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의 ‘공통체’와 에너지 플로우

[새책] 우애의 미디올로지 (임태훈, 갈무리, 2012)

젊은 문학평론가인 임태훈의 <우애의 미디올로지>를 읽게 된 것은 갈무리 출판사의 요청으로 이 책의 ‘프리뷰’를 하게 되어서였다. ‘임태훈’ 평론가가 참신한 평론을 쓰고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읽은 그의 작업은 거의 없었다. 갈무리의 프리뷰 요청이 있자 그의 책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고 프리뷰에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그의 원고를 받아 읽으면서 상당히 놀랐다. ‘문학’ 평론가의 책이라고 들어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이 주로 실려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책은 어떤 특정 장르에 매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타 다른 장르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글들로 이루어진 책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의 평론 대상은 어떤 구획된 장르로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책은 잡탕과 같은 글쓰기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논평 대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논의 대상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고 담론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이 책은 새로운 평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카프카의 <소송>과 같은 ‘고전’에서부터 주류 문학제도 담론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문학작품이나 잡지 또는 영화에 대한 담론을 다룰 뿐만 아니라 헌책 여백에 쓴 누군가의 기록이나 한국에서의 복사기의 역사 등 어떻게 보면 기상천외한 주제의 담론까지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형식이나 주제의 새로움에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새로움’ 자체만으로는 우리 시대의 절체절명의 과제로서 제시되고 있는 자본의 포획으로부터의 탈주와 저항을 이루어낼 수 없다. 자본 역시 ‘새로움’-사건의 새로움이 아니라 상품의 새로움-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그 새로움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포획한다.

저자는 삶을 포획하는 자본의 권력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의지를 명확히 표명하면서, ‘새로움’으로 질주하는 자본의 ‘하이테크(high-tech)’ 미디어 권력에 저항하는 미디어 운동을 로우테크(low-tech)를 통해 구상한다는 것(이 책의 부제는 ‘잉여력과 로우테크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이다.)에 이 책의 참신성과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이 시대에 진정 열광해야 할 가치는 매체의 첨단성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지려는 욕망의 절정”(15쪽)에 있다.

이와 함께 저자는 저항의 동력을 어떤 중심에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가령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한 데 연결된 우리 시대의 공통체共通體인 ‘촛불’”(85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혹자가 ‘촛불’의 의의를 폄하하기 위한 증거로 든 ‘미적지근한 시민들’의 디테일에서 찾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촛불’에 대한 옹호냐 비판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촛불’은 그때의 신체들로부터 다시 기억되고 발언”(72쪽)되어야 하며 “‘촛불’을 이 모든 목소리가 다시 올라오게 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84쪽)는 저자의 ‘촛불론’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애의 미디올로지(medillogy)’라는 저자의 독특한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미디어(media)와 이데올로지(ideology)의 합성어인 ‘미디올로지’는 단순히 ‘매개학’ 또는 ‘매체학’으로 번역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서, 저자는 이 ‘미디올로지’를 다음과 같이 독특하게 개념화한다.

이 기호(‘우애의 미디올로지’를 말함-인용자)의 의미는 반투명한 상태로 내버려둬야 한다. 적확한 번역飜譯, translation보다는, ‘우애’의 대주제를 따라 최적화될 수 있는 사용 능력의 변역變易, mutation이 중요하다. ‘우애의 미디올로지’라는 용어 역시 일반화, 보편화를 지향하는 학술 개념 같은 게 아니라, 세계의 비참에 맞서 무엇인가 해야 할 때임을 알리는 슬로건이다.

생물학에선 ‘medium’을 ‘배지’培地라고 옮긴다. 식물이나 세균, 배양 세포 따위를 인공적인 조건 아래에서 기르는 데 필요한 여러 영양소가 들어 있는 액체나 고형 혼합물을 지칭해 이 단어를 쓰고 있다. 한자를 살펴보면,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돋운다는 뜻의 배培와 장소를 의미하는 지地가 합쳐져 있다. 이들 이미지 간의 인터페이스를 쫓는다면 ‘미디올로지’란 인간 ․ 자연 ․ 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제형태(이데올로기)를 새롭게 돋우는培 온갖 장소地에 관한 사유라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사유가 시작될 가장 중요한 장소는 ‘신체’다.(8-9쪽)


