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통마저 막혀버린 노동자 대통령 후보

[양규헌 칼럼] 유세방식의 유구한 전통과 새로움의 경계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서구의 옛날 동화가 있다. 먹을 양식이 부족한 마을에 쥐떼가 들끓어 고생하던 마을 사람들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퇴치해 주겠다고 말하자 사나이가 내걸었던 조건을 수락하고 일을 맡긴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몰아냈던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멋지게 피리를 불면 쥐가 모여들었고 떼 지어 이동하던 쥐들은 결국 강물에 하나둘 뛰어들어 익사하고 말았다.

고작 피리를 부는 방법으로 쥐를 아주 쉽게 퇴치하는 것을 보던 마을 주민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화가 난 사나이는 그 피리를 이용해 아이들을 유인해 어딘가로 숨어서 평생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가난한 시골마을을 떠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가장 소중한 가족과의 생이별이다.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라서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야기 골격은 맞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거판에 울려 퍼지는 피리소리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는가 하면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의 작용’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선거 유세장면들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가지 모습이다. 피리가 쥐를 유인하는 모습과 피리가 아이들을 유인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한 사나이가 극단적으로 두 가지 모습을 연출하는 것으로 첫 번째 모습은 죽음으로의 유인이고 두 번째 모습은 절망과 아픔으로의 유인이다. 피리는 같은 소리를 내고 피리소리의 결과는 다른 양상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결론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다른 경향의 ‘피리 부는 사람들’의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다. 즉 사람을 많이 모으는 피리를 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우선 사람들을 쥐떼처럼 모으는 빨간 옷을 입은 공주가 있다. 이 공주가 들고 있는 피리는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나쁜 소리를 내는 마법의 피리다. 공주는 비명에 간 전제군주 아버지의 권력욕을 이어받아 그가 한 통치의 방법대로 마법의 피리를 연주하고 있다. 언론통제를 이용해 자신의 치부를 감추어온 공주는 애써 토론은 거부하고 시장에만 들락거린다.

오래전 전제군주인 아버지는 낮에는 막걸리를 마시며 농부들과 사진 찍고 밤에는 비싼 양주를 마시며 어린 처녀들과 놀아나는 방식으로 통치를 했지만 왕국은 가난에서 벗어났으므로 아버지는 왕국의 반신반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사용하던 피리를 공주가 모를 리 없었다. 공주는 열심히 피리를 불어댔다. 가장 인상적인 음색은 ‘종북, 빨갱이, 안보였지만 ‘아... 저... 그...’이런 토씨가 많이 들어간 피리소리는 음정과 가락이 잘 잡히지 않아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걸 다 알아듣는 신민들은 아직도 왕국에 많이 남아 있었다.

쥐떼를 몰아가는 피리소리와 또 다른 피리소리

단지 그것은 반공방첩의 앵글에 갇혀진 나이 드신 분들이라서 힘이 좀 빠지는 일이지만 “뭐 어때 젊은 놈들 표랑 표시 나는 것도 아닌데” 하고 현실을 인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공주는 이제 종착역에 거의 도달했다. 조금만 더 피리를 불다보면 자기에게 생길 빨간 쥐떼 왕국을 상상하며 행복한 꿈에 젖어있다. 그러나 잠시 불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강력한 마왕의 요술피리가 등장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로이 들리는 소식들에 긴장을 하게 된 것이다.

정치를 모르는 조무래기들이 별 놀이를 다 한다면서 무시하고 언론을 통제함에도 공주인 자신에게 불리한 소식들이 전해져 오니 긴장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는 자신의 피리가 약발이 다해가고 있다는 걸 무심코 깨달아도 이번만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직은 아버지를 추앙하는 신민들이 절반은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주의 권력욕에 부응해주는 신민의 신념을 곳곳에서 확인하고 있는 요즘의 공주는 자주하는 실언으로 곤욕을 치르긴 하지만 이번의 대권도전은 꼭 성공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또 다른 피리의 주인공은 독재자의 딸이 벌이는 네거티브에 능하고 오래된 방식의 옛날 유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디지털과 첨단을 향해가는 시대정신의 소유자라면서도 오래된 사람에게만 고유한 미풍양속을 좋아하는 듯하다. 모여서 잔치하는 것처럼 사는 공동체, 이런 것들 말이다. 예전에(그때는 마이크가 없었다) 만주벌판을 누비며 항일운동을 하던 시절에 독립운동가들이나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연설을 할 때 소리를 옆, 뒤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피리 부는 사나이는 얼마 못가고 야권단일화 소리에 묻혀 다른 사나이에게 피리가 넘겨졌고 그 사나이는 붉은색 공주의 피리소리 덕에 상대적 개념인 진보라는 딱지를 붙이고 두개의 피리를 동시에 불어대며 소리통의 울림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울림통에서는 정권교체와 야권단일화가 역사적 소명처럼 인식되며 모든 가치의 최고로 등장했다. 여기에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과제들은 두고 보자는 식으로 미뤄지고, 긍정적 공약들이 보이긴 하지만 근본적 처방인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나 법, 제도적 장치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소리는 울림통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기에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노동자 대통령후보가 부는 피리소리는 노동자계급에게조차 들리지 않는다.

