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우파” 이동하와 이름 없는 “사회주의자” 이병기

<하해여관>과 10월항쟁, 그리고 독립운동

이동하와 이병기,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안동의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간략한 소개만으로는 흥미가 크게 당기지 않았다. 그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하해여관>에 대한 소개를 살펴보면서 온 관심사가 그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속된 말로 꽂혔다.

[출처: 뉴스민]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 이동하 선생 54주기
조봉암의 진보당서 경북도당 위원장 지내


3월 18일 오전 대구시 동구 신암동 선열공원의 한 묘소에 다다르자 노구를 이끌고 언덕빼기를 오르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백농 이동하(1875~1959) 선생의 54주기를 맞아 묘소를 참배하러 온 민주화운동원로회와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어른들이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했던 놀이터, 선열공원에 독립운동가의 묘소라니, 철 없던 어린 시절이 잠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안동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동하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1911년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이동하는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 노비문서를 소각했고, 만주에서는 서간도 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교육구국활동을 펼치며 동시에 해외에서 무장 투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후 서울로 돌아왔고, 1930년 대구로 이주하여 ‘하해여관’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 오랜 독립운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거처를 옮겨 다니다 경주 양남면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1951년에는 ‘이승만 하야 경고문’ 발표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56년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에서 경북도당 위원장 역임 중이던 1959년 대구 남산동 자택에서 생과 이별했다.

이동하 선생 54주기를 맞아 묘소를 찾은 김찬수 4.9인혁재단 상임이사는 “아버지 이동하 선생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 아들 이병기 선생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친지들도 독립운동에 힘쓴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말했다.

김찬수 상임이사의 말처럼 이동하의 집안은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넘나드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경성트로이카(일제강점기 결성된 사회주의단체) 일원으로 활동한 이효정에게 이동하는 종조부(둘째 할아버지)였고, 이병기의 사촌동생 이병희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뉴스민]

묘소참배를 마치고 사회주의 운동가 故 이일재 선생의 아들인 이정건씨와 이동하, 이병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정건씨는 “이동하 선생은 유연한 민족주의자였고, 이병기 선생은 아버지(故 이일재)와 함께 활동하기도 한 사회주의 운동가였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이동하, 이병기 삶의 뒤를 쫓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혼란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에는 같은 편으로만 여길 수 없었다. 잘 알려진 김구와 박헌영의 대결구도처럼 바뀐 정세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웠다. 그러니 민족주의자 아버지와 사회주의자 아들 사이의 관계가 더 궁금해졌다. 이정건 선생과 헤어진 후 이내 서점에 들러 <하해여관>을 집어 들었고, 해방 이후 대구지역 관련 사료를 찾아 헤맸다.

물속으로 사라진 안동 부포마을의 독립운동가들

소설 <하해여관>에도 언급되지만 이동하는 퇴계 이황의 자손 이규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동에서 3대 명문가로 손꼽히는 집안이다. 이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안동시 부포마을은 1974년 안동댐 건설과 함께 대부분 물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이 집안의 독립운동 역사는 50년에 이른다. 1904년 서울에서 충의사(忠義社)에 이동하의 아버지인 이규락이 참가하면서 집안의 독립운동의 내력이 시작된다.

충의사는 서울에서 전현직 관리들과 유생들이 ‘외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보전하며 종사를 지키고 생령을 받들기 위해 결사한다’는 뜻을 내걸고 조직된 운동이다. 이규락이 충의사에 참가하는 동안 아들 이동하와 이동식은 서울과 대구에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한다. 이규락의 운동이 전통적 유림의 가치를 둔 ‘위정척사운동’이라면 이동하의 운동은 계몽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이동하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바로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이었다. 당시 많은 문중들이 서간도 지역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동하도 여기 동참한 것이다. 이동하는 여기서 교육운동에 집중한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고, 안동에서도 이상동을 포함한 진정이씨 문중이 만세운동에 앞장선다. 1920년 일제 경찰에 이동하가 쫓기게 된 것도 만세운동을 비롯한 항일투쟁운동에 자금 지원 때문이었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이동하 집안의 독립운동도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다. 이동하의 아들 이병기(1906~1950)는 1930년대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가 항일투쟁에 뛰어든 것은 스물여섯이던 1932년 2월. ‘대구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엮여 경찰에 붙잡혔다 풀려나면서 시작된다. 이후 그는 1933년 8월 용산공작주식회사 영등포공장에 노동자로 위장취업한다. 사촌동생 이병희와 종질녀 이효정과 함께 이재유와 이관술을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한다. 해방 이후까지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이병기는 1950년 보도연맹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삶은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안재성의 실화소설 <경성트로이카>에 등장하는 이효정(1913~2010)은 ‘경성트로이카’ 구성원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항일투쟁에 나서며 활동을 시작한다. 1933년 9월 종연방적 제사공장 여성 직공파업을 이끌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병기의 사촌 여동생인 이병희는 이효정의 영향으로 항일투쟁에 발을 디딘다. 이병희는 종연방적에 위장취업해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4년간 옥고를 치르고 북경으로 망명한다. 북경에서 일가친척인 이육사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 1944년 풀려난다.

