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명숙의 무비, 무브](7) <남영동 1985>와 고문

영화를 보면서도 이 영화를 본 것을 후회했다. 영화적 완성도가 낮아서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내 마음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직시할 수 있는 고통만을 직시한다고 했던가? 그 크기가 너무 클 때는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하게 된다고 한다. 고문이라는, 독재시대 신체만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었던 잔혹한 고문을 나는 직시하기 힘들었나 보다. 사실 나는 <남영동 1985>가 고(故) 김근태 씨의 삶을 다룬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독재에 저항했던 삶을 다룬거려니 했었다. 아니었다.

내가 김근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때였다. 교생실습을 나온 국사 선생님이 아주 은밀하게 수업시간에 우리에게 말해준 이름이었다. “김근태라는 사람이 있는데 민주화 운동을 하다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았단다.” 나는 공책에 ‘김근태’라고 적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 듣는 이름을 적고 기억은 했지만, 특별히 더 알려거나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기억했다. 그리고 그 은밀한 분위기는 내가 어디서 크게 떠들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의 중요한 비밀과 진실을 담고 있음을 어린 나는 막연하게 느꼈다. 그 시절의 김근태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나이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김근태를 알고 싶어서 그 영화를 택했다. 하지만, 아뿔싸! 그것은 그가 1985년에 남영동 공안분실에서 겪었던 고문을 다룬 영화였다.


함께 고문을 겪듯 만든 의도적 구성이 몰입도를 높여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영화의 90%가 고문 장면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선동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큐도 아닌데 왜 그리 고문장면을 많이 넣었냐며 스토리가 약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잔혹한 장면을 그리 많이 넣었냐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고문’이기에 스토리텔링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내내 고문이 어떻게 고문 받는 사람의 마음을 이리저리 오가게 만들고, 육체를 망가뜨리는지를, 고문을 하는 사람들은 각자 어떤 위치에서 어떤 마음으로 고문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았던 독재시기 잔인한 고문을 직접 경험하듯, 고문의 파고와 파장을 시간의 흐름으로 구성했다. 김근태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1985년 9월 4일부터 25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받은 고문을 1일 차부터 차근차근 재현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일 차의 당당함이 고문을 받으면서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무엇이 가장 간절해지는지를 보여준다.

고문 초기 주인공 김종태는 자신을 조작 간첩사건의 관련자로 지목한 후배 임종식을 탓했지만,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이어지면서 그도 조작사건에 필요한 이름과 배후를 만드는 거짓자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로하듯, 그의 아내가 꿈에 나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발버둥치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답을 말하라고 한다. 거의 두 시간을 관객들은 김종태가 되어 끔찍한 고문을 받거나, 고문의 목격자가 된다. 고문이 심해질수록, 관객들은 ‘이제 그만’ 하는 소리를 저도 모르게 지르거나, ‘고문에서 벗어나는 장면’이 나오기를 그가 승리하는 장면이 어서 나오기를 숨죽이며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처럼 그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꺾이고 고문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유로 계속된다.

이러한 구성은 반복과 변주의 플롯인 영화 <메멘토>를 닮았다. 반복되는 고문,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변화, 그리고 수사관들의 개인사로 고문은 조금씩 변화되고 강도는 심해진다. 강도가 심해질수록 영화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다가간다. 그래서인지 시사회에서 정지영 감독은 “두 시간 동안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우리 스텝들은 두 달 동안 아팠고, 엔딩 크레딧에 등장한 분들은 평생을 아프다 돌아가셨거나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두 시간 동안 같이 아픔을 느껴서 그분들 마음에 위로가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했단다.

