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바라크 축출이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2) 이집트 민중의 염원과 무슬림 형제단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개구리 소년 왕눈이에게는 아로미라는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무지개 연못의 독재자 메기의 하수인이었던 아로미의 아빠 투투는 메기의 명령에 못 이겨 딸을 갖다 바친다. 그 사실을 안 왕눈이가 아로미를 구해오고, 화가 난 메기는 연못의 모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그러자 왕눈이를 비롯한 연못의 개구리들이 똘똘 뭉쳐 메기를 쫓아내게 되고, 마침내 무지개 연못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만화 속 이야기일 뿐,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메기 대신 가재가 나타나 개구리들을 계속 괴롭힐 수도 있고, 독재자에 맞서 함께 싸웠던 황소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들을 따돌리고 연못의 질서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놓으려 할 수도 있다. 독재자는 쫓겨났지만 언제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 그래서 그토록 바라던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까지는 한시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의 나날들. 무바라크 독재정권을 30년 만에 권좌에서 끌어내린 지 2년이 다 돼가는 오늘의 이집트가 처한 현실이 딱 그렇다.

[출처: 하스나인 카짐(Hasnain Kazim, http://www.spiegel.de/fotostrecke/fotostrecke-64450-12.html)]

살아있는 한 영원히 대통령일 것만 같던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사실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지네 엘 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축출될 때까지만 해도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바로 그 뒤를 잇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식량가격 폭등으로 인해 튀니지보다도 먼저 대규모 정권퇴진 시위가 터져 나왔던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대기번호 1순위라는 관측이 더 우세했다. 그건 무바라크 정권의 횡포가 덜해서가 아니었다. 무바라크가 30년간 쌓아놓은 독재의 철옹성이 그만큼 단단하고 견고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독재국가 치고 안 그런 나라가 어디 있을까만, 1981년 10월 6일 전임자 안와르 사다트가 암살되면서 권력을 승계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 사법, 언론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완전히 친위체제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족민주당(NDP)에서는 둘째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가 사실상 후계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최고의 전력을 갖춘 50만 대군은 군 장성 출신인 무바라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면서 정권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하나둘씩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헐값에 알짜 기업을 넘겨받은 자본가들은 무바라크 일가의 든든한 돈줄이 되었으며, 국영 언론들은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는 순간까지도 시위 상황 대신 평화로운 나일강변의 영상을 화면에 내보낼 정도로 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충실했다. 그와 동시에, 조금이라도 독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민주주의, 인권 따위를 운운하는 반대파들은 보안기관과 경찰을 시켜 깔끔하게(?) 처리하면 그 뿐이었다. 그나마 2005년 선거에서 불법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소속 후보들이 하원 의석의 20%(88석)를 차지하면서 잠깐 화들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쫓겨나기 불과 석 달 전인) 2010년 11월 총선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로 모두 떨어뜨려 버렸으니 그걸로 끝인 것만 같았다.

결정적으로, 무바라크 정부의 뒤에는 미국 정부가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 의회조사국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던 1979년부터 해마다 평균 20억 달러의 경제, 군사 원조를 제공해왔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지역의 맹주로서 아랍에서의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 대가였다.

그랬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다. 1월 25일 수도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본격화된 지 불과 17일 만에 30년간 드리워져 있던 독재의 장막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극적인 변화가 연출된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가혹한 인권탄압, 권력층의 부정부패, 12%에 달하는 실업률과 30%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 그로 인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 식량가격 급등, 주택난, 열악한 공공서비스 등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에 불을 당긴 직접적인 도화선은 다들 알다시피 튀니지에서의 극적인 정치변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민중항쟁이 튀니지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튀니지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과 뒤이은 항쟁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집트의 민심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은 여기저기서 울려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뚜렷한 파열음을 낸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마치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그들은 독재정권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온 몸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bazonline.ch]

독재의 성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의 노동운동은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전투적이고 강력한 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이 1957년에 모든 노동조합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기 시작하면서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노동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곤 했다.