이동하 집안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사람만 10여명이 넘는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선열공원에 묘소가 안장된 아버지 이동하, 경산코발트 광산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 이병기의 간극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진짜 ‘우파’와 이름 없는 좌파 운동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도 일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병기처럼 보도연맹에 연루된 이들은 그 묘소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하긴 이병기 스스로도 국가가 주는 포상이나 훈장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병기의 삶은 소설 <하해여관>에 잘 드러나 있다. 소설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그리 옳은 일은 아니나, <화해여관>은 이병기의 아내 오묘연과 아들 이효철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기에 그의 삶의 궤적 전반을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작가 김성희는 “의미의 혁명가, 이병기!”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주인공 이병기는 사회주의 운동의 최선두에 섰다거나 공산주의를 대표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탁월한 언변이나 조직력을 갖춘 지도자형도 아니었고 이념과 지식에 통달한 이론가도 아니었으며 역사에 남을 만한 굵직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일견 평범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생애와 운동사를 조명해보고 싶었다”

경산코발트 광산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운동에 충실한 이름 없는 한 운동가의 삶. 진보적 인사랍시고 이당 저당 기웃거리기를 부끄러워 않는 이들에게 이병기의 삶은 충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민족주의자 이동하와 사회주의자 이병기 사이에는 타협할 수는 없었으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짜 보수주의자와 우파들이 득실대는 한국 사회에서 이동하는 극우주의자 김구도 아닌, 가짜우파 이승만도 아닌 진짜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하해여관> 73p를 보자.

“나중에는 이게 아니구나 싶었지만, 독립운동 초창기에는 사회주의가 좋은 줄로만 알았었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땅도 공장도 다 나라 것으로 하자는 건데, 왕조의 백성은 본래 자기 땅이라곤 없었거든. 논도 밭도 다 왕의 땅이니,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해도 나라 땅을 빌려 쓰는 처지였지. 곡괭이 하나 만드는 대장간도 다 나라에서 운영했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하자 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이병기에 앞서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은 형 이병린은 이병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병기는 만주에서 고려공청 회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일경에 쫓겨 만주에서 서울로 온 이병기는 공장에 취직한다. 허구일 수 있지만 <하해여관> 99p에서 이병기가 목격한 장면은 오늘의 한국사회와 다르지 않다. 여수에서 사망한 하청노동자의 삶이 떠오른다.

이병기는 취직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실제로 사고를 목격했다. 공장 가운데 쇳물 구덩이로 쇳물을 실어 나르던 젊은 노동자 하나가 바닥에 있던 뭔가에 걸려 넘어지면서 손수레의 쇳물이 그를 덮친 것이었다. (중략) 노동자들 사이에는 죽은 청년의 가족에게 위로비와 장례비로 300원이 지급되었다는 소문이 나돌 뿐 누구도 정확한 진상은 알지 못했다.

아버지 이동하와 함께 대구로 내려온 이병기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이 격하게 대립하는 서울과 달리 대구지역서는 아버지 이동하와 아들 이병기처럼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 해방 이후에도 대구지역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건국준비 경북치안유지회’를 좌우 세력이 함께 결성한다.

이병기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합류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활동을 함께했다. 신탁통치를 두고 좌우 대립이 일던 시기 이병기는 전평의 화학노조 활동을 이일재와 함께 주도했다. 1946년 8월 23일 전매청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한다. 파업 이틀만에 미 군정에 진압당해 끝났지만 조직 활동을 이어간다. 이후 전평 중앙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대구에서 9월 24일 파업을 시작한다. 1946년 10월 1일 노동자와 학생, 시민 등 대구 ‘일급제 반대’와 ‘박헌영 체포령 취소’를 요구하며 미군정에 항거했다.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하며 시민들은 더 거세게 저항했다. 바로 대구 10월 항쟁이다.

