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1,500명 비정규직 노동자 잔혹사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68)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이야기①

[필자주]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서맹섭 비정규직지회장을 만났습니다. 송전탑 고공농성 중인 복기성 수석부지회장을 포함한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현재 평택역과 대한문, 송전탑 고공농성장에서 투쟁하고 있다. 현재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및 체불임금 지급 소송(불법파견 소송)’ 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투쟁의 중요한 주체인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의 활동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또, 1월 26일에 진행되는 ‘희망과 연대의 날-쌍용차로 떠나는 희망버스’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쌍용자동차 투쟁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1월 20일 일요일 오후 평택역 앞 천막 농성장에서 이 공간의 공식적인 책임자인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을 만났다. 서지회장은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 천막을 지키면서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고, 쌍용자동차 문제를 알린다. 242일 간의 천막농성 기간 동안 1만 4천 명의 시민이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서명을 해주었다. 또, <의자놀이> 책 9백 권 가량이 판매 되었으며, 시민들이 투쟁기금도 꾸준하게 넣어주고 있다.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됐다고 뉴스에서 봤는데, 왜 아직도 해요?”
“무급자만 복귀하는 거구요. 그것도 회사가 임금소송 취하하라고 해서 아직 해결이 다 안됐어요.”
“말씀 좀 묻겠는데요. 안정리 20번 버스 탈라면 어디로 가야 돼요?”
“20번이요? 여기 건너셔가지고요. 저 가운데 골목 말고 좌측 골목으로 가시면 정류장이 있어요.”


  평택역 앞 천막농성장

평택역 앞을 오고가는 시민들과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국정조사의 필요성과 쌍용차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일, 때로는 길이나 교통편을 묻는 시민들에게 안내를 하는 일도 서맹섭 씨가 하고 있는 일이다.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투쟁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거나 송전탑 농성장에 사안이 발생하면 지역 시민단체와 지역 민주노총과 소통하고 조직해서 대응하는 것도 그가 하고 있는 일중 하나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86일 굴뚝농성의 주인공이기도 한 서맹섭 씨는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비대위원 활동도 하고 있다. 서맹섭 씨는 인터뷰 전에 다음날 아침 선전전 때 사용할 유인물을 복사해갖고 왔다고 했다. 다음날인 21일 오전에는 평택역을 포함한 수도권 주요 전철역에서 쌍용차 사측과 기업노조(위원장 김규한)가 국정조사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겠다고 하여 이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서맹섭 지회장을 포함하여 총 4명의 쌍용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쌍용차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생계활동을 하고 있는 4명의 조합원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조합원이 있다. 평택공장 앞 송전탑에는 비정규직지회 복기성 수석부지회장이 1월 20일 현재 62일째 문기주·한상균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송전탑 밑에서는 비정규직지회 한윤수 사무국장이 고공농성 조합원들을 지원하며 투쟁하고 있고, 서울 대한문에는 유제선 조직부장이 분향소를 지키면서 투쟁하고 있다. 비록 인원은 많지 않지만, 이들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등 큰 틀에서 쌍용차 투쟁을 함께 하면서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고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어도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당시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 된 노동자 숫자가 정규직 2,646명이 아니라 비정규직 350명을 포함한 3천명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왼쪽 문은 정규직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인 서맹섭 씨는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을 돕다가 농고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와 배추를 심고, 소를 키우고, 트랙터와 경운기를 몰았다.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후에는 경찰관의 꿈을 키우며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제대 후에 3번 도전했다가 떨어지자 2000년 쌍용자동차에 다니던 친구들의 권유로 입사한 곳이 평택 쌍용자동차 하청업체였다. 1년 근무하고, 평택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역시 친구들의 권유로 다시 쌍용차 하청업체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하청업체인 동산기업으로 들어왔다가 2005년에 영일기업으로 옮긴 후에 2009년 5월 해고될 때까지 그곳 소속으로 있었다. 근로계약서는 입사 할 때 쓴 이후 거의 쓴 기억이 없다. 업체가 바뀌어도 근속과 고용은 자동승계 되었다.