그러는 사이 유일한 합법 연맹이었던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은 무바라크 측근들의 자리를 보전해주는 이권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하의 24개 산별연맹 가운데 22개 연맹의 위원장이 무바라크 정권이 건네준 낙하산을 타고 온 측근들이었으며, 후세인 메가웨르 총연맹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지도자들은 부지런히 조합비와 뇌물을 주머니에 구겨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노동조합마저 자신들의 목소리와 아픔을 외면할 때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 스스로를 조직해서 직접 싸움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와 이집트에서는 파업과 점거농성, 태업 같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4년과 2008년 사이에만 약 1천 9백 여 건의 노동쟁의에 1백 7십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걸 비롯해, 7년간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통틀어 모두 3천여 건의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06년부터 수도 카이로 북쪽 마할라 알-쿠브라 시의 국영 마할라 미스르 방직회사에서 일하던 2만 5천여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은 일체의 파업과 시위를 불법화한 국가비상사태 법 하에서 항상 깨지고 터지기만 하던 전국의 개혁세력들에게 강렬한 희망의 빛이 되었다. 마할라 노동자들은 체포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강한 투쟁을 벌인 끝에 정부로부터 15%의 임금인상과 해고시 반드시 노조와 협의한다는, 당시 이집트 현실에서는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따낸 것이다.

이 소식은 민주화와 개혁을 바라던 도시의 중산층 엘리트 청년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자기네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승리를 일궈냈다는 것은, 아무리 두들겨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 같았던 독재정권도 뭉쳐서 싸우면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2008년에 다시 마할라 노동자들이 파업을 준비할 때는 도시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국적인 연대 총파업과 동맹휴업을 제안하는 글들을 부지런히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퍼다 날랐고, 마할라 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점점 폭넓고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들어갔다. 그들이 바로 이집트 혁명의 기폭제가 된 1월 25일 시위를 처음 제안하고 주도한 ‘4월6일 청년운동’이었다. 그리고 ‘4월 6일’은 다름 아닌 마할라 노동자들이 3년 전 총파업을 계획한 날이었다.1)


자본가와 서구 정부에게는 어느새 손톱 밑의 가시가 돼버린 무바라크

항쟁을 제안하고 이끌어간 이들이 노동자 투쟁에 영감을 받은 청년운동 세대들이었다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한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겠다”며 끝까지 버티던 무바라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도 노동자들이었다. 무바라크가 물러나기 사흘 전 전국의 운송, 관광, 석유, 의류 노동자들이 일제히 일손을 놓아버렸다. 거기에 호응해 교사, 의사, 변호사, 기술자, 공무원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도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자본가를 비롯한 이집트의 지배계급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막대한 손실이었다.

이집트 현금 수입의 15%를 차지하며 최대 산업으로 자리 잡은 관광 부문만 보더라도, 평소 같으면 성수기인 1월에 백만 명이 넘게 찾던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다. 호텔과 여행사 사장들 입장에서는 무바라크가 하루를 더 버틸 때마다 고스란히 3억 1천만 달러(한화로 3천 7백억 원)가 공중에서 사라져버리는 셈이었다. 물류가 막히니까 수출입도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수시로 인터넷과 전화가 끊겨서 금융도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중동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가는 유조선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수에즈 운하의 노동자 6천 여 명이 벌인 선적 지연과 봉쇄 위협은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정부들까지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플랜B'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통치능력을 상실한 무바라크 대통령을 계속 붙들고 있기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2011년 2월 11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이집트의 한 핵심 금융기업 간부의 인터뷰는 당시 재계와 기득권 세력에 팽배했던 그런 정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반정부 정서가 잠잠해지기는커녕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이런 흐름은 정부뿐만 아니라 체제 전체에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시위대의 요구는 아주 분명하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게 한 가지 경로로 향하고 있어요. (향후) 시나리오가 두세 개 있긴 합니다만,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무바라크가 결국 물러날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재계도 거기에 따라 예상 시나리오를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가 게재된 바로 그 날, 무바라크는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2)

국민들이 원한 건 ‘무바라크 2.0’이 아니라 ‘혁명 2.0’