임태훈은 ‘medium’의 생물학적 의미를 차용해서 ‘미디올로지’라는 개념을 새로이 ‘발명’한다. 물론 이 개념은 ‘미디어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통상의 학술적 ‘미디어론’과는 그 위상이 매우 다르다. 그의 ‘미디올로지’에서 미디어는 ‘매개’의 의미보다는 ‘장소’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서 미디어란 매체라는 의미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이데올로기(이 책에서 이 용어는 부정적으로 쓰이지 않고 있다.)가 생성되는 장소라는 의미가 더 중시된다. 그리고 ‘미디올로지’란 그러한 장소에 대한 사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겐 의식의 제형태가 생성되는 장은 바로 신체다. 그래서 저자에게 미디어란 신체와 신체가 공통으로 만나는 장이며, 그의 미디올로지란 신체의 ‘공통체’가 생성되는 미디어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신체들이 만나면서 공명하고 삶이 새로이 배양되는지를 찾아보고자 하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진화’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에게 ‘미디올로지’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슬로건으로서의 개념인 것이어서, “새로운 미디어가 낡은 미디어를 밀어낸다는 식의 기계적 세대교차의 필연성 같은 건, ‘나’와 미디어의 관계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16쪽) 것이다.

하여, 저자의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미디어에서 ‘우애’가 이루어지는 신체의 장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경제동물로 길들지 않은 당신의”“그 숨겨진 몸을 찾는 놀이의 제안”(65쪽)이다. 우애란 신체와의 역동적인 만남과 뒤섞임을 통한 공명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애’友愛는 다양체에 접속하는 모든 요소를 꿰어 묶는 동일성의 원리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성질들이 카오스모스를 이루며 얼마든지 얽히고 서로 파괴할 수조차 있는 근본적이고 철저한 포용의 조건을 의미”(41쪽)한다. 그래서 신체가 뒤섞이고 공명하면서 “특유의 리듬, 속도, 정동 등의 강도의 흐름이” 방사되는 장소가 바로 우애의 미디어이며, 이 “아직 종결되지 않는 생성의 과정에 주목”하는 사유가 바로 “‘우애의 미디올로지’”(40쪽)다.

가령, 저자가 1장에서 공들여 분석하고 있는 정성일 감독의 영화 <카페 느와르>는, 저자에게 “다양체로서의 서울을 재발견”(34쪽)해주며 “이 영화와 ‘함께’ 공명할 수”(21쪽) 있게 해주는 ‘우애의 미디어’다. 그는 이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위해, 평문의 서두에서 <카페 느와르>의 엔딩 장면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산 전망대의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가 점차 점차 음량을 높이며 전면에 드러난다. 소녀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 16초 동안, 우리는 이 도시의 온갖 소리가 대기 중에 뒤엉키고 휘몰아치는 거대한 공명共鳴과 마주하게 된다. 풍경landscape과 달리 사운드스케이프는 누구의 시선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 지각된 풍경을 해체하고 고정된 의미를 헝클어 놓는다. 사운드 스케이프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달리 생성한다.(21쪽)

