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언론교과서

[낡은책] 지구 특파원 (박실, 순천당, 1980.4.)

이 책 <지구특파원>은 기자라면 한번쯤 읽어야 한다. 언론지망생도 마찬가지다. 저자 박실은 193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서울대를 나와 1963년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해 70년대 한국기자협회장을 지냈다. 이 책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요란했던 언론자유투쟁인 1974년 동아일보 투쟁 직전에 <취재전선>이란 이름으로 첫 출간된 뒤 1980년에 <지구 특파원>으로 재출간됐다. ‘세계의 대사건을 파헤친 취재 비화(秘話)’라는 부제를 달았다.

박실은 이후 1984년 신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해 1985년 12대 총선에 서울 동작에서 당선돼 14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실은 80년 광주에 이은 김대중 내란음모 때 수배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엄청난 가족사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언론인 고 리영희 선생은 이 책 추천사에서 베트남 전쟁의 미라이 학살(시모어 허시 기자 보도) 부분이 특히 교훈적이라고 설명했다. 리영희 선생은 “우리 언론이 한국의 베트남전쟁 군사개입 8년 동안 수많은 특파원을 파견했지만 한 사람의 ‘시모어 허시’ 기자도 낳지 못했다. 맹목적 애국론에 빠져 무작정 무용담만 양산해 왔던 한국 기자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진지한 기자들을 통해 미국 신문들은 독자와 국가를 위한 진실한 서비스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리영희 선생이 극찬한 시모어 허시 기자의 미라이 학살사건은 1968년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한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며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사건을 추적보도한 것을 말한다. 허시 기자는 1년 뒤 군법회의에 불구속기소된 1단짜리 단신에 주목해 사건의 실체를 캐기 위해 당시 현장에 있었다가 제대한 군인 수 십명을 미국 곳곳으로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끝에 사건 당시 발포책임자였던 켈리 중위까지 만나 사건의 실체를 폭로했다. 허시 기자는 이후에도 미국의 무기밀거래와 야비한 생화학전을 폭로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허시 기자는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아직 잡지 <뉴요커>의 현업기자로 세계적인 탐사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작가 찰스 디킨스는 20대 내내 신문기자였다. 디킨스 기자는 마감시간에 대기 위해 손바닥에 기사를 메모해 가면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런던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뉴욕 타임즈의 ‘레스턴’ 기자도 1970년대 단 한 줄의 기사를 쓰기 위해 30명에게 전화로 물어보고 다녔다. 마르크스도 <신라인신문> 기자였고, 레닌도 <이스크라> 기자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가는 곳마다 신문을 만들어 보도했다. <로빈슨 크루소>를 쓴 다니엘 데포도, <톰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도 모두 기자였다.

1933년 2월 27일 밤 베를린 시내 한복판의 제국의회 건물이 불탔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히틀러가 반대파가 많은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의사당을 불태웠다는 사실을 배웠지만 당시 현장에서 취재한 에드가 안셀 마우러 기자는 나치의 협박 속에서 진실을 캐기 위해 목숨 건 사투를 벌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뻔한 보도자료의 뒷면(이면지)도 꼼꼼하게 보면 수많은 특종이 숨어 있다. 낙종의 뒤를 캐다가 새로운 특종을 터뜨리기도 한다. 사관(史官) 같은 저항정신으로 무장한 데이비드 핼버스탬과 닐 시한 기자는 베트남전의 수많은 무용담을 쏟아내는 미국 기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전쟁의 추악한 맨얼굴을 정면으로 그려냈다. 석유재벌 록펠러의 불법을 파헤친 여기자 아이다 타벨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꼭 확인하면서 수많은 헛발질 끝에 재벌의 맨얼굴에 접근했다.

타벨 기자의 특종은 미국에서 ‘독점금지법’ 제정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 법은 부족하지만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지금도 대기업의 횡포에 민중을 보호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삼성이 삼성봉사회와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처럼 타벨의 폭로로 록펠러는 자선기금을 마련하고 사회봉사 활동에 마지못해 나섰다.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인 외국 특파원 잭 런던은 1904년 러일전쟁의 포화 속에 일본 정부를 피해 네 번의 밀항 끝에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일본 군부는 잭 런던의 조선 취재를 막기 위해 수많은 게이샤와 술을 동원했지만 그의 종군을 막지 못했다. 이후 소설 <강철군화>를 써 소설가가 된 잭 런던은 러일전쟁의 지상전 최대 격전지였던 평양에 도착해 양국의 치열한 전투와 조선 백성들의 처참한 삶을 보도했다.

