을 자기에게도 찍으며 삶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에서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만남’ 때문이다. 가브리엘을 통해 처음 접한 감염인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 관계들, 세상들. 두열이 에이즈 감염인의 낙인으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하다. 감염 사실을 알고 나서 다른 사람과 손도 잡을 수 없었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던 그였다. 감염인이지만 감염인인 자신이 싫어 “차별과 혐오로 자신을 포기”했었다. 그래서 노동자대회 때 두열이 노동자들에게 “나 같은 사람 만들기 싫다”며, “에이즈 감염인을 차별하지 말아주세요”라며 목청 키우며 선전물을 나눠줄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난 이반이 아니니까 반감이 생겨”라고 가브리엘에게 말할 만큼, 여전히 동성애자에 대한 반감을 거둘 수가 없다. 그도 말했듯이 감염인을 반기고 안아주는 것은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소수자들뿐이지만 말이다. 두열은 스물한 살 때 종로에서 만난 에이즈감염이 여전히 저주스럽기 때문에 <종로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가브리엘이 “공사장에서 일하다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라고 조언해도, 두열은 12년 전의 사건에 벗어나지 못하고 털어버려지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그의 삶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에이즈를 확산시킨다며, 동성애와 에이즈혐오 광고를 일간지에 버젓이 낼 수 있는 땅이 한국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 있는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집안, 학교, 직장,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니 두열 자신에게 내면화된 차별을 탓할 수 없다. 그건 아직 그의 몫이다.

침묵하지 말 것

그렇다면 우리의 몫은 무엇일까. 두열이 삶을 포기해 12년 동안 약조차 끊어 눈도 나빠지고 체력이 나빠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우리 사회가 지금과 달랐다면 두열은 좀 더 일찍 하늘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보지 못했던 시절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게다. 병이 악화돼 시력을 잃어 위를 올려 봐도 뿌옇고 흐린 하늘만 보는 일이 그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열이 약을 먹고 점차 시력이 나아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흘러가는 구름과 푸른 하늘을 이제 그가 볼 수 있다.

12월 1일은 세계에이즈의 날,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이다. 이제 에이즈감염인은 약만 제대로 먹으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야말로 만성질환과 같은 것이 되었지만 아직도 에이즈에 걸리면 모든 삶이 끝나는 양 여길 수밖에 없는 건 우리안의 편견 때문이다. 감염인과 함께 밥을 먹거나 신체적 접촉만 해도 에이즈에 감염된다거나 타락한 생활과 동성애로 에이즈에 걸렸다는 편견 말이다. 그러다보니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친구들과 만날 수도 없고 가족들에게 말하기도 어렵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해고당하기 전에 관둬야 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HIV/AIDS 감염은 곧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편견에 대해 우리는 침묵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닐까.

흔들리고 변하는 것이 삶

이 영화의 매력은 삶의 드라마틱한 요소를 인물들이 잘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브리엘과 두열의 엎치락뒤치락 관계도 그렇고, 에이즈감염에 대한 두열과 가브리엘의 커다란 시각 차이도 마치 각본을 짜놓은 듯하다. 게다가 장면이나 대사도 어느 극영화 못지않다.

“빠져나가고 싶은가 봐. 좀 더 올라가.”

창문을 나가려는 나방을 보며 하늘로 날아가라고 손짓하는 두열의 모습에서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 하늘을 날고 싶은 그가 비친다.

가수 한영애를 좋아하는 가브리엘이 공연장 뒤에서 한영애의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서, 노래를 사랑하고 삶에 대한 치열한 애정만큼 홀로 음악과 마주하고 있을 그가 보인다. “침묵은 죽음이다”라고 생각하며 HIV/AIDS 감염인 인권운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그이지만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침묵과 진공의 시간이 보인다. 그 외에도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열린 에이즈감염인 워크숍에서 두열의 오열하는 모습, 마지막 바닷가에서 파도를 마주하는 모습 등 말이다. 이것은 뛰어난 편집 실력에서도 나오는 것이겠지만 2년간 성실하게 두 사람 곁을 함께한 고유정, 노은지 두 감독의 성실함과 애정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영화에서 보여준 둘의 흔들리고 변하는 삶은 둘만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공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열이 흔들리듯, 나도 흔들렸었고, 가브리엘이 사랑에 아파하듯 나도 아팠던 적이 있다. 그래서 둘의 삶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했던 흔적이 각자에게 삶의 불씨로 남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람 얼굴에는 살아온 흔적이 다 남기 마련이니까.” 밀려오는 차가운 파도 앞에 선 가브리엘과 두열,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열기가 지속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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