여기까지, 2년 전 그 때를 다시 되짚어봄으로써 새삼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딱 하나다.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는 ‘무려 30년에 걸친 철권통치’, ‘사실상의 일당독재’, ‘공권력을 동원한 가혹한 탄압’, ‘무바라크 일가가 빼돌린 120억 달러’ 같이 주로 정치적인 비민주성이나 권력자의 추악한 행태에 보도의 초점을 맞춘 바 있다. 만약 경찰과 친정부 깡패들의 폭력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집트의 국민들이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단지 무바라크 개인을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면, 이미 이집트 혁명은 어느 정도 목표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최근에 재심 결정이 내려지긴 했지만 무바라크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집권 민족민주당은 강제 해산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도 해제되고, 악명 높던 보안기구 요원들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해외를 떠돌던 망명객들이 돌아오고 정치수감자들이 대거 석방됐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간판과 인테리어만 바꿔단 채 옛날과 똑같이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는 ‘무바라크 2.0’ 식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물론 이마저도 턱없이 기대에 못 미치지만)와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리고 경제적 정의와 평등을 원했다. 간판에서부터 메뉴까지 모든 게 리모델링된 ‘혁명 2.0’ 식당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혁명의 주역이었던 보통의 시민들과 노동자, 청년들에게 혁명 이전과 이후는 아직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리고 그 원인의 한가운데에는 크게 두 개의 세력이 버티고 있다. 바로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이 그들이다.

[출처: http://www.stern.de]

국가 안의 국가, 이집트군

이집트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과 권력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하면서 또 독특하다. 역사적으로 1952년 파루크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한 것도 나세르를 비롯한 자유 장교단 군인들이었고,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과 무바라크 역시도 모두 군 장성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과거 자신이 소속됐던 군부가 언제 총부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은 군에게 독자적인 권력과 각종 특혜, 이권을 안겨주는 대가로 충성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무바라크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부 고위직으로 승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 장교들은 50살이 되면 무조건 퇴역하게 한 다음에 정부와 국회, 공기업, 언론사 등에 자리를 줘서 생계를 보장했다. 무바라크 집권 기간 동안 그렇게 사회 곳곳의 각종 요직을 꿰찬 퇴직 장교의 수만 해도 모두 25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또한 정부는 군대가 독자적으로 기업체를 세워 운영하고 각종 이권사업을 벌이는 것도 흔쾌히 인정해줬다. 오늘날 이집트 군은 평면 텔레비전에서부터 냉장고, 자동차, 파스타 등을 만드는 회사를 최소 35개 이상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주유소와 레스토랑, 축구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알짜배기 부동산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군이 소유한 사업체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대부분 징집으로 군대에 들어온 사병들이다. 당연히 월급은 최저임금을 훨씬 밑돈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수익 구조인 것이다.

군이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과 보유자산이 이집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자그마치 최소 15퍼센트에서 최대 40퍼센트에 이른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통계 수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이유는, 아무도 군이 보유한 자산이 얼마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부는 국가에서 배정한 국방예산과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이 모두 얼마이고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의회를 비롯한 외부의 감시를 거의 받지 않아도 되도록 군부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해줬다. 국가 안보상의 기밀이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국가의 일정부분을 뚝 떼서 군인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집트 군은 미국 정부로부터 해마다 약 13억 달러 가량의 군사지원도 직접 받아왔다. 여기엔 현금을 비롯해 각종 최신무기도 포함되어 있고, 미제 M1A1 에이브럼 신형 탱크는 아예 이집트에서 생산을 허락받았다. 게다가 인적 교류(?)도 아주 활발하다. 지난 30년간 미 국방부는 해마다 수백 명의 이집트 군 장교들을 자국에 초청해 연수를 시켜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과거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미국이 ‘아메리카 군사학교(School of Americas)’3)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킨 라틴 아메리카의 장교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쿠데타의 주역이 돼 권력을 찬탈하고 각종 납치와 살해, 고문을 진두지휘했던 역사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즉, 미국 연수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집트 군 장교들은 미 국방부나 정재계 인사들과 독자적인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집트 정부와는 별개로 미국 정부와의 논의 창구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2011년 혁명 당시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군 최고 사령관을 비롯한 최고위급 군 장성들은 군인들과 탱크가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십만 명의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수시로 미국 워싱턴을 드나들었던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과연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상으로 미뤄볼 때, 이집트가 무바라크 축출 이후 구체제 질서와 과감히 결별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의 역할을 제한하고 경제의 군사화를 해소하며 군을 둘러싼 비밀의 장막을 걷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무바라크가 쫓겨난 뒤 국정운영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은 탄타위 국방장관을 의장으로 한 군 최고 수뇌부 모임인 최고군사위원회(SCAF)였다.

