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과 민주주의 교육

[양규헌 칼럼] 구멍 뚫린 항아리 '역사인식'...물 붓기 전에 구멍 먼저 때워야

불볕더위와 이상한 기습장마 때문에 가만히 있기에도 기분이 찜찜해지는 날들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 고속도로가 정체되기도 했지만 촛불 시위에 마음속의 불을 끄러 모이는 시민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나랏일 한다는 작자들이 휴가를 핑계로 국정감사를 보이콧하고 저도를 한가롭게 떠돌던 대통령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글씨를 모래위에 낙서하는 것으로 생존에 힘겨워하는 민중을 위해 ‘한가녀’(한가한 여자)코스프레를 했다. 그것의 결과물은 비서질장 김기춘의 재등장이다. 아마도 모래위에 썼던 마음속의 글씨는 ‘유신의 추억’이었던 모양이다. 촛불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야당이 타이밍 늦은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나오는 것과 병행하여 유신의 ‘올드보이’는 전격 등장했다. 박정희 유령의 부활은 새삼스러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딸이 권력획득을 한 시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합리적 이성을 가진 귀여운 보수세력(표창원을 필두로)들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성공을 비는 마음으로 갖은 충언을 했더라도 그것은 순진한 기대였던 게 여실히 드러나게 된 최근의 상황에서 ‘7인회의 수장격’이라는 김기춘은 부활했다.

그는 유신헌법에 관여한 정수장학회 학생이었으며 이후 시민의 데모크라시가 커질 때마다 공안사건을 일으켜 진보세력을 때려잡고 수구 반동세력에게 반전의 선물을 주곤 하던 공안 검사였다. 음모와 북풍공작의 대가였으며 지역감정으로 국민을 분열시켜 권력을 획득하는데 이골이 난 낡은 세력의 전형이다. 그런 낡은 '올드보이'가 21세기 청와대 뜰을 대통령을 보좌한다며 나란히 걷고 있다. 도대체 저런 기운과 몸짓과 얼굴에서, 피로해져 있는 민중을 위한 무엇이 나온다고 대통령은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일까? 인민이 뽑은 대통령인데도 갑자기 오래된 궁의 십상시(권력을 휘두르는 옛중국의 내시들)에 둘러싸인 공주로 시간여행을 간 듯한 묘한 기분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과거로 자꾸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힘을 가진 세력들에게 대항하는 심리가 팟케스트 대안 언론을 중심으로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전개되는 걸 볼 수가 있다. 비록 주류언론과 방송, 뉴라이트가 벌이는 수구 이데올로기에 비한다면 전 국민적인 반향이 미미하긴 하겠으나 가히 ‘역사전쟁’이라고 할 만큼 현대사를 다루는 팟캐스트나 케이블 채널의 역사논쟁은 아주 치열한 편이다. 민주주의 반대는 종북주의라고 알고 있는 수구세력 그룹과 역사교육을 전혀 하거나 받지 않아 유신시대를 김유신으로 알고 있는 젊은 애들을 계몽하겠다는 눈 밝은 애국심의 발로로 싸우는 피 끓는 전사(날것 그대로 비판하는 팟캐스트들은 잡혀갈 각오도 하고 있는 듯 센 이야기를 하다가도 마지막에 자기 점검을 하는 멘트들을 날림으로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역사전쟁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수구세력들의 진원지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친일파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탈한 과정은 여러 가지 경로로 치밀하게 기획된 음모와 사기의 결과물들이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내부 분열은 일제가 제일로 치던 모략이었다. 그 과정에서 친일파는 물론 작위를 받고 문서로 나라를 팔아먹은 지배계층과 지식 양반계층에 많았지만 생존하기 위해 기타 백성계급들도 친일파(화투를 들여온 일제는 굶주리는 농민들에게 화투로 희망을 삼게 해주어 나중엔 토지를 강탈해 가기도 했었는데 이럴 때 철저하게 조선인을 이용했다고 함)노릇을 하며 생존을 구가 하던 척박하고 불행한 시대였다. 이런 일제의 잔악한 통치행위를 그대로 본받아 지금까지 모략과 음모의 정치로 헤게모니를 장악해오던 세력들이 지금의 수구세력들이기 때문이다. 천황폐하의 내선일체와 아시아공영은 조선의 내부 신분모순을 극대화시키며 철저히 국민내부를 갈라서 하는 식민통치 방식이었다. 국민통합을 외치면서도 공작정치로 국민을 분열시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뼛속까지 그들의 통치술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래 이것은 친일파의 대대손손 대물림 권력과 부의 승계가 맞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고 그의 정치 아이덴티티는 제국주의 일본에 있기 때문에 극우 일본을 모방해서 정치를 했던 것은 소소한 역사가 증명하니 말이다.

