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조앤 롤링이 나올 수 없는 이유

[양규헌 칼럼] 창조경제, 공적자산을 사유화하는 시스템

선거가 끝났는데 아직도 선거정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착각이 생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평가가 지인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영양가 없는 논쟁으로 시끄러워지는 현상은 선거 때와 별반 차이가 없으며 이런 논쟁에 등장하는 논리는 실종된 지 오래고 무조건 지지만 남는다. 박근혜정권이 분단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신종 매카시즘을 동원한 막말 정치공세와 무차별 공격에 공권력과 정보기관들이 광기의 공세를 펴고 있다.

이런 과정을 언론은 여과 없이 받아 재가공하여 퍼트림으로써 이제 찌라시 언론들은 괴물이 되고 있으며 작금의 분위기는 유신시대를 훌쩍 건너가 일제강점기로 돌아간 기분마저 든다. 객관성과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인터넷 기반 진보언론들은 스스로 독립군이라는 칭호를 써야할 만큼 비장함을 가져야 하는 그런 상황이다.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면 오랜 우정도 단칼에 정리하려는 그들의 태도에서 섬뜩함과 함께 슬픔이 밀려온다.

물론 그들은 촛불을 알리도 없고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퇴행하고 말뿐인 민주주의를 절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고, 국회라는 민주적 형식이 있으며 죽도록 돈을 벌기 위한 무한한 자유가 있고 그 자유만큼 자유를 누리고 사는데 뭔 독재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어렵게 사는 것은 무능력이라고 우겨댄다. 지배계층은 사회의 소수지만 그 사람들이 퍼트린 이데올로기는 일반 대중들에게 자본주의의 환상을 심어줌으로서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부인한 채로 영원히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는 꼴로 살아가게 된다. 여기에는 자본과 결탁한 정치권력이 최상의 화음을 이루어냄으로써 재벌이 소유하고 있는 언론의 효과가 극대화를 이룬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민중들에게 거듭 강조되었던 박근혜 후보의 '창조경제'는 시작부터 기만이었다. 그 근거는 취임 6개월이 훌쩍 경과해도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려가기보다는 국가부채만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가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민중은 '창조경제'를 신뢰하고 경제위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최근 국제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경제의 사례를 든 것이 외교적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사하는 거짓과 위선도 대통령 정도 된다면 우아하고 철학적이고 정책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제출되어야 한다. 정책내용에 어떤 꼼수가 담겨져 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 민중의 판단은 '창조경제'라는 말을 복지 경제쯤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해리포터라는 단 한편의 소설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영국의 조앤 K 롤링의 일화는 유명하다. 글을 쓰고 싶어 일을 할 수 없었다는 그녀는 아기를 키우는 엄마에게 나오는 기초연금 비슷한 복지생계비로 장시간 생존을 버티며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아픈 몸으로 글을 쓰다가 배고픔으로 죽은 대한민국의 시나리오작가와는 같은 체제에서도 너무나 차이가 나는 일이 아닌가? 또 있다. 소프트웨어로 창조경제의 제왕 칭호를 받던 스티브잡스의 경우도 개인의 창발성을 인내심으로 받혀준 그 사회의 개방적인 시스템이 있었다는 것은 잡스 자신의 이야기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세계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창조경제'의 대표사례로 '싸이'를 거론했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창조경제'라는 개념을 유심히 들어보면 규제를 풀어 투자를 하게끔 하는 세일즈외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언어도단이다.

예로 들었던 '싸이'의 경우도 기획사와 '싸이'의 의견이 좀 달라서 유튜브로 전달매체를 정한 것은 '싸이' 본인이라고 한다. 돈이 많은 기획사는 유튜브라는 인터넷 미디어를 아마츄어들의 경연장 정도로 얕잡아 보았을 것이고 '싸이'는 매체의 월드와이드 속성을 꿰뚫어 보고, 프로지만 모험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만약 그가 안 떴으면 '싸이'는 싸구려 딴따라로 전락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는 건 '창조경제'를 하는 진짜 주체는 돈 많은 대형기획사나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획사가 만들어내는 소녀시대 정도의 작품은 돈이 들어간 만큼의 수익을 올리는 구조가 분명하니 '창조경제'로 볼 수는 없다. 배도 나오고 적당히 울퉁불퉁한 근육의 '싸이'가 왜 사람들에게 선풍을 일으켰는지를 박근혜 대통령이 이해할 수 있을까. '창조경제'의 사례로 든 '싸이' 이야기를 들은 세계정상들의 웃음은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는 '싸이'와의 비유에 웃었을까. 아니면 박근혜정권의 '창조경제' 본질을 알고 있는데도 그가 허튼 소리한다고 웃었을까.

