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항쟁 송령이골 보고 가슴이 아렸다”

[인터뷰] 송령이골 표지석 건립에 나선 구로연대파업 김영미 위원장

"의귀 송령이골은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에 당시 버려지다시피 매장한 상태 그대로며 최근까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고 있는 제주 4.3 희생자 집단묘지이다.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이곳을 벌초하고 천도재를 치른 이후 세운 표지판과 자그마한 방사탑이 세워져있다. 이곳은 1949년 1월 12일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 매장된 곳이다. 시신 수습 당시 구덩이 2개를 파고는 버리다시피 매장한 상태 그대로이며 최근까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고 있다. 이 무덤에 묻힌 시신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15구 정도가 될 듯하다."

-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4.3항쟁 기행 자료집 중


제주4.3항쟁 희생자 무장대의 시신이 버려진 곳 ‘송령이골’을 만나고, 자발적으로 표지석 건립에 나선 사람들이 있다. 지난 3월 15일부터 17일 2박3일간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추진한 제주역사기행 ‘제주 4.3, 그 속으로 떠나는 길’ 참가자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송령이골에서 이제 글귀마저 비와 바람에 씻겨 흔적이 사라지고 있는 낡은 표지판을 바라 본 참가자들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역사기행 둘째 날을 마친 뒤풀이 자리에서 80년대 구로연대투쟁을 이끌었던 김영미 위원장(당시 효성물산노조 위원장)이 먼저 말문을 열면서, 표지석 건립에 동조하는 마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제주4.3항쟁의 희생자, 제주 민중들을 지키려고 자신의 몸을 던졌던 무장대의 시신이 4.3평화공원에 안치될 수 없는 비극의 역사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김영미 위원장은 “이번 기회로 육지 사람이 제주도민에게 갖는 미안한 마음, 같은 민족으로서 몹쓸 과거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제주도민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 4.3 표지석 건립 추진위원회 김영미 위원장을 만나 표지석 건립과 관련한 활동을 들어본다.

[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무장대의 유골터, 최소한 무덤으로서 흔적도 없어요”

바쁜 와중에 제주도까지 다녀왔네요.

한내 회원인데, 올해 2기 제주4.3 역사기행을 간다고 해서 신청했어요. 제주도는 예전에 전노협이나 민주노총 활동할 때 여러 차례 노동자 교육과 투쟁 등으로 간 적이 있어요. 2003년 제주도 평화축전 당시 북한 관련 행사 일부를 내가 맡아서 제주도에 다녀왔고요. 그래도 제주도를 둘러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꼭 가보고 싶었는데, 한내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해서 같이 가게 됐어요.

그럼 제주 4.3항쟁 역사기행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2박3일 동안 송령이골 외에도 여러 곳을 둘러보셨죠?

제주4.3은 가이드가 누구냐에 따라 역사를 마주하는 시각이 달라질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이 있어도 철학에 따라 평가하는 게 달라지잖아요. 왜곡되기도 하고요. 처음에 4.3기념관에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역시 ‘백비’였어요. 4.3을 무엇으로 규정할 지 합의되지 않으니 백비가 이름 없이 누워있죠. 어떤 합의를 통해 어떤 글이 백비에 쓰일지 알 수 없는 일이죠. 남아 있는 우리들의 역할일 것입니다.

4.3기념관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여행을 별로 하지 않는 제가 말이죠. 제주도 인민위원회 결성 선언문도 기억에 남아요. 항일투쟁 활동가들이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대중의 지지 속에서 출발했죠. ‘투쟁과 대오는 강력했지만 품성이 온건했다’는 문구가 있더군요. 중앙 인민위원회와도 거리를 두어 독자성이 강했다는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거죠(웃음). 인민위원회가 치안활동도 하고, 마을 행정도 주도했죠.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자치 내에서 주도력을 확보하다가 일방적으로 미군정에 의해 타살되기 시작했죠. 관덕정, 이덕구와 안세훈의 묘, 북촌마을과 다랑쉬굴 등을 비롯해 4.3기념관에 들어갈 수 없는 이름 없는 수많은 무덤들을 다녔습니다.

의귀리 송령이골은 기행 마지막 날 일정이었습니까?

둘째 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갔죠.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송시우 역사 선생님이 가이드였어요. 그분이 날을 세워 설명하지 않았지만 송령이골을 말하는 눈빛에서 울분과 안타까움을 봤어요. 수없이 많은 무덤을 봤지만 송령이골을 보고 표지석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송령이골은 억울하게 죽어가는 제주도민을 구하러 갔다가 대부분 사살된 무장대의 무덤이잖아요. 군인토벌대가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의귀초등학교에 가두니까, 소식을 듣고 주민들을 구하러 간 것이죠. 신식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이길 수 없었겠죠.

2중대 군인이 의귀리에 주둔하면서 의귀리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됐다고 해요. 군인토벌대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학살을 서슴지 않았고,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 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답니다.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아무도 손대지 못한 것이죠. 송령이골은 최소한의 무덤으로서의 흔적도 없는 곳입니다.