뉴라이트 교과서 준동은 차치하고라도 지난 대선 때 이정희의 다카기 마사오 발언으로 박정희의 옛날을 비로소 알게 된 젊은 층들이 많아졌다는 것에 역사교육의 부재에 대한 심각성은 더 해졌고 이런 문제의식은 여러 곳에서 나름으로 커져왔었다.

현대사 부분은 교과서에서 양념으로 조금 다루고 넘어가거나 아예 언급이 없고 당대가 아니면 잘 몰랐던 사실들과 미스테리(육영수 암살사건, 장준하사건 등)로 남겨진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을 면면히 다루어주니 팟캐스트 방송이나마 있으니 다행이고, 국정교과서에서 누락시켰던 독립운동사와 지사들의 인간면모를 들려주기도 하니 드라마를 듣는 것처럼 역사에 방심하던 젊은 층을 일깨우는 나름의 신선한 민주주의 교육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우선은 든다.

그러나 왠지 구멍 뚫린 항아리를 보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즉 구멍 뚫린 항아리를 내려 받은 채로 거기에 끊임없이 물을 붓는 행위. 그것이 지금 회자되는 역사인식과 그것의 논쟁이 벌이는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구멍 난 항아리가 문제이지 않을까. 구멍 난 항아리를 모르지 않는 다 해도 역사가 굴러온 파행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구멍을 때우는 일이 먼저이지 않을까.

일제시대와 일제이후의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세력들에게 대항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교육하여 뉴라이트식의 역사관을 옳지 않게 받아들이는 역사교육은 앞으로 살아나갈 세대들에겐 절대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고 훌륭한 민주시민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방패 같은 것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버젓이 지상파 언론에 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좌파교과서를 척결한다며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보니 한 아이돌 가수가 민주주의자를 왕따주의자로 생각해서 자신은 절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해 역풍을 맞은 사건을 보면 뉴라이트들의 선전선동이 가십거리만은 아닌 것이다.

이미 민주주의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반대는 독재일터인데도 끝까지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생각하고 사는 기성세대들이 많듯이 새로운 민주주의는 왕따주의로 귀환해서 의미를 상실한 채 끊임없이 유동하는 자본주의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형국이다. “내가 제일 잘 났어. 내가 제일 예뻐”하며 나르시시즘에 빠져 된장녀로 세상 사는 재미에 푹 빠져. 무엇이 더 필요해? 하면서 까르르 웃는 아이들 세상에서. 이미 진정한 민주주의는 얼굴을 잃어버린 미녀처럼 되어버렸다.

역사교육에는 두 가지가 있다. 국사교육과 세계사 교육일 것이다(이것이 나누어져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마찬가지다). 지금 뉴라이트 교과서와 수구세력들이 왜곡하고 싶어 하는 부분은 자신들의 영구집권 획책을 위한 사업으로 국사책과 국사교육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이에 반대하는 양심세력들은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민중은 미래에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는 민주적 가치와 민족적 가치에 임하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교육이 국사와 세계사로 나누어져 있고 그것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한 구멍 뚫린 독에 물 붓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국사와 세계사는 하나의 역사이지 두 개이거나 별개의 따로 가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우리는 1950년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간단하게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명명 일뿐 본질이 새겨진 실체의 명칭은 아니다. 구멍을 메운 항아리라면 이렇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1950년 동아시아 한국에서 발생한 인류의 세계전쟁’이라고 말이다. 첫 번째 명명에서 학생들이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족상잔을 일으킨 북한 공산주의는 뿔 달린 도깨비일 뿐이고 강대국의 핵을 써서라도 영원히 제거되어야만 하는 악의 세력이다. 이것뿐이다. 이것은 우리도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고 전쟁세대는 직접 그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잘 안다고 더 아우성쳐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사를 배우든 안 배우든 그것은 뉴라이트가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국사시간을 부활하라고 외칠게 아니라 국사와 세계사와 인류사가 함께 녹아있는 역사교육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역사전쟁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교과서에서 그나마 새끼손톱처럼 언급되어 있다던 독립운동도 진실은 축소 은폐 되어있다. 일제하에서 가장 치열하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민족주의자들만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민족해방과 인간해방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은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항일무장대들이었다. 이 부분의 역사는 국사만으로는 진정한 복원이 안 된다. 국사만을 보는 근시안으로는 사회주의자들을 복원해 낼 수 없다. 국사를 보는 즉 민족의 편협함으로 보면 미국이나 소련이나 똑 같은 외부세력이고 레닌에게서 나온 민족자주원칙이 윌슨의 민족자결로 둔갑해도 상관치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진실은 모르쇠가 되고 주입받은 이데올로기만 지상명령이 되어버리는데 이런 부주의와 불철저는 민족감정으로 허용되어 버린다. 민족감정은 집단감정이고 그것은 쉽게 전이되는 동물의 감정이다. 자유주의 양심세력들은 김구를 내세워 민족의 영웅으로 주장하고 싶을 것이고 수구 세력들은 이승만을 민족의 아버지로 주장한다. 이들을 민족이나 국사의 시각으로 보면 보는 사람에 따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부 이승만,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은 김구로 나누어 가치를 달리 해 평가가 틀려지겠지만 세계사의 면면과 세계사속의 한국정세를 보아 판단했을 때는 그 위상이 한참 달라질 것이다.