최초의 외국 특파원 ‘잭 런던’

20세기 들어서 우리나라를 최초로 찾아온 기자는 ‘잭 런던’이란 젊은 기자였다. 그는 1904-1905년 조선 땅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을 취재했다. 잭 런던은 우리에게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강철군화>를 지은 소설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잭 런던은 부두 노동자, 열차 화부, 제분공장 노동자 등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성장한 사회주의 정의파였다. 28세가 된 청년 소설가 잭 런던은 허스트 계열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종군기자로 일본으로 왔다. 1904년 1월24일 동경에 도착했을 때 일본은 기자들의 종군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외국 기자들을 게이샤와 술로 녹여 버렸다.

1904년 1월 하순 잭 런던은 동경을 살짝 빠져나와 고베행 열차에 올랐다. 백방으로 주선해 부산행 배표를 샀지만 출항 직전 일본 군인에게 그 배는 징발당하고 말았다. 잭은 작은 통통배를 하나 얻어 타고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소형 선박에 간신히 닿아 부산으로 밀항했다. 부산에 도착한 잭 런던은 다시 제물포행 배를 갈아탔는데 이 배는 목포에서 일본군에게 다시 징발되고 말았다. 다시 잭은 조선인에게 작은 범선 한척을 구해 조선 선원 3명을 고용해 제물포를 향해 출발했다. 잭 런던은 2월의 성난 서해바다를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에 표현했다. “파도에 키는 부러져 달아나고 살을 에는 바람에 돛대마저 꺾였다. 다행히 군산에 닿아 수리하고 다시 출발했다.” 일주일 만에 제물포에 도착한 잭은 미국인 기자로 서울에 첫 발을 디뎠다. 제물포에서 서울을 거쳐 말을 타고 육로로 평양에 도착했다.

잭 런던은 1904년 3월5일 당시 전쟁의 주무대였던 평양에 도착, 러일 양국군의 전투를 최초로 취재해 타전했다. “러시아 코사크 기병은 거침없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지 내려왔다.” 잭 런던의 활약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동경에 머물던 56명의 외국특파원의 종군을 허가했다. 영국기자 33명, 미국기자 18명, 독일과 프랑스가 각 2명, 이탈리아 기자 1명이었다.

일본 군부는 압록강을 향해 진군하던 일본육군 제1군사령부에서 종군하던 잭 런던을 결국 체포해 서울로 압송해 버렸다. 잭은 러일전쟁을 치른 뒤 귀국해 계속 기자로 활약했다. 1906년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훌륭하게 취재해 필명을 날렸다.

퓰리처 상 1호 스워프 기자

<뉴욕 월드> 발행인 퓰리처는 만년에 유언으로 컬럼비아대 신문대학원을 설립하고 퓰리처상 기금을 마련했다. 그가 죽은 6년 뒤 1917년부터 시상했다. 첫 수상자는 ‘허버트 베이어드 스워프’ 기자다. 퓰리처가 키운 <뉴욕 월드>의 편집국장을 지낸 스워프는 1917년 1차 대전에 종군해 <독일 전선에서>라는 기사로 최초의 퓰리처상을 받았다. 스워프는 독일 영국 유태계 피가 뒤섞인 혼혈아였다.

스워프 기자는 신참 기자시절 간부들이 내놓은 골칫거리였다. 마감시간도 맞추지 않는 한심한 뜨내기였다. 그런 그가 나중엔 윌슨 대통령과 말을 터놓은 사이가 됐고 큐 클럭스 클랜(KKK)단 비밀조직을 파헤쳤고, 1차 대전 직후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을 사전에 특종했다. 이는 남달리 끈질긴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발로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1912년 단신으로 경찰과 은밀히 공모해 재미를 보던 지하 도박단의 범죄를 파헤쳐 뉴욕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베커 경사 사건>으로 알려진 이 기사는 부패한 경찰조직과 범죄단의 은밀한 내통과정과 금전수수 등 암흑가의 일면을 예리하게 파헤쳐 월드지의 가치를 올렸다. 또 스워프는 남부에서 횡행했던 백인우월주의단체 KKK단이 북부 뉴 일글런드 지방까지 침투해 조직을 확대시킨 사실도 특종했다. 스워프는 KKK단의 습격에 대비 모두 권총으로 무장한 채 취재했다.

