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밀려난 사람들의 저항 공간

[새책] 옥상의 정치 (고영란 김만석 조정환 등, 갈무리, 2014.4,)

이 공동저작은 공동체의 갈등, 희망과 절망, 나와 이웃의 네트워크가 ‘옥상’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책 맨 앞쪽은 부산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 앞에서 인문학 카페 헤세이티를 운영하는 황경민 씨의 꽁트와 시 16편이다. 옥상의 체험과 경험을 짧게 다루면서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한다. 옥상으로 탈출하려는, 옥상에서 탈출하려는 알리바이가 사라진 지금 허공만 바라보는 순응하는 삶을 담았다.

옥상엔 사람의 일상(日常)과 비상(非常)이 혼재한다. 빨랫줄과 장독대, 텃밭 같은 일상이 있는가 하면 본드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가 있고, 벗어놓은 신발이 있고, 내걸린 플래카드가 있다. 이렇게 옥상엔 ‘절망과 희망’이 동거한다. 버려진 담배꽁초와 서성거린 발자국, 애틋한 첫사랑이 뒤섞여 있다.

우리 전통 가옥인 기와와 초가집은 ‘지붕’은 있지만 옥상은 없다. 옛 건물의 지붕은 곡선이었다. 옛 집은 빨래나 곡식을 말릴 마당이 있어 굳이 옥상이 평면일 이유는 없었다. 근대적 주거공간의 출현 이후에야 ‘옥상’이 등장한다. 우리는 1970년대 초반에야 옥상이 등장한다. 인구가 집중되고 주택 면적이 좁아지면서 마당이 담당했던 역할을 ‘옥상’이 대체했다. 그러면서 바깥과 열려 있던 마당은 사라졌다.

‘옥상’이 노동자들에게 열린 시야를, 일종의 희망이나 ‘전망’을 주기도 했지만, 그 시기는 아주 짧았다. 박영근 시인의 수기집 <공장 옥상에 올라>(풀빛, 1984)에서 ‘나’는 결코 옥상에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옥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버팀목이 됐다.

오늘날 우리의 하루하루는 옥상 위에서 위태롭다.

조정환은 ‘옥상’이 집과 삶에서 여분의 공간(잉여)이라는데 주목한다. 남일당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은 2009년 1월 19일 대체상가와 현실적 보상은커녕 오히려 목숨을 내주었다. 이들에 대한 경찰의 주저없는 진압은 “2008년 여름을 달구었던 사회적 항의(촛불시위)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는 정치적 판단 속에 나왔다. 남일당 옥상은 도심재개발과 신자유주의 공간재구성을 위한 희생제단이었다.

그로부터 반년 뒤 2009년 7월 27일 오전 11시, 쌍용차노조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옥쇄파업중인 평택공장 도장공장 옥상에 올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는 회사와 정부에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들을 조롱하듯 경찰특공대를 풀었고 일순간 옥상은 쫓고 쫓기는 사냥터로 바뀌었다. 쌍용차의 옥상은 신자유주의 정리해고와 노동재구성을 위한 희생제단이었다.

사람들은 저항을 위해 옥상으로, 크레인으로, 송전탑으로, 망루로 올라갔다. 1~2백년 전 저항하는 사람들은 공장이나 도로, 거리를 점거하고 바리케이트를 쳤다. 오늘날 옥상은 저항하는 사람들의 신세가 과거보다 훨씬 더 못함을 증명한다.

군사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공동체가 균열될 때, 송전탑 건설로 마을이 해체될 때, 정리해고로 소득이 막히고 가족 전체가 생사의 기로에 설 때, 야자와 시험으로 친구 하나 없이 모두가 적으로 변한 삶에서 황폐함을 느낄 때, 차별 속에서 봉사로 일관해온 여성으로서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아무도 보살펴 주는 이 없는 노년의 삶이 버림받은 것으로 느껴질 때 사람들은 옥상으로 오른다. 삶의 극한으로 오른다.

언론은 사람들이 옥상으로 오르는 사실을 감추려고 옥상 위에 화려한 네온사인과 광고 전광판을 설치해 실존하는 사람을 숨기고 가상의 사람을 내세워 돈벌이에 나선다. 이렇게 옥상은 잉여공간이다. 옥상에 오르는 사람들도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정작 잉여인간은 진짜 사람을 옥상으로 등떠미는 그들이 아닐까.


사람들은 옥상권력에 반란을 꿈꾸며 여전히 옥상으로 오른다. 봉화는 대도시 옥상에서 불타올랐다. 지금도 봉화 지피기는 계속되고 있다. 봉화는 곳곳에서 타오르지만 그 지속성은 짧고 연결의 강도는 약하다. 20세기에 노동자와 빈민, 농민, 여성은 사회주의라는 공통의 언어를 가졌지만 21세기엔 그런 공통어마저 없다. 그럼에도 촛불의 광장이 닫히고 나서 잇따르는 옥상의 절규들은 저항을 향한 대장정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화가 홍성담은 민중미술의 대선배다. 흔히 이들 세대들이 대체로 ‘자연’이나 ‘설화’의 세계로 옮겨간 데 반해, 홍성담은 여전히 날카로운 조형언어를 캔버스 안에 그려넣고 있다.

홍성담은 화가가 된 사연부터 소개했다. 1980년 가을 당국의 수배를 받아 잠깐 선배의 집에 숨어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선배의 아들 방에 처박혀 답답했다. 시간을 때우려 보던 초등학교 미술책에서 판화 제작법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판화로 홍성담은 ‘학살’을 새겼다.

홍성담은 “인권과 환경과 평화에 관련된 권력과 정부의 말은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거짓과 사기뿐”이라고 말한다. 민선시장은 광주를 인권과 평화의 도시로 선언했다. 홍성담 본인도 광주인권선언문을 기초하는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강제위촉됐지만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홍성담은 2년 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전시회에 초청받아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그림을 보냈다. 그러나 홍성담의 그림은 철거되거나 교체되는 수모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지난 5월에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광주민중미술전에서 후배들의 걸개그림이 반미적 메시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전시되지 않았다.

홍성담은 ‘민중미술관’을 국공립으로 세우는 걸 반대한다. 그 이유는 ‘돈’이 ‘내용’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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