두 개의 피리가 뽑아내는 거대한 울림통은 소외된 자들, 배제된 자들을 정치적 시혜의 대상일 뿐, 정치주체로 인식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은 피리소리를 따라 개념 없이 쫓아다니는 쥐떼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식은 노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며 한 가족이나 친척 친구지간에도 대화가 불가능해 싸움이나 고성으로 대화를 종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현상은 초지일관 보수정치가 찬양해 온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근거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광란이 참담한 현실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 결국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은 노동자계급의 혼을 앗아갔고 노동정치는 초지일관 대리되고 위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대리정치를 극복하고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천함으로서 진정한 계급정치의 노둣돌을 놓기 위하여 노동자계급의 피리소리를 자임한 김소연 후보의 경우는 소리통으로 소통할 권리마저도 용납되지 않는다. 소위 법으로 보장된 유세활동은 어떤 경우에도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유세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김소연 후보 운동원들은 열려진 선거운동 공간에서 폭행과 수모를 당했다. 어떤 동지는 입술이 터지고, 어떤 동지는 손가락이 부러져 철심을 박고, 어떤 동지는 자동차 바퀴에 깔려 목발을 집고 유세현장을 다니고 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대통령 후보 폭행은 역사적 사건이다

김소연 후보는 제주 강정과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연거푸 폭행당해 허리를 다쳤고, 안경이 부서졌으며 목을 다쳤다. 경복궁 앞에서는 경찰에게 얻어맞아 얼굴에 멍이 드는 폭행을 당함으로 유세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소연 후보 선거차량과 지지자들의 선거운동을 막기 위해 차도에 온통 경찰차로 이명박근혜 산성을 쌓는 모습은 일종의 코미디로 보이지만 그 장벽 속에 담겨진 의미는 참으로 심각하다. 고작 짧은 선거기간동안에 대통령후보가 이와 같은 수모와 폭행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는 이유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 후보가 공권력으로부터 폭행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 선관위가 있고, 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자들이 민중의 세금을 먹으며 법질서를 씨불대고 있지만 노동자대통령 후보라는 하나의 이유로 법의 보호영역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치외법권(?)을 누리는 특혜라고 할 것인가. 선거운동을 원천적으로 방해하고 폭행한 그들이 이후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관심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을 대하는 그들의 속내와 태도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나아가 투쟁하는 노동자대통령을 강조하며 칼바람이 피부를 파고드는 새벽을 가르며 투쟁현장을 질주한 이유가 무엇인지 헤아려진다.

전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없는 사안에 대해 거대언론이 침묵하는 이유가 이명박근혜 권력의 언론통제가 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언론권력 자체가 자본의 중심을 틀어쥐고 있으며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은 이윤을 배가를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땅 절대다수인 노동자가 정치의 대상화되고 노동자 후보가 폭행당하는 현실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과제인 해고, 정리해고, 비정규, 실업을 포함한 불안정노동의 문제가 정권교체로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은 허구일 뿐만 아니라 기만이다.

모든 가치와 상식이 자본의 헤게모니 하에 존재하는 이상, 노동자계급이 그 틀을 부수지 않는 이상,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피리 소리가 노동자계급의 심장을 울리지 않는 이상, 자본과 언론이 카르텔을 형성하는 우리사회는 마약을 먹은 것처럼 모순과 비합리성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 대중이 종이짱돌이라 불리는 투표를 잘하면 세상이 바뀐다고 여기저기서 쌍나발을 불어대지만 자본주의의 깊은 마약의 골짜기가 언제 메워지고 붉은 언덕이 될 수 있을지 참 암담하기만 한 참혹한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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