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떠올려지는 싸이코패스

[양규헌 칼럼] 진짜 싸이코패스는 누구인가

라일락의 진한 향이 가득한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한밤이다. 꽃향기에 취해서 느긋하게 봄을 만끽하고자 느릿하게 걸어가는 남자의 걸음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숨 가쁘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여자가 보이는 것 같다. 밤이 이슥하니 치안이 불안해진 걸까. 사람이 사람을 공포로 여기는 거리의 밤을 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흐드러지게 자신을 치장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는 차 한잔하자고 다정한 말이라도 걸고 싶지만 곧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지금 이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타인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이웃이 아니라, 언제든 싸이코패스가 되어 위해를 가해 올 수 있는 위험한 짐승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꼭꼭 닫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일상 현실에서 싸이코패스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며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옆에 누군가가 싸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데 이것은 영화(미국 영화는 태반이 정신병자와 싸이코패스를 다룬다. 영화로 보는 미국은 정신병자들이 사는 아주 불안한 나라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실제로도 야만적인 자본주의 나라이니 영화가 순전히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와 미디어의 발달이 가져온 허구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돈의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은 돈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가치관의 혼란, 그 틈바구니에 축적되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찌꺼기들일 것이다.

언젠가 방송에서 싸이코패스를 분석하는 스페셜 시간이 있었다. 유영철 사건이 있었고, 또 그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추격자’라는 영화가 나오고 강호순 사건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뉴스를 장식하던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용산참사가 한창이던 때 강호순 사건으로 뉴스를 도배하라던 보도지침까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한두 번 비춰진 게 아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비열한 짓거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일반 사회 범죄를 부풀리는 권력과 미디어의 음모가 진짜 싸이코패스가 아닐까라는 의심에서 이글은 촉발되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절망한 시인은 'T.S.엘리엇'이라는 외국 시인이지만 전쟁으로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는 참담함 속에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이 바로 그 절망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냉정하고도 황폐한 그러한 정신세계였다. 얼룩진 역사와 현실의 실상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거기에 4월(4.3항쟁), 5월(5월광주)도 6월(한국전쟁)도 잔인한 달이어서 봄 전체가 잔인한 계절을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나아가 노동자들은 싸이코패스에 의해 노숙할 자유조차도 철저하게 유린되고 사람을 쫓기 위해 화단을 만들어 심어놓은 5월의 꽃가지를 바라보며 잔인한 2013년의 봄을 살아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간담을 써늘케하는 싸이코패스들은 어떤 모습이며 누구일까 범인을 찾아보기로 하자. 범인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싸이코패스는 도드라진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없는 특징으로 특권층에 집중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우선 그는 자신만이 소중한 존재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우월감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관계된 것이 선이고 그걸 획득하기 위한 도구로 세상의 모든 걸 이용하려고 한다. 그들의 조치는 곧 법이며 설령 위법이라고 해도 나중의 일이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발상이다. 때문에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을 매우 자연스럽게 하며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그 이름은 공권력이다.

