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시국회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양규헌 칼럼] 자본주의 체제를 꿰뚫어보는 태풍의 눈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기 위한 비상시국대회가 지난 주말에 열렸다. 항간에 폭탄 중에서 가장 센 폭탄이 ‘사제폭탄’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만들어 낼 정도로 천주교 사제의 박근혜 사퇴 발언은 정권에게 시한폭탄이 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그들의 요즘 기술대로 종북 매카시즘으로 대응했다. 그 지긋지긋함의 수구논리에 일반 대중들도 서서히 지쳐가는 것과 맞물려 각 종교계의 강경한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진정한 정치가 실종된 현 시국에 쌍용차, 강정, 용산, 밀양, 삼성전자 서비스지회 등이 참여한 노동자 농민 빈민과 사회단체, 정당 등이 총력 투쟁을 선포하는 민중대회가 열린 것이다.

박근혜 정권1년은 국민통합은 고사하고 보수 세력까지를 포함해 다른 의견을 가진 우리 노동자 민중 모두를 광풍 속에 날려버린 ‘비 맞은 새’처럼 만들어버렸다. 역사이래로 듣도 보도 못한 듣보잡 변종 ‘종북새’로 말이다.

그들 내부세력의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던 종북 이데올로기는 아마 그것을 만들어낸 권력핵심들까지도 놀라 자빠질 정도로 현실에 잘 먹히는 것처럼 보여 내심 의기양양했을 것이고 그것을 자신들 믿음의 통치철학으로 내면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그들이 기획하고 주도했던 통치의 장에 휩쓸려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이 보내는 광풍에 쓸려간 상처를 치료하는 증상치료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모진 광풍을 이겨내고 반격하는 태풍의 눈이 되어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앞둔 이 시점에서 ‘광풍의 눈’에 빗댄 ‘태풍의 눈’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우주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거센 태풍이 몰아치는 중심부에 태풍의 눈이 들어가 있다. 바람 속의 눈이라니 정말 문학적인 표현답다. 눈은 내가 남을 보기도 하고 남이 나를 보기도 하는 이중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 눈은 고요하지만 눈 속에 일렁이는 파도는 거대한 바다를 불러오기도 한다. 정적에 감겨있던 눈이 거대한 파도가 되고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전이되는 것을 태풍의 눈은 말해준다. 태풍의 눈은 태풍이 만들어낸 심오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광풍에 밀려 고립되었던 새가 이제는 다시 한 번 생각들을 정리해내고 힘을 얻는 새해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비상시국대회는 “박근혜 정권1년, 유신이 돌아왔고, 재벌들의 무법천지가 돌아왔고, 분단과 냉전이 돌아왔다. 비상시국이다” 라며 투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 결의문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비상시국에 대한 인식이 너무 늦거나(이명박 신자유주의 정권과 합산하여) 느슨해 보인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사실 비상한 시국은 어디선가 돌아온 게 아니고 노동자, 민중의 계속된 현실 그 자체였다. 자수성가한 CEO 대통령 이명박은 선글라스를 즐겨 쓰며 박정희를 흉내 내더니 4대강 사업으로 강토를 유린했고, 창조컨설팅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무력화를 시도하며 노동자를 정리해 버리는 쓰레기로 다루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정권 초기에 촛불을 맞은 이명박은 쥐로 희화화되거나 미국에서 벌였던 온갖 하수 짓으로 많은 웃음거리를 선사하며 정권퇴진을 요구 받았다.