차체2팀에 들어간 서맹섭 씨는 CO2 용접이나 쇠를 깎는 사상 조립 작업(그라인딩 작업), 도아와 휀다(펜더) 조립 등의 일을 했다. 서맹섭 씨는 입사 초기 무소 생산을 잠깐 하다가 근무기간 내내 거의 로디우스 만드는 부서에 있었다. 서씨와 직장이 가장 먼저 그 일을 배웠고, 나중에 온 정규직들에게 서씨가 일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서씨는 10명 내외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된 차체2팀 로디우스 3직에서 근무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직 안에서 일을 같이 배우고, 로테이션하면서 근무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되어 1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도아 좌우를 나누어서 볼트작업 등을 했다. 왼쪽 문은 정규직이 달고,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이 달기도 했다. 다만, 용접 일은 옷에 구멍이 난다는 이유로 정규직들이 기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비정규직이 했다.

2005년 노동부 ‘사내 하도급 업체 특별 지도점검’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12개 하청업체 중에 동산기업과 영일기업 등 4개 공정 44명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이 났고, 2006년 각각 벌금 백만 원 씩 약식명령 청구가 진행되었다. 당시, 서맹섭 씨가 있던 쌍용차 불법파견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부 조사를 받기도 했었다.

“평택에서 제일 큰 대공장이니까 아무래도 임금이나 복지 면에서 다른 데보다 좋을 거라 생각했었죠. 실질적으로 해보니까 정 반대였어요. 한번 몸 닿으니까 딴 데 가서 일하는 게 만만치가 않아서 그냥 견뎌본 건데. 임금은 적어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했지.”

대통령상 받은 최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을 꿈꾸다

서맹섭 씨는 7년 동안 월차를 두 개밖에 쓰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웃도는 금액이었다. 입사 초기 주야 2교대를 할 때, 가장 많이 받아본 임금이 170만원이었다. 상여금 600%를 12개월로 나눈 금액을 포함해서 나온 금액이었는데, 2007년 물량 감소로 주간 작업만 하게 되면서 세금을 떼고 110~120만 원 정도 받았다. 비정규직의 경우 호봉제가 있긴 하지만, 호봉 간 차이가 시급 25원(1일 8시간 200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임금 차이에 영향력이 거의 없다. 5년 다닌 사람이나 10년 다닌 사람이나 임금 차이가 거의 없는 셈이다. 늦게 입사한 사람이 잔업 특근을 많이 하면 오래 다닌 사람보다 임금이 많아지기도 한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2005년에 정규직 노동자들하고 같이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비용 절감 사례를 발표하는 대회였는데, 쌍용차 생산과장이 파워포인트를 띄워주고 저랑 직장이 그거 보면서 발표를 했어요.”

서맹섭 씨는 2005년 9월, ‘전국품질분임조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경험도 있다. 상패는 정규직 직장이 받고, 메달은 서맹섭 씨가 받았다. 같이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정규직들은 2호봉 승급에 특근이 달리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회식 한번이 다였다. 하지만, 수상으로 플러스된 고과점수 덕분에 정규직을 뽑으면 일순위로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꿈을 안고 그는 5년 동안 열심히 일만 했다. 2009년 굴뚝농성 재판이 굴뚝에 지붕이 없어 주거침입죄 성립이 안 되면서 2심까지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그게 그 상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며 서맹섭 씨가 웃는다. 경찰조사 받을 때 상 받은 거 있냐고 묻길래 노무현 대통령상 받았다고 대답했었단다.

5년 동안 천오백 명 비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노조 설립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서맹섭 씨는 정규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5월 해고가 되었다. 서씨는 ‘잘 하면 해고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쌍용차에서 10년 가까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못해도 해고되고 잘해도 해고가 되니 중간만 가야 된다’는 그거 하나 배웠단다.

서지회장이 입사할 당시, 쌍용차에는 1,7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었다. 5년 동안 1,500명의 노동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인 강제해고로 쫓겨났다. 2004년도에 5백 명, 2006년에 5백 명이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2008년에 정규직 노동조합의 전환배치 합의로 인해 35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쫓겨났다. 그리고 2009년 투쟁이 진행되던 중에 알게 모르게 백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소리도 없이 쫓겨났다.

“2008년 8월에 전환배치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비정규직들이 일하던 자리에 정규직들이 와서 일을 한다는 거에요. 그때 합의서가 두 번 나왔어요. 한번은 비정규직 희망퇴직을 안 받고 휴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주일 만에 합의서가 바뀌어버린 거야. 위로금 4개월 분 줄 테니까 350명 이거 받고 나가라는 거야.”

2008년 10월 말, 당시 쌍용자동차지부 1기 집행부(지부장 정일권)는 사측과 비정규직 347명에 대한 휴업을 전제로 하는 전환배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비정규직 350명에 대한 희망퇴직으로 사측과 합의 하는 일이 발생했다.

