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말’이 아닌 ‘말과 활’이길

[새책] 말과활 (격월간 2013. 7~8월호 창간호, 2013.7, 424쪽)

한 달째 이 책을 소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홍세화 전 진보신당(현 노동당) 대표와 일군의 사람들이 협동조합 가장자리를 만들었다. 이 책은 그 협동조합의 기관지 형식으로 나온 창간호다.

본론부터 얘기하면 너무 어렵고 장황하다. 지극히 상식 수준의 말을 이렇게 길고 현란하게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현장과 현실의 삶과 생활에는 젬병인 80년대 지식인 혁명가들의 현학적 글이 너무 많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글은 개수는 적지만 이 책에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몇몇 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쓴 것 같다. 조효원의 ‘바쁨과 물러남 그리고 어긋남에 대하여’는 최악의 말장난이다. 박권일의 ‘자유의 모험, 안전의 성채’ 역시 비슷하다.

그러나 밀양의 한 중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이응인 씨의 ‘분노에 주름지다’는 민중적 해학이 넘치는 글이었다. 이 책에 나온 30명의 글 가운데 최고였다. 귀촌한 시골 아줌마 명인의 ‘회사를 해고하다’는 역설적으로 대도시 서울의 팍팍한 생활이 잘 드러나서 좋았다. 쌍용차 해고자 이창근과 정진우의 글도 치열한 삶이 묻어나는 글이라서 좋았다. 박점규의 글도 건조하지만 군더더기 없어서 좋았다.

차근차근 들여다보자. 먼저 발행인 홍세화의 머리말 ‘불온하고 아름다운 상상이 세상을 바꿀 때까지’의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의 말은 다시 존재의 떨림과 긴장을 담아 체제의 모순을 겨냥해 날아가는 활”이 되고자 한다는 자기 결심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이 ‘말과 활’인 걸 깨닫는다. 맨 끝에 쓴 “우리의 말이 세상을 바꾸는 시간이 더디고 더디게 올지라도”는 출사표처럼 당당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면 ‘말과 활’이 아니라 ‘말과 말’ 같다. 지금은 ‘말과 행동’이 동시에 필요한 시기다. 잘못하면 발행인이 비판한 대로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고 투덜대지만 딱 거기까지”인 오늘날 좌파가 되기 십상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라는 기고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20세기 공산주의의 꿈은 경제적 파국, 윤리-정치적 파국, 그리고 또한 생태적 파국으로 귀결되면서 비참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 꿈을 배태한 문제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동유럽에서 사람들이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시위를 할 때 그들 다수는 자본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대와 기본적 정의를 원했다. 시위자들을 이끈 이상은 대부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20세기의 쌍둥이 괴물”이었다는 사실은 2차 대전 이후 유럽 시민이라면 누구나 상식이었다. 다만 우리만 1991년까지 이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지젝은 80년대까지 반공주의 암흑 속에서 지냈던 한국엔 새롭겠지만 서구에선 지극히 상식적이다. 지젝을 두고 ‘21세기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다. ‘말과활’이 그의 문화권력에 지나치게 기대려 한 게 아닌지 안타깝다.

편집위원회는 한국의 고졸 생산직 노동자가 200자 원고지 70매가 넘는 이 글을 쉽게 읽고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굴 상대로 ‘말과활’을 쏠 것인지부터 생각하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과 홍세화 <말과활> 발행인의 권두대담 ‘맹목과 무기력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는 오락가락한다. 기본소득제와 말과활의 성격, 인문학 열풍 비판, 대기업노조 비난, 사민주의 비판 등이 섞여 있다. 물론 이 모든 게 연결돼 있지만 글에선 잘 연결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너무 많은 걸 얘기하려 했거나, 아니면 정리하는 과정에서 앞뒤 없이 잘랐거나 둘 중 하나다.

대담 내용에 몇 가지 생각해볼 것도 있다. 홍세화 발행인은 “좌파가 녹색과 생태주의에 관심이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론 성장의 신화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 녹색과 생태주의는? 이 책에 박노자 교수가 쓴 ‘사민주의자의 꿈의 파산’에 답이 있다. “(한국내 사민주의자들의) 가장 큰 착각은 독일 사민당 같은 정당들을 ‘진보’ 내지 ‘좌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998~2005년에 이르는 동안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립내각이야말로 독일 역사상 가장 반노동자적인 정권”이었다.