4대강과 관권부정선거는 이명박근혜의 밀실 거래였을까? 합리적 추론이긴 하지만 4대강 사업과 총체적 관권부정선거를 덮기 위해서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해 온 것이 박근혜 정권 1년의 결산으로 보인다. 박근혜 사퇴나 박근혜 정권의 퇴진운동은 반 이명박 구호와 다를 게 별반 없다. 반 이명박 전선의 확대에 한계가 있었듯이 반 박근혜전선도 구조적으로 고착된 한계가 있는 현실을 뚫고 투쟁의 전선이 역사적 전환을 맞을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많은 현실적 한계가 있더라도, 3.15부정선거보다 더 심각하고 구조적인 부정을 저지르고, 정치의 무능을 번연히 행사하는 저들에게 국민의 저항이 들불이 되지 못하는 이 기막힌 현실은 무엇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하고 그것에 기반 한 의제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노동운동의 역사만 보더라도) 역사의 뼈아픈 교훈은, 너무 앞서가는 의제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본질로 인식해야 그나마 지배자들의 거짓말 선동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권력획득에 당위성 부여를 향한 몸부림의 흔적들

대선전 당시에 ‘박근혜가 당선되면 이명박이 그리울 거’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박근혜의 유신부활 공포정치 등을 빗댄 말이었고 이 시적 가설이 현실로 드러나는 기이한 경험을 우리는 목도해 왔다.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을 지낸 적이 있었던가 싶게 사람들의 의식은 박근혜와 박정희 또는 노무현 사이를 가로질렀다. 종북과 종박의 뉴스가 연일 스캔들처럼 나오니까, 마치 이명박 시대를 우리가 너무 행복하고 조용하게 살아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되는 절대적 진실이 여기에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즉 박근혜 정권이 선정적인 안보프레임으로 정국을 이끌어 가는 것은 이명박을 철저하게 숨기기 위한 술수가 아닐까. 겉으로는 이명박 정권과 차별화시도로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하며 마치 정권교체를 하는 것처럼 눈속임 선거를 치러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부정한 거래를 맺었고 그것은 부정선거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범죄를 숨기기 위해 노무현을 이용하고 박근혜 무능을 숨기기 위해 박정희를 이용하는 정치의 빈 공간에, 안보프레임을 걸고 상식에 어긋나는 종북몰이 통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지간한 사람들도 박근혜 정권이 과거로 돌아간 권위주의 정권임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고 언론을 통제해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으니 말들은 느리게나마 흘러가고 진실도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들이 천주교 사제를 종북으로 내몰고 시국대회를 전문시위 선동 꾼으로 악선전을 해대도 그것의 온전한 효과가 국민 세뇌의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정치의 무능으로 점점 가중되는 고통을 당하는 민중은 투쟁할 것이고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에 일반 대중들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종교계가 움직인다는 것은 대중적인 확산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통치방식의 무능을 종북 이데올로기로 대치하려는 유치한 발상

박근혜 정권의 통치 방식이 권위주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집단 심리와 현실에서 유신의 경험을 소환시켜 공포와 불안 심리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과거로 돌아갔다고 박정희가 되는 건 아니다. 박정희가 독재자지만 최소한으로 정치지도자로 객관성을 인정받는 부분이 있었다면 박근혜가 그럴만한 역량이 있다고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즉 박근혜를 바라보는 비판 인식이 유신회귀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박근혜가 아버지의 좋은 점은 본받지 못하고 나쁜 것만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줄로 안다. 역사적 물적 토대로 보아도 진짜 유신의 회귀가 가능한 것도 아니니 오히려 유신인척 하며 이들이 노리는 것의 진짜는 무엇일까. 연일 종북 때리기로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며 이들이 선전해대는 국민소득 2만5천불 달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들이 영구집권을 노리면서 들이대는 핵심 이데올로기 ‘종북’의 최종 귀착지는 어디일까? 언뜻 유신독재 이미지와 신자유주의가 매치되지 않아 좀 헷갈리기도 한다.

