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꿈꾸면서도 행복을 증오하는 세태

[양규헌 칼럼] 호랑이와 곶감 그리고 사회주의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행복을 꿈꾸면서 그것을 증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이라면 달콤한 사랑의 대상을 꿈꾸면서 그를 차마 증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평화를 말하면서 나라의 부를 막대한 무기를 구입하는 일에 바치는 통치자를 그냥은 보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사회 사람들은 행복을 꿈꾸면서도 진짜 행복한 세상을 증오하게끔 설계되어 왔다. 정신이 올바로 박혀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차단당해왔다는 말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가설은 아직도 정상적 가치관의 소유자에겐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매력 있는 가설이다. 자본의 무한한 증식을 위해 인간을 마모되는 기계부품처럼 취급하고 수많은 범죄를 양산하게 하는 악질 자본주의 체제 어디에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공간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부도덕과 무능으로 얼룩진 한국의 지배계급은 오늘도 행복주택, 행복기금 행복일자리 등, 행복신드롬이 된 행복타령으로 국민행복을 외친다. 그들이 외치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왜냐면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절대적 패권을 보장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를 전제로 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툭하면 국민의 반을 종북 올가미에 씌우는 그들이기에 그들이 상정한 적은 북한식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모순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일 것이다. 전쟁을 겪은 불행한 민족이기에 공포의 집단 심리로 작용하게끔 그들은 반공의식을 철저히 통치에 이용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국민으로써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이것은 정상심리가 아닌 정신병적 증오심으로 국민의식을 길들여온 반세기의 그늘이다.

여기에 극우 반동들은 그들이 즐겨 부르는 독점적 처방이므로 말할 것도 없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무의식에 드리운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를 지우긴 어려운가 보다. 극단적인 자기방어 상태로 가면 독재자나 좋지 않은 걸 말할 때 20세기 사회주의를 비유해 자신의 처지를 빠져나가는 짓을 무의식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는 진보정치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대중정치라는 명분으로 우향우 현상과 강령을 손질하게 되면서 진영을 불문하고 일종에 공공의 적처럼 되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회주의가 그렇게나 나쁘고 사악한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러시아가 한때 가졌던 소련식 사회주의나 북한식 사회주의, 또 다른 지구상의 여러 나라가 실험하고 있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아직까지 인류는 진정한 사회주의나라의 성공사례를 가져본 적이 없다. 진정한 사회주의란 계급착취가 없어진 사회이고 해방된 사람들 모두에게 권력이 골고루 나누어진 사회이다. 종교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이든 자유롭게 사람들이 서로 나누며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는 공동체사회가 사회주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에 맞게 유토피아를 여러 형태로 꿈꾸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을 하는 형태대로의 계급을 인정하자고 말했었다. 작가로 사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가정부가 있다면 가정부를 위대한 인간으로 대우해주면서도 가정부는 가정부로써의 신분을 가져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계급은 철폐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계급은 놔두고 인간의 정신을 개혁하자는 말인데 이것은 지금도 많은 지배 언론이나 학자들이 통속적으로 떠드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진정성은 느껴진다. 그는 가정부에게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고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발에 키스를 해줄 수 있어야 할 만큼 인간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작가는 가정부보다 덜 존중받아도 된다고 말했었다. 유치원 아이가 유치원에서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생님이 밥해주는 아주머니라고 생각하는 심성과 같은 이야기다. 유치하지만 휴머니즘이 느껴지기도 해서 웃어넘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은 아주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행복을 말하면서 진짜 행복한 것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금지당해 왔을까. 인류가 상상한 유토피아나 행복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가 더 올바르다는 확신으로 그것을 현실에 실현하기 위해 실제 행동을 하기도 하며 기득권세력에 폭압적 탄압을 받으며 그 질긴 생명력을 가져왔다는 것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건 자연스런 사람의 이성능력이 아닐까 생각되어지는데. 우리는 그런 인간의 자연스런 심성과 이성능력을 모조리 차단당하며 정신의 불구로 존재해 왔던 게 아닐까.

아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호랑이와 곶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이의 칭얼거림을 그치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쓴 처방은 “호랑이가 왔다. 울지 말아라.” 이다. 그래도 아이가 계속 울자 호랑이는 내심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어머니가, “곶감 봐라. 울지 말아라.”하니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 그러자 호랑이는 곶감이라는 놈이 자기보다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고 때마침 들어온 소도둑은 호랑이를 소로 착각하고 등에 올라탄다. 호랑이는 이놈이 곶감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죽을힘을 다해 줄행랑을 친다. 지금도 호랑이는 등에 그 무서운 곶감을 지고 달아난 밤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원래 용맹한 숲 속의 왕자 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한 것은 곶감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몰라서였을 것이다.

제국주의에 의해 두 동강난 민족의 현실은 우리에게 곶감을 무서워한 호랑이 신세가 되게 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약에 호랑이가 곶감을 황홀한 맛을 주는 달콤한 그 무엇으로 알았다면 무서워 도망치기 보다는 육식동물임에도 그 맛을 알기 위해 각고의 참선을 해가며 이상향에 다가갔을 것이다. 예전에 먹기 싫은 마늘과 쑥을 먹으면서도 단군이랑 결혼 못한 한도 되새겨보면서 말이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숲을 산책하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협동하며 도구를 만들고 들과 산에서 수확한 먹거리를 구해와 함께 나눠먹으며 살았던 사회는 계급적대 없는 원시 공산제사회였다.

이후 인류는 노예제사회와 봉건제 사회를 거치며 계급사회로 분화했다. 소수에게 독점된 부는 인류문화의 많은 부분을 축적했고 과학을 발달시키는 역설의 길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이성에 근접하게 발전해가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발전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역행하는 부조리한 사회였다. 지구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해내면서도 그것이 돈이 되지 않으면 바다에 버렸다. 이처럼 자본주의 발달에 비례해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이 성장한 게 아니라 반비례하는 문명의 야만을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있기에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 이행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인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전술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최고의 전술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 1%를 제외한 전 민중이 곶감을 무서워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곶감이 맛있는 음식이라는 진실을 알아차린 용맹한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숲은 숲으로 다시 살아나고 사람은 인간으로서 존엄이 인정되는 것이며 행복에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주의는 돈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행복한 세상이지만 지금은 반동의 유토피아가 검은 장막으로 불쌍한 호랑이들에게 끊임없는 주술을 외우고 있다. 사회주의 곶감은 아주 나쁜 빨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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