저자는 ‘소리’와 관련된 매체의 근대 문화적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소수의 연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그가 근대의 시각중심주의에 따른 ‘풍경’을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리의 공명에서 찾고 있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소리’에 대한 천착은 근대적 비평-해석적 비평-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데로 저자를 이끄는 듯하다. “그 모든 울림을 휘어잡아 매듭지을 수 있는 비평이 과연 가능할까?”라고 묻는다면, 그러한 비평은 가능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그러한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면서, 그 질문에 갇혀 <카페 느와르>의 엔딩 신에 나오는 소음을 해석하려고 하고 그 소음을 통해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가를 답안 맞추듯이 찾으려고 한다면, 그러한 작업은 인생을 허비할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그 대신에 “나는 이 영화와 ‘함께’ 공명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공명이란 “어느 쪽도 의도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의 순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비평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비평은 공명의 기록이 되며, 공명이 일어나는 장소(미디어)와 더불어 그 공명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는 담론이 된다. 저자의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비평은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공명을 생산하는 작업, 더 나아가 의미를 발명하는 작업이 될 터이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저자의 담론 역시 통상의 비평적 관점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저자에게는 문학 역시 우애의 미디어로서 신체의 만남과 공명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한국 문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문학과 정치’ 논쟁에 개입한다. ‘문학과 정치’의 논쟁은 “정작 ‘윤리’나 ‘정치’의 문제보다는 제도로서의 ‘문학’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소모됐다. ‘중요한 것은 문학’이라는 결론을 질문 안에 미리 넣어 뒀다가 다시 꺼내보는 논리”(167-168쪽)라고 비판한다. 그것보다는 접속조사 ‘과’가 ‘문학’보다 위력적이라면서 “‘문학’은 차라리 접속력接續力”이고 “‘접속력 문학’인 ‘문학’을 어떤 사건에서 ‘사용’할 것인가?”라고 물을 때 “‘접속력 문학’은 사건 안에 새로운 ‘강렬함’을 구성하는 힘이 될 수 있다”(168쪽)고 한다. 하여,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므로 항상 동무를 불러 모아야 하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사건 속에서 강렬해질 때에만 하찮게나마 자신의 존재를 지속할 수 있다. 그래서 ‘문학’은 누구하고든 새롭게 동무가 될 준비를 해야만 한다. ‘문학’의 밑천은 한마디로 오지랖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미디어도 결국 오지랖의 문제가 아니던가. 삶을 둘러싼 온갖 관계에 대처하는 불확실하지만 불가피한 지향이야말로 ‘미디어’와 ‘문학’이 공유한 출발점이다. 대저 가장 하찮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자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뭐든 노력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역설이 ‘우애의 미디올리지’를 가능케 하는 유용한 근거라고 생각한다.(173쪽)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으로 나눌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접착제를 뒤집어쓴 바보처럼 뭐든 다 들러붙게 할 수 있”(171쪽)는 ‘접속력’이다. 즉 “문학과 미토콘드리아, 문학과 기생충, 문학과 페티시즘” 등 “마구 이어붙이고 서로의 도깨비 같은 꼴을 놀리고 낄낄거”(같은 쪽)릴 수 있는 접속력. 그래서 “문학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항상 동무를 불러 모아야 하”는 무엇이다. “새롭게 동무가 될 준비를 해야만” 하는 문학. 어떤 것과 붙어먹을지 몰라 “삶을 둘러싼 온작 관계에” 불확실하게 대처하는 문학의 ‘하찮음’은, ‘외로움’을 불러일으켜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뭐든 노력”하는 “불가피한 지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문학’은 충분히 하찮아서 좋다. 이것이 ‘문학’의 비범한 무능력이다.”(168쪽)라고 말한다. 왜 “비범한 무능력”인가?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중요치 않고 확실히 하찮지만 이 또한 삶에서 싹틀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며 “그것은 다른 어떤 가능성보다 우리를 잘못 시작하게 하고 낭패를 반복하게 하는 특유의 무능력”(183쪽)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성의 ‘문학’에 대한 이해와는 전혀 다른, 문학에 대한 독특한 정의이자 대담한 이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담론의 풍부한 연쇄를 생산할 수 있다. 가령, 문학은 접속력이라는 정의에 따르면 이제 문학은 기성의 문학론에서처럼 저자-텍스트-독자의 회로에서 유통되는 것만이 아니게 된다. 문학이 접속력이라고 할 때, ‘문학’은 “‘읽기’와 ‘쓰기’ 또는 ‘작가’와 ‘독자’의 영역으로 수렴될 때만 현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페이지의 평면 위에서뿐만 아니라 전자적인 에너지 플로우energy flow의 상태 자체”(122쪽)일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이 접속력이라면, 가령 인터넷 공간에서 글과 접속하고 상상하고 글을 쓰는 대중들의 흐름 자체 역시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흐름이 결코 순탄하게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흐름인 ‘문학’은 강렬한 리듬을 통해 생성되는 신체적 공명 속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저자의 말을 가져와보자.

가능태의 주름 속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움켜쥐려는 강렬한 욕망, 새로운 개념에 가열된 한껏 들뜬 지성, 그리고 그 모든 강렬함의 리듬이 쉽게 중단되지 않고 갈증이나 식욕, 성욕에 들린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계속되는 ‘읽기/살기’를 확인하고 싶다. 이때 ‘명제’들과 대면하고, 이에 유혹당하고, 그것의 가능태가 당신의 육체에 깃들어 실천으로 격발되는 선택의 연쇄를 우리는 ‘문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의 주인공은 문장에 휩싸여 우리의 의식에 현상하지만, 당신은 미지의 ‘명제’들을 관통하며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 수 있다.(135쪽)

여기서 ‘명제’란 화이트헤드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저자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의 ‘명제’는 판단의 대상이자 흥미로움의 대상이며 존재의 범주들 가운데 하나이어서 논리학의 상관 굴레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한다.(132쪽) 명제는 진위의 굴레와는 상관없다. 그것의 유혹은 “숨겨져 있는 것들을 움켜쥐려는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이 명제들과 대면하여 강렬한 욕망 속에서 들뜬 지성을 통해 ‘읽기/살기’를 계속해나가는 그 리드미컬한 흐름이 저자에겐 ‘문학’이다. 그리고 “미지의 ‘명제’들을 관통”하면서 그 ‘가능태’가 “육체에 깃들어 실천으로 격발되는 선택의 연쇄”를 살게 될 때, 삶은 예술화된다.

