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기타’를 되찾기 위한 8년의 투쟁

[오늘,우리의투쟁] 콜트콜텍(1) 시간이 멈춘 공장에서 생동하는 연대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6월 12일 정오,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대법원을 등진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 그리고 8년의 투쟁을 곁에서 지켜온 이들이 모여 환하게 웃었다. 5월 19일부터 콜텍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의 ‘상식적인’ 판결을 촉구하며 이어온 25일간의 24시간 1인 시위를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는 기계적인 한 마디에, 치미는 분노와 울화조차 아까운 이들은 차라리 환히 웃었다.

  2014.6.12. 대법원앞 [출처: 콜트기타불매유랑문화제facebook]

다국적 착취로 세계시장의 30%를 점유한 콜트·콜텍

콜트·콜텍은 인천과 대전에 위치한 기타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돈만큼이나 악기를 좋아하는 박영호 일가는 아버지대부터 피아노와 기타 등을 수입해 판매하다가 국내에 공장을 지어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1년 박중규가 설립한 수도피아노사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1972년 부도를 맞자, 당시 해외마케팅을 담당하던 26세의 박영호가 1973년에 기타전문제조업체로 설립한 유아통상이 콜트악기의 전신이다.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인 펜더(Fender), 깁슨(Gibson), 아이바네즈(Ibanez) 등의 OEM 생산과 함께 1980년대초 콜트악기로 이름을 바꾼 뒤 자체 브랜드 콜트기타를 생산해왔다.

1988년에 음향기기 제조·판매를 주로 하는 자회사 콜텍을 설립하고 1990년에는 악기사업부를 신설한 뒤 다음해 말 논산의 악기제조사를 흡수·병해 대전공장을 설립했다. 1993년 인도네시아에 PT콜트공장을, 1999년 중국에 콜텍대련공장을 설립하고 국내 생산라인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생산한 반제품을 국내로 들여와 ‘한국인의 손재주와 집중력’으로 완성한 기타에 ‘made in korea’를 붙여 열심히 팔았다. 콜트기타의 독보적인 성장 동력은 저임금과 강도 높은 현장통제, 불안정한 고용이었다. 환율이 급등한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어 더욱 승승장구했다.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기타로 박영호는 막대한 부와 명성을 쌓아갔다. 유일한 걸림돌은 1987년 인천 콜트공장에 만들어진 노동조합이었다. 기계처럼 부릴 수 있는 노동력만이 필요했던, 노동조합 없는 공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박영호는 2000년 대전에 ‘꿈의 공장’을 신축했다. 작업에만 몰두해야 할 노동자가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아예 창문 없는 공장이었고, 물량 계획에 맞춰 언제든 노동력을 쓰고 버릴 수 있는 노동조합 없는 공장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비인간적인 통제와 최저임금을 감내하면서, 일하다가 다치면 산재는커녕 해고당해 쫓겨나면서 노동자들은 기타를 만들었다.

그렇게 생산된 콜트기타는 2002년 삼성전자·영안모자 등과 함께 산업자원부의 ‘세계 1위 시장점유율 상품’으로 선정됐고, 세계 시장의 30%를 생산·유통하는 대표 브랜드로 성장했다. 200만원의 자본금으로 기타를 만들기 시작한지 30년 만에 박영호는 인천의 콜트와 대전의 콜텍, 인도네시아의 PT콜트와 중국의 콜텍대련 그리고 콜트기타 판매전문매장 기타넷까지, 다섯 개 법인을 사실상 소유한 1,200억 원 대의 재력가가 되었다.

탐욕의 질주를 향한 무리수, 흑자 정리해고와 물량 해외이전 위장폐업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다. 2003년을 지나며 박영호는 해외 공장에 대규모 시설 투자를 하면서 국내 공장의 생산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해외 공장으로 생산 장비와 기술을 이전해왔고 해외 수주는 서울의 콜텍 본사가 전담해 국내외 공장으로 배분하면서 국내 공장의 생산물량을 의도적으로 감소시켰다. 그렇게 해외로 물량을 빼돌리며 국내 공장들의 경영난을 자초해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을 강행했다. 2005년 11월부터 순환휴직을 반복하던 인천 콜트공장에 2007년 1월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하고 2008년 8월 31일자로 공장을 폐쇄했다. 가시화되는 고용 불안에 2006년 노동조합을 만든 대전 콜텍공장 역시 2007년 4월 일방적인 휴업 공지와 함께 7월 10일자로 폐업을 단행했다.