이병기는 이후 1948년까지 남한 단독정부 반대 투쟁 조직에 힘썼지만 남북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며 분단은 고착화되고 만다. 소설 <하해여관> p251는 진짜 우파 이동하의 모습을 잘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대통령 병에 걸린 미친 늙은이 하나 때문에 이 나라가 분단되려 한다고? 안 된다, 그래서는 안돼!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 되찾은 조국인데 반 토막을 낸단 말이냐?”

이어진 이동하와 이병기의 대화에서는 둘의 이념적 차이가 드러난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과 43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처단하기 시작했다. 여순사건 당시 공산당 활동을 벌인 박정희가 이때 살아남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전향시킨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가 지방 조직마다 할당량을 정해 가입을 권유토록 했기 때문에 보도연맹은 사회주의자 뿐 아니라 밀가루를 배급받기 위해 가입한 사람, 감투를 주는 줄 알고 가입한 사람 등 좌익과 관계없는 이들도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때 이동하는 아들 이병기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이병기는 경찰에 출두해 보도연맹에 가입한다. 이것이 그의 죽음이 될 것이라고는 당시에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다. 경산코발트 광산에서 3,500여명의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될 때 그도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산코발트 광산 [출처: 경산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 유족회]

사회주의자 이병기와 10월 항쟁

1950년에 생을 떠난 이병기의 삶을 살피는 데 있어 해방 직후 노동운동과 대구 10월 항쟁을 빼놓을 수 없다.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과 전평 활동을 한 이일재의 증언을 통해 간략하게 그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된 내용은 1990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역사비평>에 실린 인터뷰와 2010년 발간된 <레프트대구> 2호 기사를 위해 기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요약한다.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사료 확인을 몇 차례 진행한 결과, 이일재의 증언은 사료와 일치했음을 덧붙인다. 일부 표현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부분은 게재하지 않는다)

이일재는 1945년 8월 말경에 이병기와 처음 만난다. 이일재는 당시를 회고하며 “다른 도당은 어쨌는지 모르지만 조공(조선공산당), 남로(남조선노동당)의 경북도당은 자금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조공이나 좌익세력에 우호적인 자본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이동하와 이병기를 동시에 언급한다. 이들은 함께 경북지역 화학노조를 결성하고 전매청의 연초공장의 노동자를 조직했다.

찬탁과 반탁 논쟁이 좌우익을 대립하게 만들던 시기를 두고 이일재는 “경북의 당조직에서는 찬탁, 반탁이 문제가 아니라 분열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해방 직후에 대구지방의 좌우익들은 항일적 의식으로 친교를 유지해 왔던 탓에 좌우합작 분위기에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1946년 8월 전매청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지만 파업이 깨지고 9월 총파업과 이어 10월항쟁이 일어난다. 이일재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함께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가두세포를 작용시켜서 기아행렬을 조직했다. 미군의 강제적 미곡수집과 미곡 반입금지령, 통행금지로 식량반입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대구시의 기아상태는 극에 달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30일부터 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경북평의회) 사무실 앞에 노동자와 시민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10월 1일 대팔연탄 노조원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중들이 경찰에 무장해제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전평 활동을 하던 이일재는 1948년 수감돼 김천형무소에서 10개월 징역형을 산다. 이일재의 아들 이정건씨는 “당시 아버지는 김천형무소에서 이병기 선생과 함께 옥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이병기 선생을 떠올리며 '형무소에서 아무도 청소하지 않아 접근하기 꺼리던 수세식 변기를 이병기 선생이 나서서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때 함께 수감 중이던 이들 모두가 이병기 선생의 솔선수범에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하시고는 했다”고 말했다.

우파 이동하와 좌파 이병기의 삶에 덧붙이며

해방운동가인 이동하와 이병기의 삶을 추적하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의미한 활동이 될 것이란 생각으로 그들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조병옥의 민주당을 ‘민주주의’의 원류로 내세우는 이들이나, 조봉암의 진보당을 진보정당 운동의 원류로 내세우는 이들처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철저하게 역사에서 거세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가려진 과거를 복원하는 일은 현재를 위해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기사제휴=뉴스민)

※참고 문헌
『하해여관』, 김성희, 사회평론, 2012
『경성트로이카』, 안재성, 사회평론, 2004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비, 1999
『대한민국사』1, 한홍구, 한겨레출판, 2003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 김희곤, 안동시, 2001
『한국현대사』,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4
『레프트대구』1, 2, 레프트대구편집위, 메이데이, 2010
『역사비평』,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1990
『한국독립운동연구사』4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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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트로이카 , 독립운동가 , 보도연맹 , 조봉암 , 이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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