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금 지갑에 있는 만원으로 점심도 사먹고 커피 한잔까지 마실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돈으로 점심 사먹기도 버겁게 된다면? 아마도 상당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돈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심정이 들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인플레이션(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면, 추가적인 소득이 없는 이상 누구나 생계비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돈의 가치를 둘러싸고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와 비교할 때 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적극 나서고 있는 거죠. 또한 다른 나라 정부가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려하면 다들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비판하는 일들이 자주 목격됩니다.
언론에서는 그 이유가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위해서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수출품에서는 이득을 볼지 몰라도 수입품은 반대로 값이 올라 그만큼 손해일 텐데, 왜 이런 조삼모사식 일들을 벌이는 걸까요? 수입품보다 수출품이 훨씬 더 많은 경우라면 몰라도 말이죠. 혹시 이제부터 다들 수입 없이 수출만 하겠다고 달려드는 걸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봅시다. 사주는 사람은 없는데 팔 사람만 늘어난다? 그러면 팔지 못해 쌓여만 가는 물건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마치 1930년대 세계대공황 시절 보호무역을 위해 고율의 관세를 매기는 일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혹시 환율갈등 속에 담겨진 진실은 바로 변형된 보호무역주의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이죠. 이미 우리나라는 엔화 약세로 인해 그 피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본과 경쟁하는 자동차 쪽의 수출은 타격이 많이 예상됩니다. 앞서 말한 변형된 보호무역주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될지, 우리도 그것의 희생양이 될지 심각하게 지켜 볼 일입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엔화가치를 떨어뜨려라!”
독일 "2차 환율전쟁 주범은 日"…`유로화 절하`로 반격 나서나 - 한국경제 2013. 1. 24
요즘 연이어 경제면을 장식하는 뉴스 중 가장 뜨거운 감자가 바로 ‘엔화 약세’입니다. 지난 번 <참세상논평>에서도 아베정권의 이런 ‘도박’에 대해서 위험한 줄타기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가량 지난 현재, 전 세계는 일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2차 환율전쟁의 주범이라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웃나라를 거지로 만들려고 한다.” - 제임스 블러드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총재
“우리는 환율전쟁의 문턱에 있다.” - 알렉세이 울류카예프 러시아 중앙은행 부총재
“선진국의 통화가치 절하가 잇따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 머빈 킹 영국 중앙은행총재
“환율문제가 더욱 정치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
보시듯 연이어 전 세계 주요국들의 통화 당국자들이 아베정권의 엔화 약세 정책에 대해 성토해대고 있습니다. 2010년 중국에 대해 위안화 절상을 요구했던 미국과 이를 부당한 내정간섭으로 반발한 중국 간의 첨예한 환율갈등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환율전쟁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낸 브라질 중앙은행 총재는 미국을 향해 양적완화로 빚어진 달러의 과잉유동성을 비난했었습니다. 그 당시와 비교할 때 차이점이 있다면, 갈등의 주체가 일본과 유럽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미중 간 환율갈등은 조금 줄어든 상황이죠.
그러면 왜 갑자기 일본이 이렇게 빤히 예상되는 갈등을 무릅쓰고 엔화 약세에 몰입하게 된 걸까요. 아래 그림에서 보듯 이미 일본은 최근 수년 동안 엔화 절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전 까지 엔화가치는 1달러에 평균적으로 110엔 정도 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들의 대대적인 양적완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엔화가치는 줄곧 오릅니다(그래프에서 하락하는 부분). 그리고 유럽의 채무위기가 폭발하자 안전통화인 엔화로 더욱 몰립니다. 심지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후쿠시마 핵사태까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엔화가치가 계속 오르는 이해할 수 없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보통 그 나라가 휘청거릴 만한 커다란 일이 생기면 불안 심리 때문에 통화가치가 하락하는데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죠. 이건 일반적인 경제학 교과서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계속 떨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핵사태로 인해 원자력발전을 멈추자 에너지수입이 급증했는데요. 이 때문에 급기야 일본은 작년 6조 9000억 엔 가량의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를 봅니다. 2년 연속 무역적자를 보면서 수출대국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합니다. 가뜩이나 20년 가까이 장기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 입장에서는 숨통을 틔워줄 탈출구마저 막혀버린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더 이상 미국, 영국, 유럽에서 취하는 양적완화에 밀릴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것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엔화가치가 상승했다는 점은 더욱더 이러한 인식을 강하게 줍니다. 왜냐하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이 벌인 수년 간의 양적완화 정책이 자국의 경기부양보다는, 글로벌화 된 현재 국제금융시장에서 환투기와 같은 부작용만 낳는다는 지적이 많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엔화 강세가 그러한 부작용에 따른 여파가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되는 거죠.
일본은 그동안 맹방인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용인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선진국들이 만든 양적완화라는 새로운 ‘금융규칙’(?)에 마냥 희생당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2차 환율전쟁은 이미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각국의 환율하락 경쟁이 일본을 거치면서 만천하에 확인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환율전쟁'의 숨은 목적, 자동차 산업 보호주의
아베가 12월초 대대적인 양적완화를 공언한지 두 달도 채 안되었지만, 현재 1달러에 75엔에서 90엔까지 올라온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베노믹스’의 주요 정책당국자들은 95-100엔까지 말하고 있더군요. 이런 추세가 계속 진행된다면 아마도 올 상반기엔 엔화약세가 국제적인 갈등의 커다란 축이 될 듯합니다.
