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달, 백사마을

[최인기의 사진세상](22) 104번지라서 백사마을 된 달동네


명절을 앞두고 백사마을의 소식이 간간이 들려옵니다. 백사마을은 2009년 노원구 중계본동 18만8899㎡이 재개발구역에 포함되면서 마지막 달동내로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전체에 오래된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노원역에서 1142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이르면 불암산 속에 잠겨있는 백사마을이 나타납니다. 그동안 백사마을은 점차 마을분위기가 쇠락을 하더니 2012년 5월 2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따르면 중계동 104마을 재개발 계획안을 최종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지난 가을 방문을 했을 때는 '중계본동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에 따른 토지이용계획과 디자인 가이드라인 수립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백사 마을은 한눈에 봐도 가난합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1980년 초 동네 교회 형들을 따라 올랐던 불암산과 수락산에서 바라보는 마들 평야는 그야말로 논과 밭으로 둘러 쌓여있던 곳입니다. 하긴 그때는 산을 둘러싼 모든 마을이 현재의 백사마을처럼 달동네 이었으니 새삼스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돌려 상계동 방향을 바라보면 사방에는 서울강북지역의 대부분의 쓰레기가 이곳에 모여서 처리가 되던 쓰레기 처리장이 있던 곳입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쓰레기 산으로 뒤덮여 있거나 검은 폐수가 흘러내리던 곳에 아파트가 하나둘 들어서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이곳도 대부분의 오래된 달동네들이 그렇듯이 한국전쟁이후 서울과 수도권으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을 1960년대와 1970년대 서울 도심 개발로 일순간 도심지에서 외지로 밀어내면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다가 정착한 마을입니다. 그때 번지수가 산 104 번지였다는 군요. 백사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이유랍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4호선 전철역이 개통 된 게 1985년 즈음인데 전에는 어떻게 이곳 백사마을에서 도심지로 나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사진속의 할머니(82세)는 백사마을 88계단 바로 옆에 사십니다. 그런데 고양이 하고 사이가 안 좋은 거 습니다. 야옹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면 마음이 심란하고 어수선하시답니다. 골목 끝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입으로 쉬익 하며 쫒는 시늉을 하십니다. 고양이는 도망가는 척하다 다시 되돌아와 또 가느다란 소리로 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사실은 할머니와 고양이는 친구 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88계단을 내려와 다시 마을이 두 갈래로 이어지는 삼거리 앞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곳은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곳입니다. 골목길에 접어들면 입구부터 벽화가 요란하게 눈에 띕니다. 작년에 방문 했을 때와는 달라진 모습입니다. 햇빛은 골목길 전체를 풍성하게 비춰줍니다. 새로 개발된다는 지역을 천천히 걷다보니 오후한때 양지바른 골목에 의자를 내놓고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담소를 즐기는 마을 어르신 몇 분이 모여 있습니다.


수 년 전부터 마을의 벽화를 주제로 한 작업이 부쩍 늘더니 이제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백사마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분이 계십니다. 현대이발소를 비롯하여 상가에 그림을 전시해 놓은 이성국씨입니다. “제가 살던 곳도 과거에 백사마을과 같은 곳이었어요. 백사마을은 2003년부터 도시가 형성되고, 문화가 바뀌는 과정에 대해 그림과 사진, 조사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기를 백사마을 벽화 그리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작년에 백사마을 5동과 6동 중심으로 벽화작업을 들어오려 했다가 주민들과 함께 탄원서를 내고 항의를 해서 결국 막아 냈다는 겁니다. “이곳에 그려지는 벽화를 보면 마을의 역사와 전통과는 무관하게 만화 캐릭터를 그리고 있어요. 몰개성적으로 천편일률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아쉽습니다. 마을 주민들을 타인의 시선으로 대상화 시키는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마을의 벽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을 할 때인 거 같습니다.


마을주민 이용환씨(76세)께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 봤습니다.거동이 불편하지만 어눌한 말투로 조근 조근 말씀을 받아 주십니다.

“여기는 서울이지만 마치 오래된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에요 언제 이곳에 오셨나요?”

“1972년 왕십리에서 살았어요. 집에서 철거가 되자 정부에서 이곳으로 우리가족을 일방적으로 보냈어요. 서른 두 살인가 세 살인가 우리 가족 4명을 데리고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지만 정부에서 지원하는 거는 하나도 없었어요.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어요. 뭘 좀 더 지으면 다 두들겨 부수고 그랬죠.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평생 이곳을 지킨 것입니다.”

“그때 이곳은 산골짜기 였을텐대 일은 어떻게 하러나가셨어요”

“버스 타고 나가야죠. 버스는 요 밑까지 들어왔어요.”