즉 진정한 가치는 민족이라는 허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민족구성원을 이루는 구체적인 사람들. 즉 일하는 다수의 사람들. 뼈 빠지게 일하지만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인민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과 같은 실체가 가치를 대변하는. 그것이야 말로 진실한 역사가 이며, 이런 것들이 진정한 역사교육의 실체가 아닐까. 일제시대에 배고픔이 너무 심했던 백성들은 일왕이든 조선왕이든 너무 걷어가지만 말고 먹고 입을 거리를 좀 넉넉하게 주는 왕을 더 고맙게 생각했을 거라는 말들이 거리에 돌아다녔다. 이것이 현실에 주어지는 무서운 진실이다.

일제가 조선사회를 붕당사회로 평가절하하며 조선은 잘 뭉치지 못하는 분열된 민족이라며 식민사관을 만들어내면 그게 아니라고 민족사관을 만들어내어 대항하고 싶은 마음은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지 모르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인 걸. 현실을 변혁시키고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사교육은 인류사와 그 인류사에 속한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인류사에 공헌했고 어떻게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왕 이름이나 외우고 몇 년에 무슨 전쟁이 났는지 관료제는 몇 등급이고 세금제도는 어떻게 변했으며 등등, 별 반 몰라도 되는 지식을 주입식으로 넣어주는 이런 역사교육이라면 암기목록이 늘었을 뿐 그렇잖아도 입시에 찌든 학생들만 피곤 할 것이다.

즉 국사로 한정된 역사교육을 안 해서 제나라 역사에 대해 무지 몽매한 다음 세대를 만들어내는 것에 버금가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제대로 된 세계사와 자기나라의 관계에 관한 인식과 가치의 지향점, 암기목록으로 나열된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토론이 활성화되는 인간교육이 주가 되는, ‘무엇을 어떻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무릇 교육의 모든 목적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니 말이다.

촛불이 조금씩 동력이 붙으면서 어린 자녀와 청소년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모들이 많이 보인다. 시민이 광장에 모이면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 교육이 장이 된다. 언론이 은폐하고 방송이 숨기기에 바쁜 살아있는 역사의 교육 현장을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흔히 파업현장이 노동자에게 짧은 시간에 권력과 자본의 본질을 보게 하는 정치교육의 장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시민광장 또한 그러 할 것이다. 반대편에 뻘짓하는 가스통 할베들도 역사전쟁의 끄트머리에 서서 자신들을 주장하느라 바쁜가 보다. 이사람들이 진정한 권력자의 편에선 사람들이라면 왜 집회를 하는지 모르겠다. 집회는 권력에 소외되고 억압된 다수의 군중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함께 내기 위하여 모인다는 걸 모르는 것인가. 권력자의 편에 있으면서도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이들이 얻어먹은 떡고물을 생각하니 일제의 친일파들이 묘하게 떠오른다.

나라를 팔아 떡고물을 먹고 제 이웃을 때려잡아 떡고물을 기다리는 민주주의 적들이 위에서 옆에서 민주주의를 몸으로 익히는 지상양식인 집회장을 왕따장으로 만들고 있다. 경찰의 차벽이 둘러쌓이고 광장에 모이려는 민주주의자들을 못 들어가게 차단시키고 있다. 차벽과 화단이 진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 또한 낡은 시대의 유물이다. 바야흐로 십상시의 한나라가 유신의 심장을 열어 재끼며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종말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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