스워프는 베르사이유 강좌조약 문안을 사전 입수해 보도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차 대전은 970만명을 죽인 전쟁이었다. 그는 윌슨 대통령에게 끈질기게 붙어 다니며 마침내 최종 손질을 마친 조약문안 사본을 입수했다. 그는 윌슨 대통령이 미국안에서 공화당으로부터 ‘허구에 찬 평과’라는 호돈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이용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 신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다. 그리고선 줄기차게 강화회담 주변의 기사를 소상히 전했다. 월슨 대통령은 스워프의 끈질긴 취재에 마음이 끌려 그가 집요하게 요청한 타결안의 대강을 일러줬다. 대통령은 스워프에게 “내가 외교문서를 사전에 차마 누설할 순 없다. 다만 오늘 저녁 5시반쯤 내 보좌관인 아후스 대령 방에 들어가 보라”고 넌지시 일렀다. 스워프는 만년에 수백만 달러의 재산을 모아 경마 도박 투기사업에 손을 댔지만 망하고 불행하기 생을 마감했다.

석유왕 록펠러를 무너뜨린 여기자

70년대 한국 국회에서 원유값 인상을 두고 정치적 발언을 높이고 있지만 어떤 기자도 석유회사들의 폭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치지 못하고 신문들도 이들 정치인들의 정치적 발언과 관리들의 상투적 답변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거나 녹음기처럼 그대로 옮겨 보도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아이다 타벨’이란 여기자는 달랐다. 민중의 투사를 자처한 이 여기자는 대규모 기업합병과 독점의 어두운 뒷이야기를 폭로했다. 석유 독점을 꾀했던 록펠러의 음모를 파헤친 여기자 아이다 타벨의 활동은 눈부셨다. 타벨의 활동은 대기업과 독점을 위한 기업 합병을 막고, 미국에서 독과점 규제법안을 만드는데 공헌했다.

타벨 기자 때문에 사회적 지탄을 받은 록펠러 가문은 ‘아이비 리’라는 선전 전문가를 고용해 수백만개의 자료집을 발간,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려 발버둥쳤고 마침내 자선공공단체인 록펠러 기금까지 만들어야 했다.

타벨은 미국에서 유전이 처음 발견된 펜실베니아주의 농촌에서 자랐다. 록펠러의 석유독점 공작이 전성을 이루던 때 작은 석유개발업자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파산했다. 타벨은 작가 마크 트웨인을 통해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중견 사원인 헨리 로저스를 소개받았다. 타벨과 로저스의 밀회가 2년 동안 지속됐다. 타벨은 록펠러와 사소한 다툼라도 있었다는 사람들은 모두 수소문해 만났다. 이들이 제소한 재판기록, 주의회와 워싱턴 국회의사당의 자료들도 가능한 모두 수집했다. 록펠러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서 처음에 타벨의 도전을 침묵 내지는 냉소로 답했다. 타벨은 록펠러가 성공한 열쇠가 바로 철도회사들과 짜고 수송비 조작을 통한 농간인 점을 간파앴다.

타벨의 추적기사가 보도되자 그 반향은 대단했다. 기사 실린 매클류어스 잡지의 발행부수는 치솟았다. 당초 3회분 계획을 늘려 19회까지 이어졌다. 독점과 기업합병을 금지하는 입법활동까지 벌어졌다.

뉴욕 출신인 록펠러는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주로 옮겨 그곳에서 청년을 보냈다. 칠면조 양계사업에 착수해 돈놀이에 재주를 보였다. 처음엔 소규모 석유장사에 손댔다. 이후 수송수단 장악이 중요함을 알았다. 이후 록펠러는 남부개발회사라는 모호한 회사를 만들어 철도업자들과 석유수송 독점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군소업자들의 석유수송량과 요금을 조작하기 시작해 자신의 스탠다드 회사에 병합시켰다. 주식도 조작해 록펠러는 자기 회사의 주식을 증식하는 방법으로 군소업자들을 흡수했다. 결국 클리블랜드 일대 26개 정유회사 대부분을 스탠다느 석유회사가 병합했다.

