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정체성을 묻다

[최인기의 사진세상](23) 서울역에서 만난 노숙인들


서울이라는 공간을 하나로 그릴 수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라면 과연 어디라고 대답할까요? 1970년대 초 전형적인 이촌향도로 상경한 필자에게 서울역은 그 어떤 곳보다도 서울을 서울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장소였습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대합실과 붉은색 벽돌, 그리고 둥근 돔이 올려져 있는 서울역은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반면 광장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노점상과 그 사이사이 구걸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려 갔던 서울의 낯섦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서울역이 사적 284호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1899년 9월 개통한 경인선이 한강 바로 앞의 노량진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이듬해 7월이 되어서야 한강철교 개통과 함께 염천교 아래 약 10평 크기의 아주 작은 남대문정거장이라는 이름의 목조 바라크 건물이 들어서며 마침내 역사가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06년 경의선 개통으로 경성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성의 관문이 될 역이 필요하였습니다. 1925년 경성 역으로 다시 탄생한 역의 규모는 동양 제2의 규모였습니다. 크기가 일본의 도쿄역 다음이었습니다.


‘없는 사람은 뜨신 날이 좋다’는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겨울은 참으로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노동자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광장은 금세 휑해집니다. 그리고 간간이 서울역 광장 위를 서성이는 사람들이 점차 눈에 띕니다. 양경섭(가명) 씨는 지난여름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서 만난 분입니다. 집회나 행사에 가끔 카메라를 가지고 방문해서 사진도 찍어가고 그랬는데 이제는 좀 시큰둥해졌나 봅니다. 왜 요즘에는 사진을 찍지 않느냐고 그러자 그냥 싱긋 웃고 맙니다.

“거리에 계시는 분들은 오늘같이 추운 날씨에도 왜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 거죠?”
“거긴 마치 감옥 같아요.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다 보니 코 고는 소리며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동행을 해도 노숙인들을 촬영하는 게 쉽지 않을 거에요.”
“못 찍으면 말죠.”


경섭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역 지하도로 이동했습니다. 평소에 눈인사만 하던 사이라 노숙인을 찍는 문제보다도 경섭 씨의 무뚝뚝한 얼굴이 더 어려웠습니다.

지하도에는 대낮인데도 이미 군데군데 노숙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워 있고, 얼기설기 엮인 두꺼운 잠바를 뒤집어쓴 모습, 그것은 마치 한 마리 짐승이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발은 맨바닥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고, 머리 위에는 언제 마셨는지 소주병이 뒹굴고 있습니다.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어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염려돼 주시하고 있는데 간간이 숨소리가 들립니다.


서울역은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답게 화려하고 깨끗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노숙인은 서울역에 어울리지 않는 철저한 이방인의 존재라 한겨울 그들은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내몰리고 있습니다. 홈리스 뉴스에 실려 있는 김정원 씨의 이야기를 옮겨봤습니다.

“서울역은 기차의 종착역뿐 아닌 서울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우리 인생의 정거장이기도 합니다. 홈리스들은 서울역에서 절망을 이어가기도 하고, 또 다른 난관을 만나기도, 새 출발의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홈리스들에게 서울역은 어떤 의미인지...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는데, 시간만 나면 서울역에서 아래, 위 바닥에 모두 물을 뿌려요. 의자가 사람이 앉아 있으라고 만든 게 아니라 작품이래요. 사람들 앉기에 딱 좋은데, 사람들도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앉은 건데, 서울역 외부에는 이 작품 말고는 앉을 곳이 없네요. 민자 역사 정문 쪽에는 수도꼭지가 호스에 항상 연결되어 있어요. 물 뿌리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어요. 민자 역사 광장에는 조용히 자고 있는 노숙인을 물청소한다고 일부러 깨우기도 하고요.”


