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후의 지옥 같은 세월호 참사, 우리도 공범이 아닐까

[양규헌 칼럼] 신자유주의 전면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번에 희생된 아이들이 1997년생 아이들이라는 걸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한다. 97년엔 IMF가 터진 해였고 그로 인해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폭탄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노동자 서민들의 생존이 크게 위협받던 시점이었다. 97년생 아이들이란 대부분이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빠와 엄마의 불안한 일자리로 할머니에게 돌봄을 받거나 어린이집에 맡겨져 불안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아이들이었다.

정부의 구조 방기와 언론의 왜곡보도가 유가족을 분노하게 하면서 하나 둘씩 공개되는 아이들의 동영상을 보면 아이들이 유난히 성숙하고 착하고 의연하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마다 정서에 공감하는 부분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아이들이 힘들게 일하는 엄마 아빠에게 공감하며 착하게 자신들을 다스리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언제나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것이긴 하지만 이시기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불안과 격리감(아기들은 엄마 품에서 떨어지는 걸 공포로 느낀다)에 매우 예민했을 것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환경에 어린 아기들이 적응하는 과정임을 눈물겹게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환경 탓으로 부모와 아이들의 정신적 유대감은 매우 유별했을 것이고, 그런 고통을 함께 체감하고 살아온 40대 부모들은 더더욱 유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사회적인 사건으로 객관화시켰을 것이다. 모두가 슬퍼하고 절망하지만 특히 40대들의 박근혜 지지 이탈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은 그런 것들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다

전원구조라는 오보답게 그냥 잘 무마되었을 것 같았던 사건이 스무날이 넘게 실종자 수습을 제대로 못하고 있고 어느 것 하나 상식선에서 처리할 줄 모르는 정부에 대해 전국적으로 촛불민심이 불타오르고 있다. 아직 부모 장례를 치러보지도 못했는데 아이 장례를 어떻게 치룰 수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어 하던 젊은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똑똑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고, 힘이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는 줄 알았다고, 아이를 이렇게 보낼 줄은 정말 몰랐다"고. 자식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똑똑한 사람들이 책임지고 있다는 국가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대통령조차 적폐와 국가개조를 말하고 있고, 전문가 집단들도 현실과 동떨어진 많은 정책과 관행을 비판하기에 바쁘고 특히 언론에 불어 닥친 국민의 따가운 비판의식과 몇몇 언론사 내부의 선언들은 언론지형이 바뀔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나오지만 언론권력의 속성상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모두가 반성을 하고, 미안해하고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마당에 무엇이 미안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성은 파악이 되지 않고 그것의 본질적 원인인 계급적인 문제들이 도처에서 무마되는 흔적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 낸 작품

이번 세월호 대참사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에게 불어 닥쳐 우리사회가 수용해온 온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구조적인 희생물이다. 구조적인 희생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느 한 부분이나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강고하게 고리로 엮인 계급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적폐의 주체들이야 기득권을 한 번도 빼앗겨 본적이 없는 한국의 지배층이겠지만 모든 분야에서 그 지배의 사슬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민중의 입장에서도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했기 때문에 분향소를 찾은 사람들이 못난 어른이어서 미안하다고 절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참사를 겪고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반성은 한마디 없이 정권에 위기가 닥치자 국가개조를 한다고 청와대가 분주한 모양이지만,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아 놓은 그들의 기득권 사슬을 그들이 풀어내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머리와 몸을 친다는 뜻인데 이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픈 지경인데도 의료분야의 규제완화로 삼성에게 특혜를 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진정성은 아예 없는 것이다. 의료 분야 규제완화나 민영화는 미국처럼 돈이 없어 죽음에 방치되는 빈민들을 서서히 양산할 것이고 그것의 결과물은 특정지역과 재벌과 기득권의 사적이익 추구일 것이다. 즉 그들이 추구하는 국가개조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국가안전처’가 아니라 그들의 안전만을 위한 ‘자본안전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외주화하는 국가