록펠러는 철저한 비밀주에 따라 종사원들에게 그만큼 대우를 향상시켜 기밀유지에 만전을 기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록펠러는 자선사업에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썼다. 타벨 기자의 보도로 인근 유전지대와 클리블랜드의 시민들은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록펠러의 반격에 대해 타벨 기자는 “공갈로 성취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이제 설득으로 가능하게 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의사당 화재 수수께끼 푼 기자

1933년 2월27일 밤 10시 베를린 한복판의 라이히스타크(제국의회)가 불탔다. 나치의 3월 총선을 위한 흉계가 시작됐다. 당시 정부 당국은 공산분자들의 소행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화재현장에서 유일한 용의자인 스무살의 네덜란드 출신 공산주의자 루베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나치 정권은 그해 가을 공포한 신문법으로 본격 언론탄압과 조작을 시작했다. 히틀러가 반대파가 많은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권을 확립하기 위해 의사당을 불태웠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려졌다.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에드가 안셀 마우러 기자는 당시 나치의 협박을 받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선 유태계 대신문 프랑크푸르트 짜이퉁만이 기술적으로 당국의 발표에 도전했다. 프랑크푸르트 짜이퉁은 1933년 3월1일자 길다란 1면 기사에서 독일 당국이 발표한 의사당 화재의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보도하면서 딱 세줄을 어렴풋하게 비쳤다. “체포된 청년이 혼자 이 모든 사건을 치렀다고 믿기 어렵다. 화재 현장에는 괴벨스 박사와 황태자 파펜 부수상 등 많은 각료들이 나와 소방작업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마우러 기자는 나치 당국의 불만을 사 추방당하는 최초의 기자가 됐다. 가장 예리한 통찰력으로 화재의 수수께끼를 푼 기자는 런던 타임즈의 존 건서 기자였다. 화재 당시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제국의회 의장인 괴링이 살던 의장공관과 의사당을 연결하는 지하통로로 몰래 잠입한 히틀러의 부하들이 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방화를 공산당에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휴전’ 특종한 뉴욕타임즈 레스턴

기자는 취재원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그의 약점,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취재원에게 절대 과도한 주문을 하지 않고, 가능한 단편적인 정보를 얻어, 정신적 부담을 주지 않고 뉴스를 제공해 준 최후의 결정적인 소스가 자신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기자는 여러 취재원으로부터 뽑아낸 단편 정보를 종합해 훌륭한 뉴스를 만드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레스턴은 스코틀랜드의 가난하고 엄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기 대부분을 오하이오주에서 보냈다. 레스턴은 신문배달, 지방 골프장에서 캐디 노릇도 했다. 래스턴이 오하이오의 스프링필드 데일리 뉴스에 취직했을때 스포츠나 취재하는 신참이었다. 이후 일리노이 대학동창인 미모의 샐리 풀턴과 결혼했다. 풀턴도 기자였는데 레스턴은 아내를 따라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레스턴은 1939년 뉴욕타임즈 런던지국에 입사했다.

뉴욕 타임즈의 제임스 레스턴 기자는 바로 이런 뉴스 수집 기술을 가장 잘 구사했다.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여름 뉴욕 타임즈의 런던 지국장이던 레스턴은 워싱턴으로 귀환해 워싱턴 외곽의 덤버튼 오크스 회의를 취재했다. 이 회의는 유엔 창설의 기초가 됐다. 레스턴은 이 회의의 진전 사항과 비밀문서를 연일 특종 보도했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자유중국) 등 연합국 대표들은 1944년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동안 여기서 비밀회담을 갖고 전후 문제를 논의했다. 일체 기자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스턴은 회의에는 늘 불평불만이 많은 약자가 할 말이 많다는 사실에 유의해 곧 중화민국 대표단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끈질기게 접근해 설득했다. 레스턴은 약한 발언권을 가진 중국의 불만을 잘 간파했다. 레스턴의 정확한 보도에 미 국무성은 뉴욕 타임즈 사장에게까지 보도 금지를 요청했다. 미 국무성은 FBI를 동원해 레스턴 기자와 뉴욕타임즈를 내사해 취재원을 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레스턴은 그만큼 취재원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성급한 풋내기 기자들이 어떤 사실을 알면 무조건 전부 아는 그대로 모두 다 보도해 버려서 소스를 제공한 취재원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레스턴은 입수한 정보를 조금씩 서서히 우려먹는 식으로 적절한 해설과 전망 등을 종합해 정확하기 기사화해 나갔기에 소스를 제공한 취재원이 안심할 수 있었다. 취재원이 하고 싶은 말을 왜곡하거나 대폭 허풍을 떨거나 침소봉대하지 않고 차분히 정확하게 보도했기 때문에 취재원인 중국 대표단은 안심하고 더 깊은 정보를 레스턴에게 샅샅이 흘려주었다.

