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혁명 2년, 민중의 투쟁은 계속된다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 기획] “혁명 2주년을 돌아본다”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태가 좋지는 않다. 2011년 초 가난과 실업에 맞선 튀니지 민중의 지난한 투쟁은 벤 알리 신자유주의 독재정권을 쓰러뜨렸지만 친제 세속독재였던 튀니지 정권은 튀니지의 무슬림형제단인 온건 이슬람주의 엔나흐다당인 친제 이슬람 독재로 바뀌었을 뿐 낡은 지배계급은 그대로다. 그러나 튀니지 민중은 재구축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지배체제에 맞서 튀니지의 새로운 미래를 예비하고 있다.

튀니지 혁명의 도화선이 된 시디 부지드의 모하메드 부아지지.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그는 노점을 꾸리지만 2년 전 12월 17일 시청단속반이 허가 없이 노점을 한다는 이유로 수레를 부수고 뺨을 때리며 청과물을 압수하자 실업과 부패를 해결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항거했다. 그의 분신 후 빚과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던 채무자 등 적어도 4명의 분신이 잇따랐고 청년실업자, 빈민, 불안정노동자 등 일자리와 미래를 빼앗긴 계급의 폭동과 시위가 가난한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된다.

이러한 가난한 이들의 폭발적인 시위 배경에는 수십 년간 지속됐던 신자유주의 벤 알리와 RCD(입헌민주연합) 일당독재 그리고 이들의 삶을 더욱 고통 속으로 몰아간 경제 위기가 자리했다.

혁명의 배경: 폭력정치와 신자유주의

  2011년 1월 튀니지 민중이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links.org.au/node/2257]

23년 철권통치의 독재자 벤 알리는 애초 1987년 쿠데타로 부르기바 ‘전제정부’를 쓰러뜨리고 집권하며 자신의 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법의 지배, 인권 보장, 정치 개혁 등을 약속하며 민주적인 정권임을 자임했다. 그래서 부르기바 탄압 아래 수감된 노동자 석방, 몰수된 재산 반환 등 상징적 제스처를 취하며 상대적으로 관대한 조치를 편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치 기반 아래 90년대 초 엔나흐다를 비롯해 부상하는 이슬람주의 등 정치적인 이견은 강력하게 탄압한다. 혁명 전 모두 8개의 정당이 있었지만 이중 5개가 금지됐다. 허용된 3개 정당은 RCD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2개의 정당이었고 공산주의 노동당, 이슬람주의 정당, 민주주의 노동당과 범아랍주의 세력은 불허됐다. 또 언론 검열과 함께 방대한 비밀정보기관과 경찰에 의한 고문과 구금 등 국가폭력이 횡횡했다. 벤 알리는 국가기구와 집권당을 구분하지 않았고, 집권당인 RCD는 국가였고, 국가는 벤 알리에게 봉사했다. 벤 알리는 또 다른 부르기바였을 뿐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자원이 빈약한 조건 아래 섬유기업과 자동차공급업체 중심의 수출, 여행산업에 의존된 튀니지 경제 여건 속에서 벤 알리는 사적 투자를 유치하며 국가기간 산업 사유화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했고 이의 주된 수혜자는 “벤 알리와 40인의 도적”이라는 별명처럼 그와 친인척이었다. 튀니지 슈퍼마켓체인, 은행, 운송수단, 기업, 빌라, 호텔 등 주요 산업을 벤 알리와 그의 부인 그리고 이들의 친인척이 독점했다. 이러한 가운데 수출과 여행산업이 분포한 튀니스 북부와 동부 해안지방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누렸지만 중앙과 남부는 소외된 지역적 편차를 가졌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간판스타 벤 알리의 경제 개혁을 놓고 세계은행과 서구 정부는 균형적인 성장을 이끌고, 빈곤을 퇴치했으며, 사회지표를 개선했다고 칭송했지만 경제적 격차는 확대됐다. 벤 알리 몰락 전 실업률은 14%에 머물렀고 인구의 42%가 25세 이하인 조건에서 청년실업률은 약 40%로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세계대공황과 식량 가격의 폭등에 따른 수출 하락과 식료품 가격의 인상은 정치적 억압 아래 수십 년 동안 짓눌려 온 튀니지 민중을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혁명의 특징들: 거리와 인터넷에서의 자발적 조직, 빈곤 지역 집중 투쟁, 대중조직 연대를 통한 계급투쟁