하나의 사안에 두 얼굴의 아수라 백작이 되는 건 다반사고 미디어의 포장으로 자신의 포악한 속마음을 부드러운 이미지로 포장하는데도 명수다. 교묘하게 폭행을 저질러 연쇄살인을 태연하게도 잘 하지만 웃는 얼굴로 사람을 속이는 일은 더 잘하며 사회적으로는 엘리트로 행세한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해도 너무 과감하고 배포가 커서 보통사람들은 당시엔 그것을 잘 모르고 오히려 철석같이 그 눈빛과 미소에 신뢰를 보낸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을 마음만 먹으면 죄책감 없이 해내는데 그것은 그들이 인간에 대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양심이 없고 죄의식이 털끝만치도 없고 무감각하고 동정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직 그들은 자신의 사적 욕망의 아바타로 그 자신이 절대 권력이 되는 것이어서 범죄를 그냥 실행을 한다고 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제거될 대상으로 개과천선이 절대 안 된다. 왜냐면 그들은 대화를 시도하는 자들(그의 정신적 자부심에 상처를 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소통거부)을 오히려 지목해서 연쇄살인을 하거나 수첩에 살인자 목록으로 적어두고 적개심이 커지면 그 자신만의 여러 방법으로 목숨을 빼앗는다고 한다. 물론, 그 방법은 직접적인 게 아니라 간접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엔 사회구조적인 모순은 가려져 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아주 오래전에 루소가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전제를 두고 말한다면 이런 범죄를 저지른 자는 그가 누구이건 간에 싸이코패스이고 범죄자이다. 그가 국가권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주 4.3항쟁과 80년 5월에 광주에서 저지른 피의 살육이 생각났고 길거리에 발붙일 자유도 빼앗겨버린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법으로 인정할 수 없는 유신헌법 그 자체를 누가 싸이코패스의 짓거리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노동자 권익을 위한다고 큰소리 친 국회가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한 악법을 생산하는 것을 누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노동자를 쓰레기 처리하듯 정리해고 하는 짓거리를,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길바닥에 머물 자유조차도 빼앗아버리는 비인간적, 반인권적 폭력행위를 누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위에 열거한 싸이코패스의 짓거리를 감안하면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행태에 비하면 유영철이나 강호순은 파리미인 동시에 사회구조적 모순의 피해자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고 했다. 그 원칙을 단순하게 적용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 같은 인간으로 적용받아야 하니까 평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고 이것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원칙이기도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법과 제도는 이런 가치에서 비롯되어 입법되고 집행되는 것이 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영철이나 강호순은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민중의 목숨을 앗아갔던,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권력자들의 싸이코패스의 짓거리에 철퇴를 가하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싸이코패스임을 확인시키는 것과 자본과 권력이 끊임없이 싸이코패스를 활용하겠다는 전략이 아니겠는가. 전두환은 어마어마한 살인범이자 5공 부패의 당사자인데 추징금은커녕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황제생활을 하고 있다. 유신의 원조가 권력을 장악하자 어떤 골빈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찬양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싸이코패스이거나 싸이코패스 같은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해온 불행한 역사이니 싸이코패스들이 거리에 넘쳐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금을 써가며 벌이는 그들의 통치본질은 자신들이 진짜 싸이코패스임을 숨기기 위해 더 많은 싸이코패스들(경찰 군대 용역등 폭력기구와 체제)을 만들어내는 일일 뿐이다. 노동자가 매일 죽어나가는 현실(분신도 죽음이고 정리해고나 비정규악법에 내몰리는 것도 죽음이다)의 대통령이 하는 일이라고는 패션 자랑이나 하고 있고 국가의 자존심을 아랑곳없이 서툰 영어로 연설을 해대며 즐거워하는 사이 한쪽에선 뒷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성추행 의혹(변태싸이코패스)이 국가를 당황하게 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침략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싸이코패스에게 동맹을 다진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본질이 꿈적도 안할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인데 그런 것을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쇠로 넘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우리 곁에 상식과 범주를 벗어난 싸이코패스가 늘 같은 호흡을 하며 존재한다. 겉과 속이 다르지만 오히려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는 사람 중에 싸이코패스가 숨어 있다고 하니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인데 무엇인들 없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화나 미디어가 붐을 만들어 사람의 심리와 범죄를 운운하는 것은 자본과 권력의 통치전략으로 인간과 인간을 서로 갈라놓는 음모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 내부에 대립구도를 만들어 통제를 원활하게 하고, 기본권을 유린하며 자본의 억척논리인 경쟁이라는 표현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야만의 본질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부르주아 미디어들을 매순간 접하고 사는 우리들은 망각하지 않는 자각의 순간과 국가의 본질이나 세계자본주의 광란성도 기억에 남겼으면 좋겠다. 자본주의의 사적권력은 이윤배가에 충혈된 눈알로 인민을 배제하고 억압하며 생존을 박탈하는, 그러면서도 행복한 인류를 서슴없이 말하는 싸이코패스가 되어 있고 무수한 싸이코패스를 양산해 내어 인류를 암흑으로 서서히 몰고 가고 있는 중이며,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버린 그런 깊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 목숨을 버리는 노동자들이 자꾸만 이어지고 있다. 별나라도 아닌데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땅을 딛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박한 생존권조차도 봉쇄해버리고 억압하는 자들이 바로 싸이코패스 그 자체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살아남는 자가 강한 노동자라는 말은 진리이며 희망일 것이다. 노동자는 거대한 한 몸이어야 변혁세력이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의 전망을 다시 확인하고 ‘싸이코패스 없는 세상을 향해 희망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당위적인 말이지만 그래도 읊어보고 싶은 5월의 밤이다.

그리고 꽃향기에 젖어 한번쯤 봄을 나누고 싶었던 밤길의 가난하고 수줍은 그 젊은이도 개나리처럼 예쁘게 웃는 여자와 차를 마시는 소망을 이루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이웃은 어렵게 일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 아직은 더 많다. 묵묵히 일하고 열심히 투쟁하는 노동자라면 더더욱 싸이코패스가 될 가망성이 없으니 한번쯤 옛날처럼 낭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어렸을 땐 뒤에 따라 오는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길동무가 되기도 하고 정겨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기만 하는 삭막한 세상이 아니라 엄동설한에도 이웃과 따스한 정을 나누는 거리였으며 이웃이었다. 라일락의 꽃말인 '젊은 날의 추억'이 스며드는 봄밤이다. 추억을 내일의 희망으로 삼고 원래 봄의 기운인 새로움과 창조의 꽃향기가 모두의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계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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