노조를 무력화시키려고 용역을 투입하여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을 외면하고 노동자만 잡아가는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이번에 사고를 유발한 청해진 자본 등에 유착되어 모종의 기득권을 누려오던 해수부 산하 관료집단과 해경 등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바다의 지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해난 사고가 일상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보니 또 국민 보편 감정상, 재난이나 전쟁 등에 준하는 큰일은 당연히 국가가 책임을 지고 해결하는 일이라는 것으로 알아왔기 때문에 이번에 재난 해결의 미궁을 가져온 민영화 방식을 접하고는 놀라는 사람이 많았던 것인데 이는 바다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욱 생경함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국가에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는 시민들이 외주화된 시스템에 생명을 담보해야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미개함을 몰랐고, 재난 영화에서처럼 나와는 상관없는 먼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에 처참한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피부로 인지하기 전에 국가는 이미 국민의 생명을 외주화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착착 진행시켜 왔기에 이는 청해진에 한정된 문제가 결코 아니며 사회전반에 깔린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지독하고 야만적인 것인지 자신이 그런 사태에 직면하지 않으면 잘 느끼지 못한다. 매일매일 먹고사느라 인간적인 모든 걸 유예당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노동현장의 싸움을 그들만의 밥그릇을 위한 싸움으로 보며 아직은 자신이 놓인 상태는 아니니 안심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와 용산, 쌍용차 사태 그리고 지하철 사고는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세월호 침몰은 노동의 유연화로 효율적인 시장원리를 추구한 자본과 권력의 합작물이었다. 승객을 구조해야하는 해경과 정부는 유가족과 생명의 편이 아니었듯이 그와 똑같은 과정을 우리는 용산과 쌍용차 사태에서도 이미 겪은 것이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는 외환위기의 바람과 함께 휩쓸려와 국민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에도 나라의 모든 구석을 오목조목 휩쓸고 있었다.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나가고 구조조정으로 절망하며 목숨을 거두고 정리해고 되어 삶의 이유를 상실하며 자살을 한다고 그들이 조문이나 애도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오히려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간 영정들조차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그러니 세월호 참사 영정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가 없는 악독하고 사악한 정부가 무엇을 개조하고 무엇을 지킨다는 것인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윤배가를 위해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정상적 고용행태를 줄이고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불안정한 고용과 외주화에 가속 페달을 계속 밟아댐으로써 민중 생명의 안전은 국가경제발전이라는 허명아래 도외시되는 구조를 구조적으로 창출해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전면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정이 이러 한 걸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던 민중들은 이제 나라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과 분노와 억울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밝히고 있다. 엄마와 청소년들과 아기를 안고 나온 가족들 중심의 촛불을 보면서, 그리고 안산에서 5월10일 모인 촛불 국민행동을 보면서 슬픔의 공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벅차게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지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모든 일이 벌어지게 한 악랄한 자본주의 세상을 바꾸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촛불 집회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누군가는 촛불을 쥐고서는 불편해서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없다고 했듯이 촛불의 불씨만으로는 부족하다.

5월 10일은 안산집회 중 최대 규모인 2만 명이 참여했고 행진기조는 침묵행진이었다. 집회대오는 다수가 노동자들의 조직대오였다. 슬픔에 젖은 눈빛과 안타까움은 보였으나 노동자계급의 목소리와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행진에서 자발적 구호와 외침으로 '박근혜 책임과 퇴진' 그리고 '아이를 살려 내라'가 흘러 나왔을 뿐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확인되었듯이 언론이 주로 지목한 사고의 주요원인인 안전 불감증과 선원, 해경의 책임은 피상적인 책임 규명일 뿐이다. 이들이 은폐하는 분명한 진실,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구조조정과 자본과 결탁한 권력의 공격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대중 정권의 정리해고와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법안, 제도화를 저지 못한 책임을 민주노조진영은 부정할 수 없다. 민주노조운동은 변혁성이 와해됨으로써 노선이 흐려지고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그간의 시간들을 보내왔다. 작금의 상황인 세월호 사고를 불러온 간접적인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아픈 자책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세월호의 문제를 계급의 문제로 이해하고 투쟁의 전면에 나서야한다.

이는 단지 희생자 대부분이 노동자의 자식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정리해고, 비정규법안 저지를 실패한 결과가 신자유주의의 전면적인 확산을 불러왔고 비정상적 고용형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순응했던 결과가 세월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투쟁의 전면에 투쟁하는 연대체를 조직하자

세월호 사건은 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참사다. 아이들을 희생시킨 주범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일 것이니 아이들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끝장내는 것이다. 당분간은 촛불들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세월호는 우리사회에 충격을 던지고 있고 혁명적인 조치들이 요구되고 있다. 이 중차대한 임무를 누가 해낼 수 있단 말인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촛불이어도 바람이 한번 세게 불면 점차 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떨칠 수가 없다. 이런 시기에 노동자계급의 대응이 미약하다면 제2,3의 세월호가 이어지지 않으란 보장이 없다. 이런 근원을 끊어내기 위한 투쟁의 지속적인 역할을 견인해내고 앞에서 이끌어가는 운동의 주력부대로 민주노총과 사회운동조직이 일어나야 한다. 노동절과 같은 분산과 무기력이 계속되면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조직의 한계와 숫자 타령을 할 게 아니라 가능한 만큼만이라도 결의를 모아 노조조직과 사회단체, 정치조직을 망라한 투쟁연대체로 강고한 투쟁을 조직해야한다. 공권력이 막는다고 주저앉는 무기력한 연대체가 아니라 막힌 길을 뚫고, 차벽을 넘는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의 전투성을 회복해야 세월호와 같은 절망을 방지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공격 원년인 97년에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 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입시지옥, 경쟁으로 길들여진 신자유주의 공화국보다 죽음나라가 더 낫네요.”라는 끔찍한 외침이 메아리로 돌아오게 해선 안 된다. 절박한 마음으로 그들이, 또는 살아있는 많은 잠재적 세월호 아이들이 외치는 말을 가장 마지막까지 가장 끝까지 귀 기울여 듣고 그걸 걷어내야 할 주체가 노동자계급이다. 국가의 본질은 국민 생명을 보호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이 국가를 만들었을 때 가능하다. 지금의 국가가 생명을 보호한다고 믿지 말고 어떤 국가여야 생명을 보호 받는지 생각해야 하고, 그런 국가는 나 자신, 투쟁하는 노동자가 만든다는 진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예전의 노동자 대투쟁시기를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서 어쩔 수 없다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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