다시 홍세화 발행인은 “(기본소득제는) 대기업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사회 주류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럼 기본소득제는 현재 수준의 한국사회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동의는 얻을 수 있는가. 수많은 빈민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먼저다.

김종철 발행인은 “차베스의 죽음에 대해 <한겨레>가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간단히 규정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나도 그 신문 싫다. 그러나 그 신문이 그래도 두 분께 지면을 열어주지 않았던가.

조효원의 글 ‘바쁨과 물러남 그리고 어긋남에 대하여’는 최악이다. “근데 -> 근대(近代) -> 그대 -> 거의 -> 기대”로 이어지는 말장난은 ‘차(差) 시대적 고찰(a distemporary meditation)’이란 작은 제목을 달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그대는 ‘근데’와 ‘근대’의 어긋남 위에 서 있고”, “그대는 ‘거의’ 살고 있거나 ‘거의’ 죽어가고 있는 셈”이란다. “차(差)시(대)인은 말하자면 끈끈이주걱으로 태어나는 존재다. 근데 그의 출생은 ‘거의’ 예외적이다. 다시 말해 그의 존재는 ‘거의’ 기적”이란다. 글쓴이 혼자서만 즐거운 이 말장난이 세상을 바꿀 순 없다.

2013년 5월 29일 저녁 밀양 송전탑 반대 촛불문화제 참가기를 쓴 이응인 시인(교사)의 ‘분노에 주름지다’는 이 책의 유일한 위안이다. 일흔의 노인들이 우리나라에 핵발전소가 ‘23기’이고 짝퉁 부품을 사용하다가 가동중단된 원전이 ‘10기’라는 걸 정확히 알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만 해도 눈물겹다.

시인의 눈엔 한전 사장 이름의 호소문도 좋은 글쓰기 재료다. “앞으로 한국전력은 횃불을 밝히며 야간 공사를 단행해서라도 전기를 농사와 일터로 차질 없이 내보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밀양엔 그런 전기 더 이상 필요 없다. 농사용 전기 때문에 송전탑 공사하는 게 아니다.

시골 아줌마 명인의 ‘회사를 해고하다’는 힘들었던 서울살이를 접고 전남 고흥으로 내려온 부부와 두 아들의 귀촌 결심 과정을 그렸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늘 4대 보험 사각지대에 살았다. 나는 장기투쟁사업장에 연대하러 다닐 때 기나긴 그 투쟁의 처절함과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노조깃발을 갖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이 글엔 이렇게 사람의 목소리가 담겼다.

그녀의 남편은 환경공학 분야의 정규직 전문기술직이었다. “우린 진보정당의 당원이면서도 우리에게 ‘지역’이란 말 그대로 ‘베드타운’에 불과했고, 우리는 한 아파트에 4년을 살면서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했다.” 훌륭한 고백이다.

“언젠가부터 옆지기(남편)는 회사에서 골프를 배우라는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기가 다니는 대안학교 학부모들 중에도 골프 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중산층 서울살이를 이처럼 사실적으로 쓴 글은 드물다. 그만큼 쉽고 좋은 글이다.

<88만원 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의 글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유의 의지와 안전의 의지의 공존은 어찌 보면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탁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이런 멘탈리티가 노골화되는 체제를 ‘신자유주의 2.0’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은 뭔가 말하려다 그만 둔 느낌이다. 다른 글에서 그녀는 뚜렷한 인상을 남겼는데, 아쉽다.

발행인 홍세화는 ‘말과활’을 ‘인문주의 정치비평지’, ‘진보교양잡지’라고 했다. 부디 ‘말과활’이 80~90년대 유행했던 사회과학 무크지가 아니라 ‘고졸 청년 실업자’도 읽을 수 있는 소통의 장이었으면 한다. 지식인들이 대졸 실업만 부각시켜서 그렇지 아직 이 땅엔 고졸 청년 실업자가 더 많다. 무협지처럼 공중 부양해 공상과학같은 담론만 쏟아내지 않고, 땅으로 내려와 처절하게 퍼져 나가는 ‘말과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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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 김종철 , 명인 , 가장자리 , 슬라보예지젝 , 조효원 , 이응인 , 박권일 ,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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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옳소!!!

    노동당에서 노동자들을 찾아볼수가 없는 이유는 자신들이 뭔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지껄이는 푼수들이 많기 때문이지.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면 난감해하면서 책 좀 읽으라고 다구리치는 놈들. 레드북스에 모여서 지네들끼리 좌파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몽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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