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사후 리비아와 리비아 민중의 과제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4) 반봉건적·친제국주의적 질서 극복해야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다피 체제의 성립과 몰락

1969년 친영 이드리스 왕조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석유기업의 지분을 50%에서 79%로 끌어올렸다. 또한 금융, 보험, 무역 등을 국유화하고, 유휴토지와 이탈리아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촌장들의 토지확장을 금지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1970년대에는 고유가 덕분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제공하고, 대학교육과 주택에 융자정책을 폈다. 1981년에는 경제제제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소매업을 금지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저가로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고, 유럽의 아프리카계 반이민정책에도 적극 협력하였고, 서방자본을 적극 끌어 들이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로 편입되었다. 국가의 후견기능이 약화되고 국민 대다수의 빈곤과 광범위한 실업, 정보경찰에 의한 지독한 정치적 억압 등이 전 국민적 항쟁의 배경이었다.

카다피 체제는 나세르의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후 아랍지역에 성립한 전형적인 세속적 후견국가였다. 한편으론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인 독재 국가였다.

카다피는 어떠한 정치적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근대적인 관료적 행정체제를 통한 통치보다는 충성파들로 이루어진 혁명위원회와 부족적 질서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정당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질식당한 상태였다. 단지 시위를 음모하였다는 이유만으로 7년에서 20년의 가혹한 징역으로 억압하는 나라에서 시민들은 사생결단의 투쟁 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총을 든 무장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무장투쟁은 전투의 경험이 있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이나 카다피군에서 이탈한 장교들이 중심이 되고 이들은 지역과 부족을 배경으로 결집했다. 시민사회나 계급운동이 존재하지 않은 리비아에서 동원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역 혹은 지역에 기반한 부족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뿐이었고, 항쟁세력의 이러한 성격은 혁명의 왜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카다피 사후의 진행

2011년 2월 15일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 혁명은 2011년 10월 카다피가 생포되어 사살됨으로써 42년에 걸친 카다피 체제가 막을 내리고 NTC(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NTC체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확보한 국회GNC(General National Congress) 체제로 이행하였다.

벵가지에서 시작된 항쟁이 리비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카다피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카다피 이후 득세할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과 민중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카다피를 이탈한 고위관료, 동부의 부족장, 상층자본가 계급과 명망가들이 모여 임시정부NTC를 자임하였다. 그 배경에 미국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NTC는 임시정부를 자임함으로써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 항쟁의 성격을 정부군과 반란군이 무력으로만 대결하는 내전으로 바꾸고 카다피에게 중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주었다. NTC는 이처럼 낡은 지배세력이 제국주의와 결탁하고 제국주의의 이해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의 개입을 위한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였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법무장관 출신인 잘릴이 이끌던 NTC 체제는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헌법을 작성할 국회GNC가 성립되자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 선거에서 NTC의 집행위원회의 전 위원장이었던 지브릴이 이끄는 민족전선동맹(NFA: National Forces Alliance)이 48.14%의 지지로 정당 비례 80석 중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세속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알려진 지브릴은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카다피 정부에서 경제계획부와 경제발전부의 책임자로써 사유화와 자유화 정책 즉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NTC에서는 집행위원회의 대표를 맡아 프랑스의 군사개입(공습)을 이끌어 낸 주역이기도 하였다. 그가 이끄는 NFA에는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있다. 또한 리비아의 무슬림형제단인 정의건설당이 카타르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21%의 지지로 제2당이 되었다. 한편 전투적 이슬람주의 조직인 LIFG(Libyan Islamic Fighting Group) 출신의 벨하지가 이끄는 알-와탄당(Homeland Party)은 3.45%의 득표로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였다.

리비아 민중의 과제

총체적으로 볼 때 NTC에서 GNC 체제로의 변화는 친제국주의 임시정부세력이 정통성을 획득한 과정이기도 하고, 온건 이슬람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자유주의 세력과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연합하면서 국정을 이끌겠지만 그들의 친제국주의적 반민중적 속성은 변함이 없고, 아직도 수만 명의 민병대가 무장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지역적, 부족적, 종교적 질서 한마디로 계급세력의 성장과 분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질서와 세력이 엄존한 현실은 리비아 민중의 과제가 참으로 심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작년 12월 28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약 2천명이 민병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www.france24.com 화면캡처]