물론 당시로서는 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갑작스런 정권 퇴진과 내각 총사퇴, 헌법 정지, 의회 해산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세력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쟁 기간 동안 ‘시위대를 향해 단 한 발의 총탄도 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국민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항쟁을 이끌고 참여했던 좌파와 자유주의 청년 세력들은 군이 공백기를 틈타 권력을 가로챌지도 모른다는 경계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다행히 2012년 6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군이 애초 약속대로 민간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그런 최악의 예측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로이 탄생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은 앞으로 과연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현재까지는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인다.

[출처: http://www.stern.de]

무슬림 형제단, 이슬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라는 게 문제

2012년 5월과 6월, 1차와 결선투표로 나눠서 치러진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최종적으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후보 가운데 당선권에 근접한 후보로는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정당인 자유정의당(FJP) 소속의 모하메드 무르시 이외에 무소속의 압델 모나임 아불 포토우, 좌파 민족주의 존엄당의 함딘 사바히, 그리고 무바라크 정권에서 마지막 총리를 지낸 아흐메드 샤피크와 역시 외무장관을 거쳐서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한 암르 무사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아흐메드 샤피크나 암르 무사의 당선은 무려 800명이 넘는 고귀한 목숨을 민주화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경우의 수였다. 둘 다 과거 독재정권의 폭압과 인권탄압의 책임의 한 축을 짊어진 독재정권의 잔당들, 즉 '펠룰(felool)'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청년층은 대체로 아불 포토우와 함딘 사바히를 지지했다. 아불 포토우는 원래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수차례 투옥을 거듭하면서도 정치민주화와 노동자들을 위해 꾸준히 헌신해온 이력으로 인해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고, 함딘 사바히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상대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길 원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유권자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어쨌든 최종 결과는 1차 투표에서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해 51.73%를 득표한 무르시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다(결선 상대인 샤피크는 48.27%를 얻었다).

이런 결과를 두고 이집트 안팎에서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좌파와 자유주의자, 청년세력들은 애초 항쟁에 소극적이었고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무슬림 형제단이 이제 와서 혁명의 과실을 쏙 빼먹었다고 탄식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랍지역을 통틀어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를 거둔 걸 제외하면) 최초로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게 된 상황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무슬림 형제단의 승리가 정말 예상 밖이라거나 그들이 혁명 과정에서 무임승차한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1928년 성직자이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무슬림 형제단은 나세르 집권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조직으로 낙인 찍혀 엄청난 탄압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시골과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제활동을 하고 자선병원을 운영해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학교를 지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형제단을 이끄는 지도부가 대부분 기업가, 의사, 변호사, 학자, 기술자 등 중상층 전문직들이었음에도 선거 때만 되면 시골과 빈민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 모았던 것도 그런 오랜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다.

또한 그들을 급진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이집트와 무슬림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화해와 단결을 이뤄야 한다는 게 창시자 하산의 가르침이었으며, 그들은 자살공격 같은 방식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9.11 테러에도 반대했고, 여성들에게 강제적으로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을 씌우려 하지도 않았다. 무슬림형제단은 간통혐의자를 돌로 쳐 죽이고 절도범의 손목을 자르는 탈레반이 아니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정권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진짜로 그들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그들이 무바라크 체제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 민주적인 절차를 어기면서 이집트 혁명에 걸었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처: http://english.ahram.org.eg 화면 캡처]

민중의 삶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흔히 지난 대선을 가리켜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라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선 투표가 치러지기 이틀 전에 최고군사위원회(SCAF)는 1월에 선출된 의회를 해산시키고 선거의 전 과정을 군이 직접 통제했다. 그 덕분에 무바라크 정권 출신 후보들의 출마를 금지한 ‘정치적 격리법(Political Isolation Law)’에도 불구하고 아흐메드 샤피크 같은 구체제 인물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두는 역시나 무바라크 시절에 임명된 판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헌법재판소(SCC)의 형식적인 법률 판단을 거쳐서 이뤄졌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은 입으로는 최고군사위원회와 사법부의 결정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군과 사법부의 횡포를 그대로 묵인하고 받아들였다.