박근혜의 외교는 일종의 ‘기생외교’일 수 있다. 기생에는 두 가지 이중의 의미가 있다. 기생은 힘이 있어 보이는 타자에 붙어사는 것과 그 타자를 즐겁게 해주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노류장화’를 뜻할 때 쓰이기도 한다. 박근혜는 외국에 나가면서 화려한 한복을 입어 보이며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하고 어김없이 외국의 정상들과 자본가들 앞에서 온화한 미소를 선보인다. 자존심을 지키며 논리를 펼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웃음을 파는 영애 박근혜 공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박정희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 자존심 없는 딸을 추궁했을 것 같다. 어쨌든 박정희는 나라를 팔아먹는 민영화나 외국어로 혀를 놀리는 짓은 안했다. 그 애비나 그 딸이나를 외치며 박근혜 공안통치에 수세적으로 방어하기에 바빴던 1년을 돌아보며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바로 그들이 진짜 숨기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국대회가 외쳤던 첫 번째 의제인 특검도입이 좀 미진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화에 걸레짝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살리기 술수를 깨기 위한 우리의 전술이 필요하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그들이 부정선거개입 위기를 타개하려고 던진 불덩어리는 종북몰이에 근거한 공안정국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이 그 연막 뒤에서 조용히 처리했던 일들은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고 자본의 지속을 위한 신자유주의 가속화 정책이었다. 민영화, 낙하산 등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밀실에서 일어났고 노동과의 약속이 줄줄이 파기되는 가운데 최근에 불거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는 그 한 예라고 볼 수도 있다.

반이명박 운동이 그랬듯이 반박근혜 의제는 현실의 엄중함을 깨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자유주의) 바람은 불 수 있으나 (노동자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종북 이데올로기는 이란성 쌍생아 괴물이다. 증상치료에만 매달리는 의제로는 하나의 머리만 보는 편협함을 극복할 수 없고 그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또 다른 현실로의 이행일 뿐이다. 부정선거를 해결하기 위한 특검이 성사 될지도 미지수이지만 만약 그것이 실현되어 박근혜가 사퇴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굳건한 자본주의 토대에서의 자유주의 정권은 성형수술을 한 박근혜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변혁을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노동자정치세력이 힘을 모아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근혜정권 퇴진투쟁에 반자본주의 슬로건을 모아내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희망이다

“반 이명박 전선에서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이다”라는 글을 썼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에도 이명박은 너무나 많은 범죄를 저질러 그 화려한 경력으로 ‘자본의 본질적 문제’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대통령 개인 자질 문제로 끌어가 버렸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체제의 모순에서 오는 문제는 가둬버리고 박근혜정권의 정체성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보수정치판에 숟가락 하나 얹어 놓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박근혜 퇴진투쟁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공공의 적을 두고 투쟁한다는 것은 투쟁 주체마다 의미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가장 보편성을 띤 노동자 계급 일반의 투쟁성에 가장 대의가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정치의 본령을 경험하고 정치투쟁의 연장에서 진행하는 정권퇴진 투쟁은 노동자 자기정치의 정치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생생한 현장이 되어 줄 것이므로 바람직한 일이 되겠다. 다만 파업이 그러하듯 노동자계급의 정치전망을 확인하며 투쟁의 전략, 전술을 구가하는 방식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대통령이 누구든 그가 대놓고 또는 은밀하게 자본의 주구 역할을 하는 자라면 다수 민중인 노동자계급은 언제나 그를 내려올게 할 수 있다는 역사적 기억을 갖는다는 것 또한 긴 운동의 시간들에서 소중한 과제일 것이다.

태풍의 눈은 너무나 고요해서 그것이 위험한 바람을 몰고 올 거라는 예측은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예측 위험성이야말로 죽음을 딛고 몸을 달구며 살아가는 노동자의 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 급박하여 단기적이며 수세적 대응을 하느라 힘들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라도 싸워야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스스로 태풍의 눈이 되는 근본적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근혜정권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반민중적 본질들을 끄집어내어 자본주의 모순과 그 체제의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한 질문이 강력해질 때 비로소 반박근혜 투쟁은 해방세상을 향한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몰아치는 태풍의 소용돌이는 뜨거운 변혁의 거센 바람이 되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감동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임을 한 해를 보내는 이 시점에 가슴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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