다음 이야기는 필자가 몇 년 전 한 단체에 ‘노숙인이 물건인가요? 아무데다 갖다 버리다니’ 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입니다. 다시 요약해서 옮깁니다. 지난 2011년 1월 15일 서울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전 7시30분쯤 철도공사 직원이 순찰하다가 장 모 씨가 만취 상태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 씨는 공익근무요원 A씨에게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는군요. A씨는 곧바로 장 씨를 출구 밖 대리석 바닥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날씨는 영하 6.5도에 새벽바람으로 체감온도 영하 9.7도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1시간 뒤 제설작업을 하던 또 다른 공익요원 김씨는 “출구 앞에 노숙자가 쓰러져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무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 씨는 장 씨를 휠체어에 태운 뒤 서울역사 구름다리 아래로 옮겼고요. 노숙인 장 씨는 갈비뼈 골절상 등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당일 정오쯤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추위도 추위지만 사인은 갈비뼈 골절상 등이었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세상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검찰은 장 씨가 동사한 것이 아니라 부상 때문에 숨졌고, 박 씨 등은 장 씨가 다쳤다는 사실을 몰랐다며 이들에게 유기치사 대신 유기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고, 서울중앙지법 형사15단독 권태형 판사는 유기죄로 기소된 한국철도공사 직원 박 모 씨(45)와 공익요원 김 모 씨(28)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를 소위 ‘법률상·계약상 보호의무’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라는 겁니다. 아무튼 재판부는 “철도 종사자에게 법률상 구조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거고 “오히려 철도안전법 1조는 철도안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누구든지 역 시설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어 철도종사자는 금지행위를 한 자나 물건을 퇴거시킬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군요. 한겨울 부상을 당한 노숙인을 우리나라 법률에서는 물건처럼 내다 버려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정부를 비롯한 사회의 외면 속에 매년 350여 명의 노숙인이 거리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균사망연령은 48.3세입니다. 그리고 30~39세 노숙인 사망률은 전체 인구집단의 7.05배(20-29세 노숙인의 사망률은 전체 인구집단의 11.79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서울역철도공사 측에서는 지난 1년이 넘는 시간을 노숙인에 대한 강제퇴거로 발 디딜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상태입니다. 퇴거 이상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발상입니다. 노숙인들은 서울역으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울역은 무엇보다도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 가장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사를 해결하기 쉬운 무료급식소가 많기도 하지요. 게다가 인력사무소도 근처에 있다 보니 당연히 서울역은 노숙인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노숙인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개념을 둘러싸고 정부와 단체 및 당사자 간의 간극이 너무도 큽니다. 그동안 정부는 소위 거리 부랑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시설에 격리하는 정책을 주로 폈습니다. 서울시에만 거리, 쉼터 노숙인의 70%가 모여 있습니다. 노숙인 정책은 주거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찜질방이나 쪽방 그리고 고시원 등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이를 기준으로 실태조사와 현황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항상 질병에 노출된 노숙인에 대한 의료지원 문제는 심각합니다. 노숙 상태에서 5년이 지속될 경우 사망률이 급등하지만 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급여제도는 시설입소 후 3개월이 지난 이들 중 건강보험이 6개월 이상 연체된 이들에게만 적용하고 있어 대상이 협소하고,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기초생활보장을 받지 못해 제대로 치료받기 힘든 상황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의 수탈정책은 교통시설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졌는데요. 당시 경성역은 대지 면적 70,083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6,631㎡의 초대형 랜드마크로 기능을 수행하면서 1층은 공공장소로 대합실, 2층은 귀빈실과 식당, 그리고 지하는 역무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2층의 귀빈실과 식당은 일반인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드나드는 이들을 제약하고 머물 수 있는 여행자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구별 짓는 행위를 통해 신분적 차이와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광복이후 1947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하였으며 2004년 4월 1일에 KTX를 도입하면서 신역사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의 역사적 경험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서울역 역사 안에 노숙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강제퇴거 비용으로 2년간 4억 8천만 원이라는 돈이 들어갔다는 것은 공공장소 이용에 대한 신분상의 차별을 가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점심경 대합실 내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두 명이 와서 왜 들어가냐고 했다.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니 나가라고 해 재차 화장실 가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며 밀쳐내 넘어졌다. 그랬더니 배하고 다리를 두 번 밟았고 그 후에 쫓겨났다. 8년 전 뇌졸중을 앓아 팔과 다리가 마비됐는데, 지하도의 화장실은 한 곳만 좌변기라서 용변 보기가 힘들어 대합실에 간 건데 그렇게 쫓겨나니 너무 억울해서 그때 울고 말았다.”

매년 동짓날 서울역 광장 계단에 노숙인과 관련단체들이 모여 촛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동안 죽어간 노숙인의 넋을 달래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위 글은 ‘2012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 기획단 보도 자료’에 실린 글입니다.


몸을 누일 곳이 없어 한뎃잠을 자며 이슬을 맞고 잔다고 해서 노숙자(露宿者)로 불리는 사람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슴에 안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 그들을 노숙자로 부르든, 노숙인으로 부르든 아니면 홈리스로 부르든, 이들이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도시의 정체성은 시각적 청결함과 아름다움으로만 귀결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공동체 의식의 부재는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라는 것을 서울역 주변의 노숙인의 사례를 통해 살펴봤습니다.

지난 12월 21일 동짓날 행사를 마치고 서울역 광장에서 나눠준 팥죽을 행사참가자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경섭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잘 지냈어?” 하고 아는 체를 하자 반갑게 맞아줍니다. “오늘은 카메라를 들고 나왔네? 다시 사진 찍기로 했나보지?” 그러자 카메라를 만지며 또 그냥 웃습니다. 이제 말을 서로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친해졌습니다.

* 이글은 홈리스행동에서 제작하는 홈리스뉴스와 2012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 기획단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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