내각 구성도 정확히 같은 맥락이었다. 무르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과거 무바라크 정권의 핵심인물이거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관료 출신들이었다. 최고군사위원회 의장이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총리에 임명된 히샴 칸딜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수자원관개부 고위 관료를 거쳐 아프리카 개발은행에서 일했던 신자유주의자였으며, 내무장관 아흐메다 가말 에딘은 항쟁 당시 시위대 탄압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내무차관이었다. 경제팀 역시도 무역산업부 장관에는 중동 최대의 민간자산회사인 시타델 캐피털(Citadel Capital)의 자회사 고주르 식품산업의 CEO 하템 살레, 투자부 장관에는 무바라크 시절 자유무역 및 투자총국 의장이었던 오사마 살레, 재무장관에는 예전 군부가 임명했던 신자유주의자 뭄타즈 알사이드를 각각 선택했다.

이런 인적 구성은 실제 정책으로도 그대로 반영됐다. 무르시가 집권 이후 맨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8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신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전기, 수도, 석유 같은 공공서비스와 식료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삭감해 현재 11퍼센트인 재정적자를 다음 회계연도까지 8.5퍼센트로 대폭 줄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보듯이 그러한 조치는 곧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극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무르시 정권의 절차적 반민주성도 헌법 제정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 세계 모든 혁명 과정에서 보면, 근본적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국민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헌법은 사회의 소수자도 아우르는 헌법, 시민적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 여성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헌법, 민간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하는 헌법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국민투표를 밀어붙여 통과시킨 헌법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이슬람법(샤리아)의 원리가 모든 입법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헌법 2조가 그대로 유지됐고, “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라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여전히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했으며, “가족을 향한 여성의 의무”라는 문구가 헌법에 직접 명시되는 한편, 군의 예산과 임무는 주로 군인들로 구성될 국방위원회가 알아서 책임지도록 했다.

노동권은 더욱 경우가 심해서, 공장 소유주와 기업 경영진의 이익은 보호하면서도 노동권은 완전히 외면했고 국회의원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 대표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는 조항도 없애 버렸다. 이런 내용을 담은 헌법 초안이 국민들의 의견과 열망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며 100명의 헌법제정위원 가운데 22명이 사퇴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집트 혁명은 못된 독재자 한 명을 쫓아내는 데 그친 ‘혁명 1.0’ 버전을 아직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이대로 끝났다고 결론짓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전체적으로 노동계급과 청년, 좌파 세력의 분위기는 혁명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활기와 전투적인 기운이 넘쳐나는 분위기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작년 11월 22일 무르시 대통령이 자신이 내린 결정은 어떠한 사법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포고령을 선포했을 당시, 불과 닷새 만에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을 다시 차지하고 결국 포고령을 철회시킨 게 가장 대표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사, 지하철 노동자, 국립병원 의사, 마할라 의류노동자들의 파업과 쟁의가 줄을 잇고 있고, 새롭게 생겨난 독립노조총연맹(EFIU)은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의 오랜 독점체제에 균열을 내며 월 200달러 최저임금제와 경영진의 임금이 최저임금의 10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임금상한제 도입을 위해 계속 투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과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의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2년 전 우리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날, 그때가 바로 본격적인 ‘혁명 2.0’의 시대가 열리는 첫날이 될 것이다.

* 주

1) ‘파업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최재훈, 2011년 4월 11일자 <금속노동자www.ilabor.org>에서 부분발췌.
2) ‘Why Mubarak Fell,' Michael Schwartz, TomDispatch.
3) 2000년부터는 ‘서반구안보협력연구소(Western Hemisphere Institute for Security Cooperation)’로 명칭이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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