  2008년 11월 4일, 쌍용차 정규직 전환배치에 따른 비정규직 희망퇴직 관련 노사합의서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쌍용자동차 사측은 하청업체에 할당을 주어 강제적인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사측은 ‘지금 희망퇴직을 하면 나중에 사람 뽑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등의 회유와 협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했다. 지저분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 했던 일을 기피했던 정규직들은 2008년 전환배치 당시, “여기 안가면 잘린다. 잘려나갈래? 아니면 여기 갈래?”하는 상황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들이 하던 힘든 공정에 오게 되고, 비정규직들은 쫓겨난다. 서맹섭 씨가 하던 용접 일도 그가 쫓겨나면서 정규직이 와서 하게 된다.

이렇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쫓겨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감시 속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2008년 10월 22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참 어렵게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초동주체 3명이 이름 걸고 띄웠어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정규직이랑 노무팀 반발을 통제하고 엄호해 주면서 많이 도와줬죠. 그래서 무사히 띄울 수가 있었어요.”

  2008년 10월 23일,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설립 보고대회.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전체 64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 150명이 가입을 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강제휴업·희망퇴직·전환배치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을 했지만, 사측은 업체 강제휴업을 했다. 그리고 희망퇴직에 동의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해고통보를 하기 시작했다. 서맹섭 지회장은 2009년 5월 해고자가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투쟁

서맹섭 지회장은 그 당시에 정규직들이 한 번 더 휴업을 나가더라도 힘을 합쳐서 전환배치를 막았어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비정규직을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한 방패로 생각하는 정규직들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번 밀리니까 회사는 걷잡을 수 없이 치고 들어왔다.

“2008년도에 정규직 전환배치를 막아냈어야 돼. 그게 시발점이 된 거 아닌가. 인건비 싼 비정규직 다 쫓아내니까 그 다음에 쫓아낼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그때 우리가 한참 외쳤던 게 ‘우리 나가면 당신들도 나간다’ 였어요. 정규직도 칼바람 들어온다. 우리 쫓아내면 안 된다. 전환배치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싸워왔던 건데 못 막아 버린 거지.”

  2009년 4월, 회사 내에서 중식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는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2008년 12월 초에 한상균 지부장이 당선되자마자 사측은 법정관리 신청을 했고, 그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조합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잠을 자면서 투쟁을 했다. 당시 한상균 지부장 집행부는 일자리나누기(5+5와 3조 2교대)와 비정규직 고용안정기금 12억 노동조합 출연 등 정리해고 없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 수 있는 자구책을 제시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리해고를 진행하였다. 비정규직지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이 투쟁에 흔쾌히 동참했다.

86일 간의 굴뚝농성과 휴지조각이 된 8.6 합의

2009년 5월 13일, 서맹섭 지회장(당시 부지회장)은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쌍용자동차 내에 있는 굴뚝에 올라가 86일 간의 고공농성을 한다.

“저는 비정규직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 굴뚝에 올라간 거에요. 살기 위해서 올라간 거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쫓겨났던 게 얼마나 억울해요. ‘여기 누가 온다니까 너 나가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열심히 일만 했던 사람들인데... 또, 분사를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 안 된다는 요구도 했죠.”

  2009년 7월, 86일 간의 고공농성이 진행된 쌍용차 굴뚝

굴뚝에 처음 올라갈 때, 여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올라갔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왜 내려왔나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때 야무지게 해결했으면 또 다른 철탑에 올라갔겠나 싶어서다. 헬기소리와 쏟아지는 최루액을 견디며 86일을 버틴 경험이 있는 그는 지금 철탑에 올라가 있는 조합원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고공농성자들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 할 수 없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목숨 걸고 올라가 있는 분들이에요.”

굴뚝농성 50일 즈음부터 서 씨는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속이 다 망가졌다. 2009년 8.6합의가 이루어지고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 후에 병원에 입원을 했던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상하지 못했다. 8.6합의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9명에 대해 10월 1일자로 복직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다. 10월 1일자로 복귀시키겠다며 9월에 비정규직 복직대상자 명단까지 요구했던 사측은 10월에 면접을 보라는 요구를 했다. 결과는 전원 불합격이었다. 면접 과정에서 사측은 “도장반에 들어가서 도장똥 제거하다가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등의 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 결과 연배가 있는 여성노동자들이 큰 상처를 받고 복직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17명이었던 복직 대상자는 8명으로 줄었고, 이 중 생계 나간 조합원을 제외하고 현재 4명의 조합원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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