레스턴은 주로 전화로 한 취재원에게 단편적 사실을 뽑아내고 다른 취재원에게 또 다른 단편 정보를 캐내 이 정보들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다시 또 다른 취재원에게 더 좋은 그리고 완벽한 뉴스를 뽑아냈다. 레스턴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채’와 유도 심문에도 정통했다. 그는 인터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최후에 한다”는 점에 충실했다. 때문에 항상 관료드은 “내가 얘기해 줬지만 그 친구는 이미 다 알고 있던 걸 뭐.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에게 얘기해 줬을 거야”라는 식의 태도를 갖게 했다.

래스턴이 1951년 한국전쟁의 휴전 계획을 특종보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스턴은 한국에 파병한 나라의 각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미국이 휴전 협상에 매우 못다땅해 하며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나 타진해 봤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잘못됐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일이 진행중이었다. 휴전계획은 특종은 당시 불만이 많았던 미국 국무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레스턴은 심심하면 각국 대사관을 순방했다. 국무성 비밀전문의 단편을 엿듣고 당시 국무장관 대리였던 허버트 후버를 찾아가 마치 비밀전문 내용을 모조리 아는 것처럼 호통을 쳐서 후보로 하여금 교섭 사항을 실토하게 했다. 사건의 당사자보다는 방관자가 더 잘 털어놓는다는 진리도 깨달았다. 가령 A의 업무내용을 B에게 물어 힌트를 얻고 다시 A에게 확인한 뒤, B의 일을 A나 C에게 물어보는 식이다.

뉴욕타임스는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의 픽스만 침입사실을 미리 알았다. 뉴욕타임즈의 태드 슐리록 기자의 특종을 했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침묵하는 데 동의했다. 반(反) 카스트로 쿠바 피난민으로 조직된 무장병력을 픽스만에 상륙시키려던 CIA의 계획은 완전 실패하고 대부분의 요원이 피살됐다. 케네디는 뒷날 뉴욕타임즈에 보도통제를 요청한 것을 후회했다. 당시 레스턴은 뉴욕타임스 편집장으로 침묵에 동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보도자료 이면에서 찾아낸 특종

특종은 우연히 얻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을 세밀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메모하고 결정적인 계기를 잡아 보도했을 때 얻어진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대 초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피커 키스 기자는 공산측에 억류된 미군 포로의 숫자를 처음으로 특종보도했다. 키스 기자는 쓸쓸하고 한산한 오후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등사된 유인물 한 뭉치를 뒤적이고 있었다. 당시 유엔 총회가 파리에서 열렸기에 대부분 기자들이 파리로 가거나 남은 기자들은 기자실에서 포커나 치고 있었다. 키스 기자는 평소 습관 그대로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뻔한 보도자료 뭉치를 세심히 검토했다.

키스가 그날 유심히 살핀 보도자료 뒷면엔 주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본부에 보낸 보고서 사본이 끼여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 보고서에서 당시 주요 관심사였던 미군 포로가 약 8천명으로 공산군에 억류돼 있음을 적었다. 키스 기자는 뭉치를 조용히 들고 나와 <리지웨이, 미군 포로 8천명 공산군 억류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는 뉴욕의 한 모퉁이에서 동경, 한국, 파리 유엔총회장, 워싱턴 정가 등에서 뛰고 있는 군사외교 기자들을 누르고 특종기사를 썼다. 유엔 본부에서 포커판을 벌이던 동료기자들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기사를 고스란히 베껴 썼거나 헤럴드 크리뷴을 인용보도한 통신기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나 접근할 수 있는 보도자료나 발표문, 정부에서 보낸 홍보자료로도 훌륭한 기사를 써낸 기자들이 많다.