이 대목에 이르자 궁금증이 사라졌습니다. 다행히 오래전부터 이곳에 버스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불암산은 바위로 된 산입니다. 나무들은 많지 않고 듬성듬성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당연히 전기나 수도시설은 상상을 할 수 없었답니다. 그 후로 1980년대 전에는 무허가지역이었는데 그 후에 허가를 내줘서 마을 주민들이 땅을 사들였고, 2000년대 중반 땅 값이 올라 외지인의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자 1200여 가구 가운데 땅주인이 소유한 600여 가구 정도 남았는데 도시가스도 안 들어와 살기 불편 해 빈집이 많다고 합니다.


백사마을은 입구의 대진슈퍼를 끼고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골목은 산자락을 끼고 안으로 들어 갈수록 군데군데 집이 비어있습니다. 길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길인 곳도 많습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몸을 옆으로 틀어야 겨우 통과할 만한 곳도 있습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너비를 비집고 다니다 보면 빈집들이 보입니다. 이미 많은 집들이 비어 있습니다. 좁은 골목을 걷다보면 담장위로 장독들이 보입니다. 깨진 화분 건조대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건조대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겨울바람에 빳빳하게 동태처럼 얼어붙은 모습입니다. 무작정 헤매다가 백사마을 88계단 옆에 섰습니다. 길게 늘어트려진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내리는 마을 주민들을 바라보며 가방에서 캔 커피를 꺼내들고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현대이발관 간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저씨(70세)가 반갑게 맞이해주십니다. 따뜻한 연탄난로에 불을 쬐며 이 마을의 내력을 더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2016년 10월 입주예정 해놓고 현대이발관 주변의 5동과 6동 마을은 서울시에서 매입을 해서 이곳에 임대아파트대신 보존지구를 만들 거고 그리고 저 너머는 싹 철거하고 아파트가 들어 설 거라고 한다는데 모르겠어.”

이제 본격적인 철거를 앞두고 현재 지장물 조사가 한창이라는 소식도 있는데 마을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이곳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건강이 녹록치 않은 고령자들이거나 기초생활 수급자라고 합니다. 근근이 살아가는 수입으로 소득의 반 이상을 방세와 난방비를 지출하고 나면 사실상 남는 게 없다고 합니다. 아파트 들어가서 관리비내고 뭐내고 쉽지 않다는 거고, 더욱이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재미난 기억 있으면 이야기 해 주세요.”

“명절 때 사람들이 모여서 음식 해 먹고 윷놀이하고 그런 게 재미있지, 진짜 아닌 게 아니라 이 동네 생기면서 이 이발소는 지금까지 단골로 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다녀요 그런게 다 재미나지.”



백사마을은 기존의 골목길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면서 자연지형에 따라 형성된 저층주거지를 리모델링하거나 신축을 통해 보존하고 관리하는 개발 방식을 지향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질문을 던져보면 우리주변의 도시가 급격히 개발이 되면서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마을로 인해 서울사람들은 고향을 잊어 버린지 오래란 말이 나돌 정도로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골목과 달동네등 기존의 공간을 재구조화 시켜 일종의 ‘장소 차별화 전략’의 일환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부동산경기의 침체와 맞물리면서 상징적 조작이라는 측면도 살짝 엿보입니다.


게다가 백사마을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입니다. 주민과 세입자 모두를 위한 개발이 순탄하게 진행될 지는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보는 백사마을의 인상은 그렇습니다. 곳곳이 가난의 흔적이 베여있습니다. 이곳을 따뜻한 달동네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미 보금자리를 내놓고 떠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깨진 유리창과 아무렇게 버려진 주인 잃은 살림살이가 마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잡초에 묻혀있습니다. 골목길과 달동네를 복원한다는 의미는 기존의 골목길과 달동네의 가치를 그저 민속촌 마냥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래된 정취를 향유하고자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점차 사라지는 삶의 공동체를 되살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언급을 하자면 그동안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도심개발 사업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행되면서, 이로 인해 수많은 세입자 철거민들이 삶의 보금자리에서 인권을 침해당해 왔습니다. 혹시나 백사마을도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세입자들이 망루투쟁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민들의 주거생존권을 위협하는 야만적인 용역깡패들의 폭력 때문입니다.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함부로 집에서 내몰리거나 쫓겨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폭력적 인권침해는 이 따뜻해 보이는 백사마을에서도 언제든지 자행될 수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지난 용산에서 벌어진 참사이후 최근까지 경비업법과 행정대집행법을 개정하고, 강제퇴거 금지에 관한 인권지침 및 조례를 실행력 있게 법제화하라는 주장은 그래서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마치 덜 익은 과실이 자길 따 먹는 사람에게 무서운 병을 안기듯이, 착함이 자기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지요.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억세고 독한 외피를 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이야기는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건 아닙니다. 가난은 벼랑 끝이 맞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면 가난은 한걸음 더 우리를 야멸차게 몰아 칠 겁니다. 가난을 제대로 인식하는 거,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면 아무리 소름끼쳐도 이 지독한 가난을 바꿔 낼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태그

달동네 , 백사마을 , 서울의달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최인기(빈민활동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