술을 부르는 영화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은 아무도 쉽게 일어서지 않을뿐더러 모두를 감도는 무거운 침묵을 함께 느꼈다. 아픔의 역사가, 개인의 고통이 모두의 어깨를 짓눌러 일어설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술을 마시게 만든다. 나도 그랬고,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은 다 그랬다고 한다. 얼마 전 영화를 본 문정현 신부는 <남영동 1985>와 <26년>을 한날 보고 혼자서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 영화가 어땠냐고 신부님께 물으니 “김근태에게 미안했어. 나도 군사독재시절 감옥에 가고 고생했지만 신부라서 그런지 고문은 받지 않았거든.” 부채감으로, 잔혹함에 몸서리쳐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 이 영화는 혼자 봐서는 안 된다. 술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나가기는 어려운 영화이기는 하지만 혼자 술을 마시지 않으려면 누구라도 함께 봐야 할 영화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부채감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잔혹함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 슬픈 것은 영화에 나왔던 그 고문들이 영화적 재미를 높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고문이라는 점이다. 고문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역사에 아프게 새겨있는 사실이다. 엔딩 크레딧에 오르는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은 고문이 그들의 삶을,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직도 두려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고문피해자의 증언은, 영화의 말미에 용서를 구하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 김종태가 환청처럼 들었던 휘파람 소리는, 김종태를 다시 흔들어 놓았던 장면과 일치한다. 지워버렸다고 생각해도 쉽게 되살아나는 고통의 기억은 몸과 마음을 다시 1985년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만큼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 고문이다.

그래서 국제인권사회에서 고문을 추방하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은 국제감시단의 구금시설 방문 허용을 포함하는 ‘국제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다. 남영동은 사라졌지만 대공분실은 홍제동을 비롯해 여전히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산하에 홍제동을 제외하고 총 4곳의 분실이 ‘대공분실’에서 ‘보안분실’로 이름만 바꾼 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백재현 민주당 국회의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사진을 직접 찍었는데 간판도 없고 주택가에 날카로운 철사로 감겨 있는 높은 담과 철문 등으로 가려져 있었다.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악의 평범성과 잔혹함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 중 하나가 배우의 연기다. 김종태를 연기한 박원상의 연기도 뛰어났지만, 감정없는 고문기술자 이두한(당시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연기한 이경영의 연기가 나는 인상적이었다. 냉정과 이성을 겸비한 그는 매뉴얼대로 고문의 흔적이 남지 않으면서도 죽이지도 않을 만큼의 고문을 기술적으로 잘 처리해서 장의사라는 은어로 통하는 인물이다. 아, 이성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고문’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철저한 계산으로 고문은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두한을 비롯한 고문에 참여하는 수사관들의 모습이다. 고문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들은 야구중계를 듣거나 애인과 통화에 여념이 없기도 하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연애를 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소시민이다. 그저 수사관으로서 맡은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에게 고문은 그저 ‘업무’일 뿐이다. 심지어 경찰서에서 일하는 경찰들이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한다면, 공안분실에서 일하는 경찰들은 한 사건이라도 만들어서 승진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거대한 관료국가체제에서 개인의 인권침해행위는 거대한 폭력의 부품으로 보이고 존재할 뿐이어서 자신의 가해행위에 대해 자각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며 변명을 할 수 있는 기제(위계와 명령체제)도 많아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기 쉽다. 그러한 심리를 공고히 하는 것 중 하나가 그들이 고문을 대하는 태도이며, 영화에서 고문은 ‘일’이거나 ‘공사’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에서도 보인다. 스탠리 코언이 쓴 책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 쓰인 가해자 심리분석을 보면, 이러한 언어규칙은 가해 행위를 은폐할 뿐 아니라 행위자와 청중이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거나 방관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한다. 실제 나치가 유태인 학살을 할 때도 직접적으로 살인과 같은 확실한 용어 대신 ‘청소’, ‘종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폭력과 고문을 시인하기

스탠리 코언은 인권침해를 외면하는 대중의 심리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시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얼마 있으면 고문으로 돌아가신 박종철 열사의 기일이다. 그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져 민주화투쟁이 더욱 거세어졌던 역사만이 아니라 그를 고문했던 그 시대를 기억하는 일이 시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시인이야말로 그 잔혹함을 반복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후보 지지 유세에서 어느 지지자가 군사독재 유신을 찬양하는 현실을 보며, 우리는 정말 제대로 기억하고 시인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동물보다 못하게, 아니 생명 없는 돌덩이를 다루듯 고문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시절이, 인간을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철저히 파괴하는 고문이, 경제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고문과 등가 취급되는 경제성장을 우리가 정말 바라는지 말이다. 또한 국가권력기관에 의한 잔인한 고문은 사라졌지만, 컨택턱스와 같은 용역경비업체가 기업의 사주에 의해 저지르는 고문행위가 여전한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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