2010년 12월 17일 시디 부아지지의 분신 후 초기 투쟁은 가난한 튀니지 내륙 지역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선 청년실업자, 학생, 노동자계급과 여성, 인권활동가, 변호사들의 집중적인 투쟁과 대중조직의 연대로 발전하며 전국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튀니지 시위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거세게 일어났다는 점이 주목된다. 초기 시디 부지드에서 지역 주민, 학생과 교사노동조합은 부아지지에 대한 당국의 폭력에 저항했고 이들 시위는 알라갑, 믹나씨, 멘젤 부자이엔, 카이르완, 스팍스와 벤 가르단, 가프사, 카세린, 탈라 등으로 퍼져 신자유주의의 부패한 정권 아래 가난과 실업의 고통을 호소하며 격렬하게 투쟁한다. 특히 1월 8일에서 12일 사이 “탈라는 북아프리카의 스탈린그라드다”라고 선언하며 격렬한 저항에 나선 청년학생과 시민에 대해 벤 알리 정권은 살육에 나섰고 이에 따라 62명이 희생된 참극은 전국을 충격에 빠트리며 지역의 시위가 전국적 봉기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여기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디 부지드에서는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당국에 저항하는 연대 시위를 벌였고 전국적으로 학교와 대학이 청년학생들의 시위 거점이 되자 튀니지 당국은 모든 학교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변호사들의 투쟁 또한 당국에 맞선 가난한 이들의 시위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2월 말에는 3백 명의 변호사가 튀니스 정부청사 근처에서 시위하는 한편 1월 6일에는 전국 변호사 8천 명 중 95%가 참여한 변호사 총파업이 전개된다.

청년실업자, 학생, 노동자의 사회적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주도한 튀니지 일반노동조합 UGTT도 벤 알리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행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애초 UGTT는 저항세력의 지붕으로 자리하기도 했으나 상층부는 벤 알리 정권 아래 조합관료주의 세력이 주도하며 부패 등을 이유로 비난받았다. 일례로 2008년 1월 가프사 지역 탄광에서 일자리를 문제로 시위에 나섰던 청년실업자들은 신규채용을 줄이고자 했던 탄광사 편에 섰던 지역 UGTT의 사무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UGTT는 시위의 거점이자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시드 부지드 뿐 아니라 UGTT는 벤 알리 퇴진 투쟁과 파업, 궐기와 집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1월 12-14일 파업을 통해 공공부문 전체, 은행과 상업을 마비시키며 위기에 몰린 벤 알리를 결정적으로 압박한다. 벤 알리 축출을 전후로는 튀니지 전역에 “혁명수호위원회” 결성을 주도해 지역 투쟁을 강화하는 한편 벤 알리의 민병대 등 반혁명 세력의 공격에 방어한다. 또한 1월과 2월 2번의 과도정부를 무너뜨린 카스바 광장 점거 투쟁에 대한 지원에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학교 및 정부 공공기관, 텔레콤 등 사업장 내에서 진행된 노동자들의 민주화 투쟁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자발적으로 이뤄졌던 거리와 온라인에서의 활발한 토론문화도 튀니지 혁명의 주요한 대목이다. 튀니지 민중의 처절한 투쟁이 언론으로부터 외면되는 가운데 튀니지 활동가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위와 진압 소식을 전파하며 상황을 공유하고 토론과 시위를 조직한다. 이러한 토론 문화는 거리에서도 이어져 거리 시위대는 상황과 문제, 투쟁 방향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민주적인 투쟁공동체를 형성해 간다.

