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명사,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투쟁도 필요하다

[양규헌 칼럼] ‘질라라비’ 밴드의 공연을 보고

며칠 전에 ‘질라라비’ 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13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팀이다. ‘웅크림을 딛고, 질라라비’로 되어있던 포스터, 티켓 디자인이 특이하고 강렬해서 눈길이 끌렸다고 말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강철 같은 노동자의 팔뚝, 달팽이처럼 생긴 나팔, 일렉기타를 맨 남자와 벼슬과 부리가 강렬해 보이는 '붉은 닭', 그리고 맨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 대체로 그림이미지와 질라라비라는 대명사의 관계는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질라라비’라는 것의 이름을 아는 사람만이 해독할 수 있는 코드일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름과 그것이 불리는 것에 집착한다. 특히 각별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무대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긴장하기도 하는 것처럼.

꽃을 노래한 시인의 말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니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한 것이나 ‘시인’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할머니가 고난의 삶속에서도 소녀처럼 시를 지을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이름이 처음 불리어 뒤를 돌아보던 옛날의 어떤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이름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생명과 본래의 힘을 부여하는 작용으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진정한 자신만의 향기와 그 빛깔일 것이다. ‘질라라비’가 무언지 몰라 지랄라비냐며 귀여움을 선사했던 동지들도 많았던 것을 보면 ‘질라라비’라는 이름을 알리기 위한 3년여의 여정이 질라라비 단원들의 그동안 시간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닭을 암암리에 또는 대놓고 대통령의 별명으로 쓰여, KFC라는 인기 팟캐스트 방송에선 닭을 튀겨서 씹어 먹고 구워도 먹고 삶아 먹자고 분을 삭이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원래 닭은 조류 중에서도 뛰어나게 아름답고 벅찬 질라라비였다고 한다. 인간에게 길들여져 먹이와 둥지를 제공받고 있는 현재도 그렇게 머리가 나쁜 짐승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닭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게도 가장 나쁜 상징이 되어있다. 나쁜 권력이라도 꼭대기는 꿰찼으니 그래도 닭이 속으로 웃을지 모르지만, 닭을 질라라비라고 하는 이유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고 ‘자기가 자신을 찾는 해방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아무튼 닭으로서는 억울하다.

역사의 발전을 원치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하길 바라던 지배자들은 오래된 전승(문화, 관습, 제도 등을 계승)의 책들을 불살라 버리곤 했는데 이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 , 민중을 그들의 지배 대상으로 삼기위한 교묘한 지배 전략이었다. 조선왕조의 중화사상이나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류 역사로 자리 잡아 온 오랜 시간들은 노동자, 민중의 기억이나 본래의 힘이 상실되어온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류가 그렇다고, 모든 민중의 입이 봉해진 것은 아니다. 매 시기마다 노동자, 민중이 모순에 맞서 투쟁했기 때문에 투쟁의 역사를 딛고 역사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벌어지는 어이없는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이 자살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순에 맞서는 투쟁의 나약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빈곤이나 길 없는 절망이 우울증을 배가시키고 있긴 하지만 아기가 살기 위해 죽은 어미젖이라도 힘차게 빨듯이 해방의 전망을 향해 안간힘보다 더 좋은 약과 상징(처방)이 있을까.

진정한 이름이나 대명사를 이해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은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다. 언론은 일종의 소문을 내는 나팔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나팔이라고 한다. 요즘 나팔에서 알리는 소식들은 거짓과 가짜 이름들 뿐이다. 자기들 모습을 위장하는 그 가짜 이름들. 뉴스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새누리'를 어느 누가 '새로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까. 이와 같이 고운말을 시궁창으로 만드는 그들은 자신들의 폭력과 정치적 타락을 대명사를 앞세워 방어할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다분히 교묘한 지배전략을 감추고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대명사와 언어 속에 발견되는 술수들이 현실적으로 별 비중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야비한 술수들은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시키며 자행되는 문화 침탈을 위한 그들의 나팔이기 때문에 그 의도를 해부하고 분석하는 것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그런 노력을 부단히 이어가야겠지만 자본주의가 미쳐 날뛰는 삶의 현장에선 숨 쉬기부터가 어려운 상황이기에 계급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억압받고 갇혀있는 닭이 아니라 질라라비(해방자)라고 간단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것도 전략, 전술에 따른 선전 선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때문에 지배세력의 나팔을 깨고 우리의 나팔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질라라비 공연에 참가한 다수는 운동을 하는 동지들이다. 참석자 중 3분의 1은 활동하는 사람들의 지인들로서 운동에 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첫 번째 질문의 대부분이 "질라라비가 무슨 뜻인가요?" 로 시작한다. 연주하는 동지의 지인으로서 인천에서 참가한 한 분의 공연소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 듣는 음악들인데 듣는 내내 가슴이 벅차오르며 소름이 돋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평가는 운동과 거리가 먼 사람들로부터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이다. 이런 평은 극소수이겠지만 이 평가를 들으며 스스로 매몰된 관성 속에 깊은 관념이 작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반응은 화음, 박자나 악기 간의 조화, 노래에서 받은 감동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하고 연주, 노래하며 현실의 모순을 딛고 전망을 향한 조그마한 결의에 대한 동의가 아니었을까 생각에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따라서 우리에겐 여전이 선전 선동이 유효하며 일상적으로 접하는 고유명사. 이름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고, 문화운동과 운동의 방향에 따른 명칭을 명료하게 하는 것도 선전과 투쟁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이번 질라라비 공연이 선전선동의 계기나 성과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과 '해방을 향한 의지'들이 조금씩 모아지기를 과도하지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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