그래서 육체에 깃들은 ‘명제’들 역시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신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들뢰즈를 경유하여 ‘백지’白紙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물리적 실체로서의 종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상상하고 싶어 하는’, ‘쓰고 싶어 하는’ 온갖 정념과 정동이 한 데 뒤엉켜 와동하는 ‘언어신체’”(144쪽)에 강렬히 반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언어신체의 네트워크는 인터넷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이책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우애가 이루어지는 미디어인 ‘문학=명제를 관통하는 신체적 흐름’은, 이 책에서 가장 ‘기발한’ 장이라고 할 수 있는 8장의 ‘파라텍스트 증식론’에도 연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또 다른 독특한 개념인 파라텍스트paratext란 “소설책에서 소설 그 자체를 텍스트라 한다면, 소설의 제목, 표지에 두른 띠지, 판권지, 제사, 주, 삽화 또는 작가의 ‘일러두기’ 등을 통틀어”(15쪽) 일컫는 것이다.

저자가 8장에서 시도하는 ‘파라텍스트 증식’은 “하릴없이 오려내 버렸던 미지의 욕망을 파라텍스트의 파선을 따라 다시 접합”(201쪽)하는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헌책방에서 산 <80년대 대표소설>이란 책의 여백에 적힌 메모를 다시 기록하기도 하고, 그 책과 나란히 꽂혀 있었던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일명 ‘자구발’)>과 를 구입하여 “‘80년대’라는 기호로 연결되는 파선”을 그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자구발>에 대한 회고담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의 수용사에 대해 조사해보기도 한다.

이 파라텍스트를 횡단하면서 비선형적인 파선을 긋는 행위 역시 바로 ‘접속=문학=신체적 흐름’의 일종일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미래의 전자책이 “텍스트를 휘감고 소용돌이치는 정보의 노이즈와 파라텍스트의 파생을 추적하는 비선형적 네트워킹의 도구”(213쪽)가 되는 ‘이종의 전자책’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그런데 이러한 ‘파라텍스트 증식’ 또는 ‘비선형적 네트워킹’은 참신한 사고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인터넷 서핑과 비슷한 원리 아닐까 한다.)

이를 보면, 저자의 ‘파라텍스트론’은 전자책과 같은 첨단적인 미디어의 미래에 대해서도 잔여적인 것, 노이즈 같은 것에 연결 접속하면서 의미를 새로이 생산하는 방향으로 저자의 생각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이는 저자가 더불어 행복해지려는 욕망의 방향에서 미디어를 살펴보려고 한다고 해서 ‘이종의 전자책’과 같은 첨단적 매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이 책의 9장인 ‘‘복사기의 네트워크’와 1980년대’에서 보여주듯이, 저자는 매체의 기술적 진화와 정치적이고 저항적인 신체와의 결합 양상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이 논문에서 지하방송 팀을 만들거나 오디오테이프를 만들면서 전국에 배포하고자 했던 황석영의 예를 언급하면서, 이는 “당대 미디어 환경에 내재한 그 모든 저항적 역량에 접속하고 기여하고자”(225쪽) 했던 1980년대 문학이 “무엇과 ‘더불어’ 시대를 돌파해갔는가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어떤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시대를 돌파하고자 했는가를 보려는 관점은, 바로 위에서 보았던 ‘접속사’에 주목했던 것과 일관되게 연결되는 것이다.