다르게 생각하기, 전범 아이히만 공판

히틀러의 악명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프의 유태인 담당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 대전후 아르헨티나에 숨었다가 이스라엘 정보국에 잡혀 재판을 받았다. 캐롤라이나 이스라엘라이트의 해리 골든 기자는 아이히만의 조상을 폭로하는 극히 선정적이고 감상적인 기사에 신물이 나 보다 본질적으로 문제를 다른 각도로 돌려 보았다.

해리 골든 기자는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은밀히 체포해 강제로 납치해 와 이스라엘에서 재판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지적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나치 잔당들에게 동정적이었고, 자국 영토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정보국의 활동을 중대한 주권 침해로 여겨 아이히만의 인도를 강력 요구했다. 아르헨티나는 이 문제를 유엔에도 제기했다. 뉴욕타임즈는 아이히만의 재판권을 서독에 넘기는 편이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낙종의 뒤를 캐면 특종이 온다

일단 마무리된 것 같이 보이는 사건이라도 이를 눈여겨보고 추적하면 첫 사건 발생 때 못지않은 훌륭한 기사를 쓸 수도 있다. 꼼꼼한 기자는 낙종의 쓰라림을 맛본 뒤 같은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 새로운 특종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65년 5월 뉴욕의 일간지들은 연사흘 동안 엔리크 네그론이라는 브롱스 구역의 한 식품점 주인이 당한 불운을 크게 보도했다. 흑인인 이 주인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금전을 갈취해 가는 흑인 깡패들에 시달려 왔다. 주인은 경찰에 제보했고 범인들은 대부분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나 남은 흑인 깡패들이 다시 상점을 습격해 주인은 등에 칼을 맞고 입원했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사흘 동안 요란하게 보도한 뒤 침묵했다.

AP통신의 랜 캐폰 편집장은 이 사건을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가 얼마 뒤 다시 이 주인의 근황을 알아봤다. 식품점 주인은 경찰을 싫어하는 인근 라틴계 주민들과 흑인들로부터 백인 경찰과 손잡고 같은 유색인종을 배반했다는 낙인이 찍혀 철저하게 배척받고 있었다. 아무도 말도 걸지 않고, 손님들도 뚝 끊어졌다. 결국 5천 달러에 산 식품점을 단돈 4백달러에 되팔아야 했다. 아내는 화병에 드러누웠다. AP는 이 내용을 잘 정리해 보도했다. 기사가 나가자 주인에게 50군데의 회사가 취직 알선을 제의하고 후원금을 보내왔다.

사관(史觀)으로 무장한 베트남전 삼총사

월남전 초기인 63-64년, 뉴욕 타임즈의 데이비드 핼버스탬, AP통신의 말콤 브라운, UPI의 닐 시한 기자를 두고 사람들은 삼총사라 부른다. 이들 30대의 젊은 기자들은 모두 디엠 정권의 실정을 파헤쳐 월남전의 장래를 비판했고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시종 냉소적으로 비판해 미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다.

말콤 브라운 기자는 매일매일의 일상사보다 그 배경의 숨은 사실을 파악해야 전쟁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다고 봤다. 브라운은 62년 2월16일부터 3월2일까지 월남 정글에서 벌어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1차 회의 소식을 현장 취재해 특종을 했다. 브르란트 러셀은 뒤에 반전주의 선봉에 선 책 <월남에서의 전범>에서 “미 정부 관계기관의 압력으로 브라운의 특종기사는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기자는 55년 하버드를 나온 뒤 시골 신문에 있다가 뉴욕타임즈에 발탁된 뒤 콩고를 거쳐 62년 사이공에 부임했다. 핼버스탬은 부패한 디엠 정권의 장래와 미국의 무작정한 원조정책을 실랄히 비판하는 기사를 꾸준히 송고했다. 케네디는 뉴욕타임즈에 핼버스탬의 소환을 요청하기도 했다.

71년 국방서 기밀문서 사건으로 유명해진 닐 시한 기자도 62년 월남에서 취재했다. 시한도 디엠 정권의 부패상과 전의를 상실한 월남군의 어두운 면을 보도했다.

