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회부장 오소백의 칼럼

[낡은책] 월화수목금토일 (오소백, 명문당, 1987.3.18, 321쪽)

저자 오소백은 1921년 대동강 하류 진남포에서 태어나 2008년 8월8일 87세로 죽었다. 40년대 말에 기자생활을 시작해 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 8개 일간신문의 사회부장을 9번이나 지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영원한 사회부장’이다. 1947년 조선일보 수습기자로 들어가 1948년 민주일보, 1948년 합동통신, 1952년 부산일보, 1953년 중앙일보 서울신문, 1954년 홍익대 강사, 1955년 한국일보, 1957년 세계일보, 1959년 경향신문, 1961년 민족일보, 1963년 대한일보에서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오소백은 신문에만 글 쓰지 않았다. 일찍부터 언론인 실무 교과서를 썼다. 첫 책은 1953년 한국전쟁 통에 나온 <신문기자가 되려면>(세문사, 1953)이다. 1955년엔 <올챙이기자 방랑기>(신태양사)를 썼고, 1972년엔 <매스컴 문장강화>(삼육출판사)로 다시 언론학 교과서를 썼다. 번역서 <매스컴 취재와 보도의 실제 : 신문 방송 잡지 사보 교지 기자작성 실무>(존스, 집현전, 1987) 등은 당시 언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관점은 늘 우익이었지만, 기자의 정도를 지키면서 살았다. 권력의 부당한 외압이 닥치면 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80년대 중반에 여러 신문에 쓴 칼럼을 모은 이 책은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학생운동권’ 얘기가 많다.

오소백의 이 칼럼집은 86년 건국대 사건 이후 여러 대학에서 벌어진 ‘대자보 공방’을 다룬다. 50~60년대 자유주의자 오소백의 눈엔 ‘민중’을 외치며 반미로 빨려가는 젊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겠는가.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는 식의 이 열혈기자의 글을 읽다보면, 왜 80년대까지 민주화 세력이었던 자들이 늙어선 뉴라이트의 거두로 돌아서 버리는 지 궁금증이 쉽게 풀린다.

그는 늘 운동권에 비판적이었지만,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치권력도 비판했다. 한국 사회 양극화의 심각성을 다룬 <상/하층 구조의 대비>란 칼럼에선 5분위 소득격차가 이미 80년대 중반에 충격적일 정도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77년 우리 사회 전체에 통계에 잡히는 30인 이상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자가 고작 540만명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갑근세를 낼만큼 소득이 있는 사람이 고작 10%를 조금 넘었을 뿐이라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월급 받는 노동자 대부분이 갑근세 면세점 이하의 저소득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성장이 다 어디로 돌아갔는지 증명하고 있다.

대학가 대자보 공방

1986년 5월 8일 건국대 교내 게시판에는 “인천시위가 학생운동이 지니는 긍정적 측면을 짓밟아 버렸다”는 대자보가 나붙어 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대자보는 건국대 원리연구회 등 종교서클의 명의로 나붙었다. 같은 날 오후 1시쯤 반박 대자보가 붙었다. 명의는 <축산대학 울분 터뜨리는 학우>였다. 연세대에서도도 찬반 대자보가 나붙었다.

운동권 학생의 편지

운동권 학생들이 중고생에게 보내는 편지공세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적은 북한이 아닌 미일 외세” “미국은 6.25때 동포를 죽였다” “공산당 왜 무조건 나쁜가” “누군 사장, 누군 노동자냐” 등이다. 너무도 한심스럽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라” “자본주의를 제대로 하라” 이렇게 말했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과격의 종착역은?

2년 전만해도 그냥 <민주화>더니, 1년 전엔 단순한 <미국의 대한정책 저의>였다가 금년 들어선 <미제 축출> <해방구>라고 공공연히 들고 나왔다. 행동의 양상도 화염병이나 각목은 약과고, 이제는 분신 자살로 나타난 <생명쯤이야>로 극단화되었다. 정권이 양김씨 쪽으로 가는 것조차 <오십보 백보의 친미 보수정권>으로 우습게 보일 뿐이고, 민주화란 구호는 어느 틈에 <반미 자주화>나 <민중정권>으로 대치된 지 오래다. 한 신문의 사설, <과격 흐름과 여야>의 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용어의 마술 끝장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말하는 용어는 매우 불투명하다. <민중>이며 <민주화> 용어도 그렇다. 과거엔 우리나라에도 민중당이라는 정당도 있었고 민중일보라는 신문도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이후 ‘민중’이란 용어는 케케묵은 것으로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중류가정과 운동권

건국대 사건으로 연행된 학생 1,525명 중 89명(5.8%)가 공직자의 자녀였다. 연행된 학생의 가정형편은 상류가 106명(7%), 중류가 809명(53%), 하류가 610명(40%)였다. 중산층이 가장 많다. 전공별로는 인문계 437명, 법학계 97명 순이다.

시위와 무죄선고

법원이 개헌 시위 대학생에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개헌 요구를 했다고 해서 현저히 사회적인 불안을 애기하는 집회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검찰은 지체 없이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므로 항소하겠다”고 맞섰다. 검찰은 “정치적 판단으로 무죄를 내린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상하층 구조의 대비

일본의 상층구조 20%와 하부구조 20% 사이의 소득격차는 1 대 2.7이다. 미국은 1대 9.1로, 상하층 구조의 격차가 심하다. 한 전문가에 따르면 한국은 1 대 17이라는 설도 있다.

선심과 빈부

1977년 현재 우리 전체 근로자 540만명 중 갑근세 납부 대상자는 불과 10%를 좀 넘는다. 근로자 80% 이상이 면세 대상이다. 80% 이상이 어림잡아 7만원 이하의 낮은 월급쟁이이다. 이 가운데 월급 3만원 미만의 연소근로자와 여성근로자도 수두룩하다.

미국 속의 가난뱅이들

미국 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미국 시민 7명 중 1명은 가난뱅이다. 1985년 말 현재 미국의 빈민은 3,310만명으로 전체인구의 14%였다. 1985년의 빈곤율은 1984년에 비해 0.4% 떨어졌다. 레이건 정부 출범 이래 계속 나빠져 1983년까지 상승했던 민곤율은 2년째 떨어졌다. 흑인의 빈곤율이 여전히 가장 높아 31.3%(980만명)에 이른다.

정직한 정치만이

교육진흥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사학과 철학을 택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법정계와 의학계를 택하는 학생이 줄어들고 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바뀌면서 순수 기초학문에 대한 선호도가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한 전문가는 내다보았다.

통계와 진실

“통계숫자, 그게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뛰어난 사회학자 짐멜의 말이다. 올바른 통계라도 그게 전적으로 옳다고 여기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하물며 숫자가 엉터리거나 변칙적일 때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수학의 연구>에서 러셀은 수학의 순수성, 수학의 완전성을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까지 했다.
태그

언론인 , 기자 , 오소백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정호(전 민주노총 실장)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