9장에서 저자가 주로 논의한 것은 1980년 광주의 5월 이후 대항 미디어 운동과 결합하여 진화한 ‘복사기의 네트워크’의 역사이다. 하지만 1980년대 복사기 네트워크의 진화와 더불어 시인이 정작 주목하고자 한 것은 불온문서를 유통하고자 하는 불온한 주체들의 신체다. 즉 저자의 말을 직접 빌리면, “1980년 광주의 비극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분노하고 애도하지 않고선 살아간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진 무수한 몸뚱이 그리고 세상이 불온하다고 낙인찍은 금지된 지식을 욕망하게 된 자의 몸이, 복사기와 더불어 이뤄낸 새로운 네트워크의 역능”(235쪽)에 대해 저자는 주목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러한 네트워크의 역능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복사기의 네트워크와 연결된 “새로운 문학적배치가 정보에 대한 강권 통제가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로 역사를 전진시켰기 때문”(235-236쪽)이며, 이에서 “우리가 한 시대의 미디어 환경을 활용하는 방법은”“아직 구성된 적 없는 사회 문화적 배치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 고쳐 발명해야 한다는”(238쪽)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새로운 미디어가 낡은 미디어를 밀어낸다는 식의 기계적 세대교차의 필연성”(같은 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복사기의 네트워트’라는 미디어에 대해서도, 저자는 역시 신체와 신체가 공통으로 만나는 장으로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애의 미디올로지>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이 책은 ‘미디올로지’란 새로운 개념을 생산하면서, 기성의 관념을 탈각시켜 미디어를 신체가 공명하는 장으로서 사유하는 길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과 방법 면에서의 참신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 유의미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평론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해설적 또는 해석적 비평을 지양하고 텍스트와 공명하는 비평의 길을 열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저작이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책을 읽으면서 토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하게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촛불’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대해서 토론해보고 싶다. 저자는 ‘촛불’에서 ‘미적지근한 시민들’의 디테일을 주목해야 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디테일에만 주목하게 된다면 ‘촛불’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큰 그림에서 보지 못하는 한계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잔여적인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도리어 이 시대에 점차 또렷하게 그려지고 있는 자본에 대한 저항의 선을 포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의 기능 아닌 기능에 대한 저자의 논의에 대해서도 토론해보고 싶게 하는데, 앞에서 보았듯이 저자는 문학을 ‘그 하찮음’과 ‘비범한 무능력’이라는 면에서 조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새롭다거나 기성의 관념을 파괴하는 주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문학은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주장은 이미 삼사십 년 전에 문학평론가 김현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물론 김현과 임태훈의 문학론을 동일하게 볼 수 없으며 적지 않은 이론적 정치적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임태훈의 ‘문학의 무능력’론과 김현의 ‘문학의 무기능론’이 ‘공명’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사실 필자는, 스스로 ‘문학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문학과 시의 힘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우리가 시라고 지칭하는 텍스트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창조적인 역량을 지칭한다. 하지만 텍스트로서의 시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텍스트로서의 시, 말의 특이한 배치로서의 시는 그러한 역량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태훈은 이러한 문학의 힘에 대한 강조가 도리어 문학이 지니는 잠재성을 포착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는 문학 자체는 무능력하지만 한편으로 문학은 그렇게 무기력하기 때문에 도리어 접속해야 존립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접속력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접속력으로서의 문학은 새로운 ‘강렬함’을 구성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문학’은 우리가 통상 말하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은 아니다. 그에게 문학은 시나 소설과 같은 텍스트가 아니라 일종의 강렬한 리듬과 함께하는 흐름이다. 문학은 읽기/살기를 통해 존재하며, 읽기/살기의 흐름를 통해 문학을 실현하고 있는 당신은 삶을 예술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때 텍스트는 ‘가상계’에서 증발되어 버리고, 문학은 쓰기가 아니라 읽기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문학의 진정한 창조성은 물질적 텍스트의 특이한 생산, 즉 쓰기에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의미를 생산할 수 있으며, 문학과는 다른 실재의 텍스트와 접속할 수 있는 특이한 텍스트 쓰기. 그러한 텍스트야말로 창조적인 읽기/살기를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읽기 역시 쓰기로서의 읽기가 되지 않는다면, 주어진 읽기 코드에 종속될 가능성이 많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자가 문학과 정치 논쟁에 개입하면서 결국 문학의 정치 논의가 제도로서의 ‘문학’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소모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예술의 생산을 물질적 현실의 가상적인 생산-문학의 경우 쓰기-이라고 한다면, 동일화의 기제를 통해 갈수록 목을 죄어오는 자본의 포섭으로부터 특이성의 생산을 통해 탈주할 수 있는 문학의 정치적 힘과 가치는 주목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문학이 제도로서의 문학이라고 해도 말이다. 특이성의 시적 생산이란 제도로서의 문학을 관통하면서 시적인 것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현실화는 제도로서의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경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문제는 제도/비제도의 구분이 아니라 그 경계를 초과하는 시적인 것의 예술적 힘을 발견하고, 이 힘에 결합하고 공명하며 정동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바로 임태훈의 작업이 문학과 예술이 지닌 잠재력에 공명하는 길을 새로운 방향으로 열어놓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의 특이한 작업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지속적인 지지와 흥미를 가지고 살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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