이미 튀니지의 알-나흐다당이나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에 대하여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와 친제국주의적 성격과 억압적 성격 때문에 반정부 투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독 리비아에서는 낡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민중의 운동이 건설되지 않고 있다.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의 과제는 먼저 국민적 통합과 국가의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리비아의 경우 특이한 점은 제국주의 군사개입이 지상군의 투입과 잔류로 이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것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물려있는 미국의 소극적 처지나 대공항을 경과하고 있는 NATO 회원국들의 처지가 지상전 개입이나 잔류를 할 만한 사정이 안 된다는 점, 리비아가 이집트나 이라크처럼 정치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이 아니라는 점, 제국주의와 알카에다와 같은 과격 이슬람에 대한 항전을 저항의 명분으로 삼은 카다피의 전략이나 외세의 개입에 대한 리비아 민중의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리비아의 내전을 수행한 반군은 벵가지의 ‘2월17일 여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과 부족적 기반하에 조직되었다. 심지어 트리폴리 점령도 서부의 진탄 부대(22,000명으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번 선거에서 지브릴을 지원하였다)와 벨하지가 이끄는 중부의 미스라타 부대가 나눠서 점령하였고, 벨하지의 트리폴리 입성에 앞서 봉기를 일으켰던 트리폴리 외곽의 줌마 지역은 지역자치위원회가 독자적인 무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무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국가가 초월적이고 독점적인 무장력의 장악에 의해 지탱된다고 할 때 리비아는 아직 국가의 형성이 안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법에 앞서 지역과 부족에 기반한 무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나 민중운동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지난 9월 11일 미국 대사와 세 명의 대사관 직원이 죽은 벵가지의 미영사관 습격사건은 여러모로 리비아의 현 상태를 가늠케 하는 사건이었다. 무장을 포기하지 않은 전투적 이슬람세력들로 이루어진 벵가지의 민병대가 미영사관을 습격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우리의 친구를 죽이지 마라”며 민병대의 거점으로 쇄도하였다. 그동안 치안이 안정되지 않은 나라에서 특히 카다피 체제에서 이탈한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직 경찰로 이루어진 민병대가 카다피 세력을 색출한다면서 벌인 약탈 만행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NC는 체제내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민병대에 대한 무장해제와 일제검색을 선언하고 민병대 해체에 나서고 있다.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을 발본할 수는 없겠지만 GNC는 무장력의 국가독점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그동안 지브릴은 카다피가 죽은 날을 기념하는 ‘10월 23일 부대’를 만들어 반군과 민병대들을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 혹은 일자리 주선과 보상 등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처럼 민병대의 무장해제와 국군과 경찰로의 편입은 리비아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지만 그 귀결은 반민중적인 권력이 행사하는 국가독점의 억압적 폭력장치로 작동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리비아의 국가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로 연방주의 책동이 있다. 리비아 항쟁이 동부에서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이 석유수입의 분배에서 소외되고 낙후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이 컸고, 그것은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의 온상으로 작동한 배경이기도 하였다. 항쟁에 앞장섰던 동부의 벵가지, 토브룩, 베르나, 바이다, 아즈다비야에서는 연방주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석유시설이 주로 동부에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지역이기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고, 리비아 전체 민중의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동부의 일부 연방주의 책동은 서부와 남부의 반발만이 아니라 NTC는 물론 새롭게 정통성을 획득한 GNC 역시 동부 주도권이 강하기 때문에 리비아의 통합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지역적인 교란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요소 외에도 리비아에는 막대한 석유수입과 관련한 분배정의 문제가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GDP의 70%, 국가예산수입의 90%를 차지하는 석유와 가스 산업이 국영이라는 점이고, 이들 시설은 내전 때에 크게 파괴되지 않고 카다피 시절의 생산고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10위의 확인 석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리비아는 국민소득이 14,000불이나 되지만 빈곤선 이하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된다. 즉 국민 모두의 복지와 발전에 써져야 할 석유수입이 무능하고 부패한 상층부에 의해 분배가 왜곡되어 있고, 석유를 비롯한 각종 이권을 둘러싸고 NTC와 GNC의 새로운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결탁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는 것 또한 리비아 민중의 과제이다.

이처럼 카다피를 몰아낸 리비아 민중에게는 지역과 부족과 종교에 기반한 반봉건적 질서와 그와 결탁한 각지의 무장세력 그리고 상층부의 친제국주의 반민중적 질서를 극복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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