튀니지 당국은 회유책을 제시하면서도 시위대에 최루탄, 물대포와 함께 실탄 발포 등 살인진압을 벌이며 민중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큰 희생을 낳았다. 유엔에 따르면 혁명기간 219명이 사망하고 510명이 부상당했다. 직접적인 탄압 한편에서 벤 알리는 시위대를 겁주고 테러하기 위해 사병(용역깡패집단)들을 동원했고, 보안기관과 정보원들은 주모자를 잡으려고 혈안이었다. 당국은 또한 시위 공유와 조직의 주요 기반이었던 인터넷을 폐쇄하고, 블로거, 언론인, 활동가와 비판적인 예술인에 대한 가택침입과 단속, 활동가들의 이메일과 페이스북이 해킹 등 총체적인 탄압으로 대응했다.

위키리크스가 미국이 튀니지에서의 부패와 불만에도 불구하고 벤 알리를 지원했다는 미국 외교문서를 공개했듯, 친미 벤 알리 정부를 지지해왔던 미국을 포함한 서구는 뒤늦게야 인권 탄압에 대한 우려만을 내놓은 점도 주목된다.

혁명 이후 과정: 구세력 축출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

전제주의적인 폭정, 신자유주의 개혁과 족벌 경제, 수백만의 곤궁한 현실 속에서 정권에 맞서 목숨 건 튀니지 민중의 투쟁은 결국 1월 14일 벤 알리 정권을 무너트린다. 그러나 구세력은 벤 알리가 도주하자 사회적 문제 모두를 그에게 전가하며 권력 유지를 위한 총력에 나서 튀니지 민중은 다시 이에 맞선 투쟁을 전개한다.

튀니지 민중은 RCD 여당 세력 척결과 과도정부에 모든 정당이 참여할 수 있는 자유선거 준비,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RCD 구세력은 과도내각을 구성하고 인물 축출이 아닌 RCD에서 탈퇴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봉합하며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튀니지 민중은 이에 맞서 카스바 광장 점거 투쟁, 지역 시위 등 강고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의 투쟁은 RCD 세력 각료 축출, 두 번의 대대적인 내각교체와 벤 알리의 총리였던 간누치 사임 그리고 3월초 RCD 인사가 축출되고 야권을 포함한 신규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도 과도 정권의 폭력 진압에 따라 시위에 나선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이후 새로운 정치체제 구성을 요구하는 튀니지 민중의 지난한 투쟁은 지배층과의 줄다리기 속에서 고문반대협약 인준, 비밀정보기관 해체, 언론의 자유 보장, 사회보장 일부를 개선시킨다.

UGTT 등 튀니지 민중의 헌법 개정 요구 속에서 진행된 10월 23일 제헌의회 선거에는 81개 정당이 참여해 217명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선거 전에는 중도좌파의 부상이 전망됐으나 51.97%의 낮은 투표율 아래 진행된 이날 선거에서 이슬람 엔나흐다당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확정된다.

선거결과는 엔나흐다당 89석(37.04%), 좌파자유주의적 공화의회당(CPR) 29석, 대중적인 백만장자 주도의 국민청원당(PP) 26석,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에타카톨당(Ettakatol) 20석, 중도좌파의 진보민주당(PDP) 16석, 벤 알리 정권 출신이 총재인 발의당(TI) 5석, 타즈디드(Tazdid) 운동, 좌익사회주의당, 중도당, 공화당이 결성한 민주현대연합(PDM) 5석, 구 RCD와 연계된 기업계 중심의 튀니지지평당(Afek Tounes) 4석, 공산주의 노동자당(TWP) 3석, 사회민주운동당(MSD) 2석, 민중운동당(PM) 2석 등으로 나타난다.

엔나흐다당은 튀니지 혁명운동에 주요한 세력으로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98%가 무슬림(수니파)인 튀니지 사회에서 많은 이점을 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은 갑자기 폭증한 다양한 후보군 사이에서 사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을 벌인 한편 엔나흐다당이 벤 알리로부터 받은 탄압은 엔나흐다당을 그와 대조시켜 신뢰를 얻도록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은 부상하는 엔나흐다당과 기타 이슬람 운동을 비판했지만 이러한 태도는 세속주의인 벤 알리 전 정권과 유사한 위치에 서도록 하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엔나흐다당은 세속주의의 공화의회당(CPR)과 에타카톨당(Ettakatol)과 연정을 구성했고 총리는 엔나흐다당 사무총장이었던 하마디 즈벨리가, 대통령직은 공화의회당의 몬세프 마르주키가, 제헌의회 의장은 에타카톨당의 무스타파 자파가 맡는다.