흔적도 없는 무덤이면 보통 사람은 찾기도 어렵겠어요.

무덤 몇 개, 뭐 이런 곳이 아니라 마을로 좀 올라가면 마을 어귀에 있어요. 그곳에 거적도 없이 시체를 쌓아 놓은 것입니다. 무장대의 시신을 말이죠.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2004년 나무판으로 표지판을 만들었는데, 이제 글도 지워져가요. 이마저 없었다면 무장대의 유골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걸 보고나니 가슴이 굉장히 아려서... 역사기행 단원 모두 비참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제주4.3에 대해 아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희생자들을 어떻게 복원할 지, 명예 회복할 지, 위로할 지 등 수습할 수 없었던 거죠.

무장대의 부모라고 말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시절의 영혼들입니다. 그 마음까지 전해지는 것 같이 굉장히 슬펐습니다. 미루어보건데, 이곳은 두려움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시체가 쌓여서 오늘까지 그대로 방치된 것이라 이름도 유골터예요.

[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주민들의 시신은요?

제주도에 막상 가보면, 주민들 시신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건 초점이 없는 질문 같았어요. 제주도민이 당시 40만 명인데, 4만 명이 죽었다니까 10분의1이 죽은 거예요. 주민의 무덤 일부만 복구된 건데, 상처가 깊어 이웃 간에도 말하지 않으려고 하죠. 밤에 집을 비우고 도망가야 했던 사람들은 살아있던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고, 낮에 산을 내려와 마을을 뒤졌던 사람들은 밤에 집을 나간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서로 누가, 왜, 죽었고 죽였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죠.

제주도 친구가 “제주도는 민족상잔이라는 말, 한 민족이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죽였다는 것도 사치스럽다. 부자상잔이고, 형제상잔이고, 모녀상잔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뻔히 방 안에 있는 것을 알면서 아들을 숨어들게 하고, 아들이 방 안에 있는 것을 알면서 아버지 손으로 집을 불 지르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북촌의 경우 마을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했잖아요. 제주4.3연구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이 많이 남아있죠. 가족을 잃은 피해당사자들은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자발적으로 표지석 건립, 마음이 통해버린거죠”

‘가슴이 아렸다’고 했지만, 그래도 많은 곳 중 왜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송령이골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결정했는지 궁금합니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면 죽습니다. 무장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타심을 가지고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주민들을 구하려고 했고, 가혹한 탄압과 대량학살이 중단되길 염원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 것이냐, 공익을 위해 살 것이냐 선택이 요구되지요. 이런 점에는 나는 무장대의 정신이 굉장히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장대의 정신과 가치는 계속 후배들이 재조명해나가야 하죠.

또 한편으로 당시 무장대원에 대한 외부 유입설이 있었지만 낭설임이 밝혀졌어요. 무장대는 왜곡되고 매도당해 왔죠.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면 엄마 말도 안 듣는데(웃음), 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인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컸죠. 나의 삶도 누구에 의해 배후 조정된 삶이라고 매도당해 왔습니다. 인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중요한 무기를 가지로 태어났는데, 죽음도 억울한데, 무장대는 재조명되지 않고 있죠.

역사기행단이 자발적으로 표지석 건립에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다 추진위원장까지 맡게 됐나요.

사람들이 떠밀어서요(웃음). 송령이골 갔다가 저녁 뒷풀이를 하는데 모두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냥 ‘하자!’ 하면서 쭉쭉 추진된 거예요. 미리 표지석을 건립하자고 정한 것은 없었어요. 탁발순례단이 만든 나무판 글자가 지워져가고, 얼마나 유지될 지도 모르는 일이죠. ‘우리가 최소한의 역할은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통해버린 거예요. 그 자리에서 추진위원 뽑고, 결의하고, 추진위원장까지 맡게 됐어요.

[출처: 미디어충청]

표지석 건립 추진이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일정은요?

500만 원 모금이 목표인데, 현재 400만 원가량 모였어요. 8월까지 모금운동 더 하고, 표지석 건립 관련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아요. 의귀리 주민들과 의논해야 하고, 그곳 땅이 사유지인지 국유지인지 등에 따라 준비해야 할 과정도 달라지겠죠. 우리 일정만 고려할 문제가 아니죠.

솔직히 표지석이야 돈만 내고 어느 작가 선정해 만들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의 마음을 모아 다시는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제주도민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야죠. 우리 준비 정도에 따라 비용을 모으고, 비용 규모와 진행정도에 따라 표지석만 세울지, 돌무덤이라도 만들 지 등은 나중에 판단할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모금에 동참해 주는 거예요. 최대한 많은 돈이 모여서 힘 있게 멋진 출발을 하고 싶습니다. 송령이골 뿐만 아니라 표지석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더라고요. 제 2, 3의 표지석 건립이 이루어지면 좋겠죠.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와 의무를 위해 송령이골 표지석 건립이라는 작은 행동에 동참했으면 해요. 누구나 제주4.3 표지석 건립 추진위원회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
덧붙이는 말

송령이골 표지석 건립 모금계좌 = 노동자역사한내, 794001-04-9967,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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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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