가장 갈등적인 관계에 놓은 쪽은 유럽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유럽경제는 작년부터 더블딥(재침체)에 빠진 상태라 올해도 획기적인 회복을 기대하기긴 힘듭니다. 일본과 수출경쟁을 벌이는 독일과 같은 유럽의 주요 수출국들은 이런 일본의 엔화약세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직접 아베총리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죠. 심지어 다음 달 파리에서 열리는 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동에서 엔화 약세가 주요한 의제로 등장할 것이라 전망되기도 합니다. 또한 예정된 유럽중앙은행 정례회의와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유로화 가치문제를 두고 논쟁이 제기될 가능성이 많은데요, 유럽중앙은행의 통화완화정책에 번번이 제동을 걸었던 독일마저도 이번 환율갈등 속에서 입장을 바꿔 환율전쟁에 동참하게 될지, 점점 더 그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인 현상 말고 좀 더 가려진 것들을 들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파국적인 환율전쟁으로 비화할 것인가? 이것저것 따져볼 것이 많습니다. 제 생각엔 3년 전 미중 간 벌어진 환율갈등 문제가 적정선에서 봉합을 이뤘던 전례에 비춰볼 때, 이번 환율갈등도 적정선에서 봉합될 여지가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서로 한발씩 물러서 타협할 여력이 있다면 말이죠.
왜냐하면 현재 세계 경제 질서는 글로벌 분업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한 나라가 자국의 통화가치를 하락시키는 것만으론 경제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일본의 수출기업들도 이미 상당수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터라 엔화하락에 따른 이득이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습니다. 아마도 자동차분야가 가장 큰 혜택을 입을 텐데, 그래서 혹자는 환율갈등의 핵심엔 자동차산업이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일본의 닛산자동차 사장인 카를로스 곤은 1달러당 100엔이 적정하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각국의 자동차 산업에서 환율 문제에 대한 가장 격한 반응이 불거져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GM·포드·크라이슬러 빅3 자동차 업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자동차정책위원회(AAPC)와 폴크스바겐·BMW 등 유럽 자동차 기업의 본사가 있는 독일의 격한 반발이 이를 대변합니다. 자동차가 환율 문제에 가장 민감한 산업인 데다, 자동차 부품 산업까지 연결된 다층적 산업구조 때문에, 다들 자국의 경제 회복에 가장 중요한 산업이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자동차 산업은 경제활동인구의 약 7% 정도를 차지합니다. 총취업자의 약 10% 정도인 160만 명이 직간접적으로 고용되어 있죠.
생각해보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들은 자동차 산업을 살리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자동차 제조사에 대한 직접적인 구제금융, 세금 감면, 보조금 지급 등 각종 정책 수단을 총동원해 자동차 산업 살리기에 나섰습니다. 우리나라도 낡은 승용차를 신차로 교체하면 세금을 감면해 주는 정책을 폈던 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환율 전쟁은 이와 같은 자국의 자동차 산업 살리기의 연장선에서 빚어진 자동차 산업 강국들 간의 보호무역전쟁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이죠. 때문에 전면적인 보호무역전쟁까지는 비화되기 힘들지 않겠나 싶습니다. 자동차 산업 살리겠다고 다른 산업들까지 모두 진흙탕 싸움에 빠지게 할 정도로 무능하다고 보이진 않기 때문이죠. 아마도 환율에 따른 가격경쟁력이 민감한 산업을 중심으로 저강도 보호무역전쟁이 간헐적으로 벌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갈등에 대응해서 자동차 제조사들은 환율 전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해외 생산을 계속 늘리는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해외 생산 비중이 2008년 28%에서 2012년 44%로 늘었습니다. 일본도 2007년엔 50%였지만 2012년엔 60%로 상승했습니다.
위기심화 가능성과 타협 가능성의 공존, 그리고 희생양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의 전망을 가늠해 봅시다. 일본은 엔화약세를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일본의 엔화약세 정책에 대해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최근 주요국들이 격한 반발을 보이자 일본은 조금씩 속도조절을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엔화의 추세적인 하락은 지속될 것입니다. 7월 참의원 선거를 겨냥한 인기몰이의 임시방편일지라도, 현재 심각한 경기침체와 수출난맥을 조금이라도 돌파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고육지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위기를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시킬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일본과 유럽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까지도 모여서 환율갈등에 관한 타협책을 만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치 1985년에 있었던 ‘플라자 합의’(미국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이 모여 달러화 대비 자국의 통화가치를 절상시켰던 합의)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현재 이런 타협을 이룰 리더쉽이 없기 때문에 공식화된 합의는 이루지 못할 것이라 봅니다. 다만 불안정한 타협 수준에서 서로 눈치 보면서 한발씩 물러서는 것이겠죠.
그리고 이들이 만든 타협의 희생양은 기축통화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들이 될 것이라 봅니다. 우리와 같은 이들 국가들은 미국, 영국, 일본, 유럽, 중국처럼 양적완화책을 맘껏 사용하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부터 외환위기가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겠다고 함부로 공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시절, 미국에게 통화스왑을 구걸하여 겨우 환율폭등(원화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막았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접 일어난 위기가 아님에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반토막으로 만들었었죠. 그 후 유럽채무위기가 불거질 때마다 요동쳤던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의 쏠림현상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대외환경에 놓여 있는지 실감하실 것입니다.
이들이 벌이는 환율갈등이 전면적인 위기국면으로 발전하든, 혹은 불안정한 타협책으로 봉합되든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그 희생양은 글로벌 권력구도에서 철저하게 하위파트너로 분리되어 있는 나라들에게로 전이될 것입니다. 바로 환율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전혀 방패막이를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더구나 수출의존도가 매우 높은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공업국들 말입니다. 힘이 빠진 ‘G20 공조체제’가 엔화약세로 빚어진 환율갈등에 대해서 과연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건인가, 현재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할 국제적인 사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다음 편엔 ‘아베노믹스’의 또 다른 쟁점인 인플레이션을 위한 양적완화책에 대해서 살펴봅니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