그러나 엔나흐다당 연정은 혁명을 배반하며 튀니지 민중들의 실망과 분노를 확산시킨다고 비판받고 있다. 튀니지 민중 봉기를 끌어올린 주요 원인은 경제적 문제에 있지만 이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튀니지의 경제 위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기 때문이다. 튀니지 실업률은 지난해 19%, 청년층의 실업률은 42%에 이르며 사회적 여건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일자리 부족과 경기 침체의 문제는 11월 실리아나에서 일어나 다른 도시로 확산된 노동자들이 벌인 반란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연정이 구성된 지 1년이 경과했지만 새 헌법은 마련되지 못해 무능력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엔나흐다당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인 살라피스트와 연합하여 끊임없이 반여성적이고 반시민적인 이슬람 율법을 헌법에 넣으려고 시도하는 한편 종교적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일례로 5월 민간 방송사 네스마(Nessma) 대표는 일부 종교적인 비판으로 인해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고 도덕적 가치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출몰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살리피스트들은 엔다흐다당이 이들을 사실상 허용하며 법정, 독립언론, 이슬람 비판적인 문화행사, UGTT 사무소, 집회, 노동조합원과 활동가를 공격하는 사적 탄압에 나섰고 사회적 불안을 확대시켰다.

UGTT 급진화와 12개 좌파연대, “우리는 두 번째 혁명을 기대한다”

  튀니지 인민전선 창립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출처: http://www.demotix.com]

총체적으로 튀니지 민중의 혁명은 폭압적인 전제정치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강요된 사회적 곤궁에 맞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청년학생과 지역주민, 여성과 인권단체 그리고 UGTT 노동조합의 계급투쟁으로 분출됐으나 정치적 대안을 조직하는 데 실패하며 반민중 벤 알리의 RCD 독재는 친자본 이슬람주의 엔나흐다당 체제로 뒤바뀌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무능한 여권, 민중과 계급대중운동의 급진화와 혁명 주체들의 연대는 튀니지에 새로운 도전을 예고하고 있다. 튀니지 정부는 지지를 잃고 있고 의원들은 여당으로부터 이탈하는 가운데 10월 12개의 정당이 좌파 정당을 중심으로 “인민전선”을 결성하고 협력하며 정치적 변화가 있다.

“인민전선”은 오는 6월 선거에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부상해 민중 반란이 요구한 과제를 성취하는 기회로 선거를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6%를 얻어 4번째 자리에 섰다. “인민전선”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15% 이상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작년 11월 16일 튀니지 노동자당 전국위원회에 참여하는 압델 자바르 마도우리(Abdel Jabbar Madouri)는 대안언론 <그린레프트>에 “튀니지 민중의 삶의 조건 악화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부의 무능력 때문에 튀니지에서는 두 번째 혁명이 기대된다. 인민전선은 이러한 사건에 준비돼 있고 혁명을 주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 인권 단체 등 튀니지 사회운동은 엔나흐다당이 헌법에 이슬람주의 율법인 샤리아법을 도입하고자 했으나 이 제안을 철회시키는 등 엔나흐다당의 반혁명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UGTT는 튀니지 노동자의 다수를 구성하는 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법안 마련, 생활물가 인상에 기초한 실질임금 인상,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등 노동자 권리 증진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튀니지 민중은 엔나흐다당 체제를 넘어서는 사회경제적 대안 그리고 이를 이행할 정치적 대안 등 많은 이행 과제를 앞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제위기 아래 악화되고 있는 튀니지 경제 상황 그리고 변화하는 경제와 군사계획을 통해 아랍 세계의 정세에 개입해온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의 제국주의적 조치도 향후 튀니지 혁명 과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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