박근혜는 독재자 아버지를 버젓이 정치의 모델이라고 말하고, '창조경제'를 입안했던 사람은 내쫓아버리고, 유신에 광적인 아버지의 친구 군사독재, 반공보수주의자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대담한 결단에서 유신시대의 살벌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국가부채가 1000조에 육박하는 위기 상황을 파쇼체제로 극복하겠다는 것은 노동자, 민중을 때려잡고, 기본권을 유린하는 체제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까지 겹쳐져 결국 유신시대 보다 더욱 세련되고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탄압함으로써 노동자, 민중을 사회적 타살로 몰아간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대선을 통해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아버지의 원래 꿈인 ‘복지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온갖 사탕발림 공약을 했다. 그것을 진짜 사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대통령이었다면 온갖 우려와 염려에도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여성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취임 초기인데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까지의 행태로 보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가장이 부인과 아이들을 죽였다. 그 아이들은 15세, 17세였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주가 정당하게 기본적으로 해결되면 예술과 창조의 욕구로 인간임을 증거하고 싶어 한다. 이 황당하게 죽은 아이들의 재능과 욕구를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빼앗아 갈 수는 없는 것인데 돈 때문에 아버지는 혼자 죽지 않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창조경제'는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빼앗는 아버지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자식들이 가진 재능과 인격은 보이지가 않는다. 돈이 없거나 빚이 많아서 아이들이 살아갈 수 없다고 지레짐작해서 아이들 목숨을 빼앗아 가는 나라가 여성대통령이 통치하는 복지국가, 행복국가라면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다. 무상보육,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집 없는 사람이 노동자, 민중의 50%가 넘는 이런 사회구조에서 창조경제는 기만일 뿐이다.

정치는 간접정치든 직접정치든 노동자,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이 많으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프레임 속에서 자기들끼리 정쟁하는 것은 노동자정치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노동자, 민중을 선거 때 표 찍는 기계로 만들지 말고 사회의 절대다수인 생산의 주역, 일하는 노동자를 이 사회이 진정한 주인으로 세워내는 정치를 하여보라. 그때부터 화술로 장난치고 기만하지 않는 진정한 '창조경제'가 시작될 것이다. 자본가가 하는 경제는 일하는 사람들의 고혈을 짜냄으로써,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 쫓음으로서,비정규, 불안정노동자를 양산하여 같은 노동자를 대립시킴으로써 노동자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대가로 이윤을 창출하고 그래도 이윤이 배가되지 않으면 돈놀이를 통해 이윤을 보전할 것이니 절대 '창조경제'가 될 수 없다.

창조경제는 무조건 생산하고 쌓아두며 공적자산을 사유화로 바꾸는 시스템에선 불가능하다. 필요한 만큼의 계획된 경제와 사유화를 국유화시켜 냈을 때, 진정한 복지와 '창조경제'가 가능할 것이다. '창조경제'는 일하는 사람이 사회의 주인으로 대접 받음으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노동했을 때, 창발성에 따른 부가이익을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간의 뇌와 몸이 만들어내는, 일하는 사람, 생산하는 사람, 그리고 창조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경제'의 진짜 주체는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온 일하는 노동자의 손과 두뇌이다. '창조경제'를 진짜 알고 있다면 박근혜 정권은 우아하고 철학적인 보수 정치로나마 유턴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언론이 주야장천 만들어 모든 민중이 피와 살이 되도록 외우게 만든 ‘신뢰와 원칙으로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 패션쇼와 우스꽝스러운 외교를 하러 다녔던 파쇼공주로 인식되면서 이상한 레임덕에 빠지게 될 것이다.

파쇼정국의 억압 속에서 노동자들은 이전의 시대처럼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낙마를 당하거나 자살하거나 해서 파멸로 끝나버리게 된다. 줄줄이 기차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줄줄이 사탕으로 죽어나가야 하는 상황은 이미 도래했다. 비장하고 슬픈 일들이 웃음처럼 코미디처럼 곧 지나가 버려 허탈함만 남긴다.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전술은 딱 한가지다. 괴물은 입구가 하나인 동굴에 앉아 있어야만 하고 하나씩만 상대해야 한다. 하나씩만의 각개 격파는 숨 쉬는 일처럼 쉬운 일이다. 괴물은 이미 여럿이 힘이 뭉쳐진 상태이므로 힘이 마르지 않는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처방하는 노동자 분할 정책이기도 하다. 괴물의 힘은 무한대고 흩어진 한 사람씩의 힘은 무력하다. 깨알만큼 많은 사람들을 깨알처럼 흩어버리는 수법을 그들은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의 두 번 반복설은 지배계급의 부침을 두고 하는 말이다. 노동자 계급은 언제나 비극의 반복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변화발전 시켜온 이 사회의 절대적 다수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있을 수 없다. 다수가 다수답게 행동하는 일은 절대 정의에 해당함으로 다수를 괴롭히는 소수의 괴물을 제거하는 투쟁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일 것이며 복지사회, '창조경제'의 초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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