미국은 초기에 월남전 개입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디엠 정부를 극구 옹호하고 평정계획과 민병대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선전을 하기에 주력했다. 냉전 사고에 젖었던 보수파 신문과 기자들은 미국 정부의 이런 정책 방향을 지지했다. 이들 보수 언론인들은 3명의 반전파 기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집중시켰다. 매기 히긴스 기자 등이 앞장서 보수적 입장에서 3명의 젊은 기자를 비난했다. 디엠 정권은 삼총사에게 비밀경찰을 붙여 미행하도록 했다. 반공적인 히긴스 기자는 “젊은 기자들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혹평했다.

디엠 정권은 마침내 1963년 11월 쿠데타로 전복되고 월남은 쿠데타의 악순환 속에 정치 불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졌다. 삼총사는 대월남 정책이 성공적이고 전장에서 이기고 있다는 미국 정부 관리들의 주장을 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의 두 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시한 기자만 상을 받지 못했다. 시한 기자는 65년 귀국 후 뉴욕타임즈로 옮겼다. 그 뒤에도 월남전에 관심을 기울여 71년 6월 미국의 월남전 개입과정에 관한 국방성의 기밀문서를 입수, 엄청난 특종을 얻었다. 미 정부와 뉴욕 타임즈의 법적 투쟁까지 번진 이 사건에서 신문은 승소했다. 이 공로로 시한 기자는 72년에 드류 피어슨 상을 받았다.

시모어 허시의 미라이 학살 사건 탐사보도

미국 남부 조지아주 군사기지 포트 베닝은 육사를 나온 한국군 장교들도 수없이 거쳐 간 유명한 군사교육시설이다. 1969년 9월 6일 이 군사기지에서 190단어로 된 짧은 AP 통신 기사가 발신됐다. “68년 월남에서 수 미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죄명으로 한 장교가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는 내용이다. 플로리다주 출신의 켈리 중위가 학살혐의를 받고 있었다. 켈리 중위는 월남에서 2년간 종군한 뒤 며칠 전 제대했다. 이 짧은 기사에 주목한 기자는 없었다. 어떤 언론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카고의 ‘사회뉴스 개척부’는 이 기사에 주목했다. 이 취재기관은 1890년 사회부 기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뜻있는 시카고 신문인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전통 깊은 뉴스발굴 기관이다. 이 기관에서 훈련받고 있던 시모어 허시 기자는 한때 AP통신 국방성 출입기자였으나 데스크가 싹둑싹둑 기사를 자르는 것에 항의하다가 뛰쳐나온 프리랜서 기자였다. 1969년 10월 하순 국방성의 한 간부가 허시 기자에게 넌지시 이 기사 감을 던졌다. 허시 기자는 군 복무 대 정보계통에서 일했다.

허시 기자는 현지출장은 두 달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면서 이 사건 현장에 있다가 제대한 군인들을 만났다. 사건의 장본인인 켈리 중위와 인터뷰까지 성공했다. 허시 기자는 기사를 라이프지와 루크지에 팔려 했으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워싱턴 포스트의 벤 브래들리 국장은 달랐다. 허시의 기사는 워싱턴 포스트의 69년 11월 13일자에 보도돼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베트남 쾅과이성 미라이군 송미 마을의 대학살사건. 1968년 3월 미군 병사들이 모든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모아놓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소리도 외면한 채 무차별 총격을 가해 최소한 109명에서 최고 560여명의 민간인들이 살해했다. 사건에 가담했던 갓 20살의 로날드 이병은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대학에 들어갔는데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며 허시 기자에게 사건 전체를 털어놨다.

국수적인 애국론에 빠져 무작정 무용담만 양산하거나 특정한 정치세력에 의탁해 정파보도만 일삼는 한국 기자들에게는 허시 기자는 미치광이로 보였을 것이다. 허시 기자는 이 밖에도 생물화학전, 미국의 무기밀거래 등의 특종으로 퓰리처상을 받는다. 허시 기자는 수상소감에서 “정부에 속고 사는 미국민들을 위해, 타락된 미국의 인간성과 도덕을 살리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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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책 , 지구특파원 , 박실 , 시모어 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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