콜트는 1997년부터 2005년까지 191억 원의 누적 흑자를 기록하던 중 2006년에만 8억 5천만 원의 적자가 발생했고, 콜텍은 설립 이후 단 한 차례의 적자도 없이 1996년부터 2007년까지 878억 원의 누적 흑자를 기록해온 알짜기업이었다. 국내 콜트·콜텍과 해외 법인은 모두 박영호의 1인 지배구조 하에서 ‘콜트’ 브랜드의 기타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업체이기 때문에 콜트와 콜텍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해외공장으로 물량을 몰아주고 국내공장의 물량 감소를 이유로 강행한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은, 근로기준법 24조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에서 첫 번째로 규정하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요건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박영호의 과욕일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섰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콜트기타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낸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창문 없는 공장에서 지문이 닳도록 사포질하고 날리는 먼지와 유기용제 마셔가며 안 쑤시는 뼈마디가 없을 만큼 혹사당하면서도, 십년 이십년 소중한 삶의 시간을 바쳐온 일터를 사랑했던 노동자들이었다. 자신들의 피땀으로 나날이 성장한 회사가, 자신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해외에 공장을 짓고 기계를 빼돌리고 물량을 몰아주는 과정을 지켜본 노동자들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인천 콜트와 대전 콜텍에는 일터를 되찾고 싶은 노동자들의 농성천막이 차려졌고, 매일이다시피 서울의 콜텍 본사 앞을 찾아가 공장을 돌리라고,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2007년 11월에는 복직투쟁을 이어가던 콜트의 이동호 조합원이 분신을 시도했고, 2008년 10월에는 콜텍의 이인근 지회장이 양화대교 주변 고압송전탑에 올라 20일이나 곡기를 끊고 한 달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목숨 건 투쟁을 외면하는 박영호를 만나기 위해 2008년 11월 25일 콜트·콜텍 조합원들 수십 명이 서울 콜텍 본사 점거농성을 시도했다가 전원 연행되기도 했다.

계속되는 콜트·콜텍 싸움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자 박영호는 2010년 콜텍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공감 나눔 소통’을 모토로 콜트기타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문화지원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문화소외지역 주민과 시설에 기타를 기증하고 기타 영재를 발굴하고 경연대회를 여는 등의 기만적인 사회공헌 사업을 통해 흑자 정리해고와 물량 해외이전 위장폐업에 대한 국내외 비난여론을 무마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돈과 위선으로 투쟁의 의지와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묵묵부답과 외면으로 일관하는 자본에 맞선 수십 명 노동자들의 외로운 싸움에, 시간이 갈수록 관심하고 연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공농성과 본사점거농성 이후 콜트·콜텍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내몰린 거리, 시간이 멈춘 공장에서 생동하는 전무후무한 연대

수십 년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려 분신하고 고압송전탑에 오르며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문화연대와 투쟁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하기 시작했다. 노래의 꿈을 키워준 기타를 만들어온 노동자들의 투쟁을 뒤늦게 알게 된 이들은 2008년 12월, 홍대 앞 클럽 빵에서 ‘당신에게 삶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라는 헌정콘서트를 일주일간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음악인들의 연대는 지금껏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클럽 빵에서 열리는 콜트콜텍 수요문화제로 이어지고 있다.

2009년 3월부터 2011년 1월까지는 세계적인 악기박람회가 열리는 독일과 미국, 일본으로 여섯 차례의 원정투쟁을 다녀왔다. 생산량의 절대다수를 해외 수주와 수출에 의존하는 콜트·콜텍의 노동탄압 실상을 알리고 공장정상화를 압박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마음들이 모였다. 원정투쟁을 통해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싸움을 지지하는 국제네트워크가 생겨났고, 콜트기타의 주요 납품업체인 펜더(Fender)사와의 간담회와 진상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와 보컬리스트 잭 데라 로차를 비롯 유수한 뮤지션들이 적극적으로 투쟁 지지의사를 표명하면서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2011년 봄부터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인천 콜트공장에서 공동농성을 시작했다. 하나의 자본에 맞서 한 공간에서 함께 싸우기 시작하면서 투쟁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다채로워졌다. 사측의 단전·단수에 더위와 추위를 버텨가며 극소수의 노동자들이 지키던 공장은 사람의 온기가 피어나는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집으로 거듭났다. 탐욕의 자본이 떠난 공장에는 미술가의 작품과 음악가의 노래와 종교인의 기도가 깃들었고 크고 작은 연대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공장은 공간이 필요한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되었고 그대로 전시회장이 되었고 콘서트장이 되었다. 언제 용역이 들이닥칠지 언제 또다시 내쫓길지 알 수 없지만, 기타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마음들은 자꾸만 모여들었고 이들의 웃음과 수다와 복작거림으로 작은 해방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노동자들이 만들어냈다. 생계의 수단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만들어왔지만 직접 연주할 엄두도 여유도 낼 수 없었던 기타, 해고 이후 5년간은 만져볼 일도 없었던 기타를 악기로 다시 만났다. 두 대의 기타와 한 대의 베이스기타 그리고 퍼커션 카혼을 라인업으로 4인조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밴드, 콜밴이 결성되었다. 2011년 12월 클럽 빵 수요문화제에서 데뷔한 콜밴의 활동은 3년째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차곡차곡 레퍼토리를 늘려가며 선보이는 콜밴의 무대는 여전히 조금 어설프고 웃음을 자아내지만,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간절한 마음은 노래와 연주에 그대로 담겨 듣는 이들에게 전해진다.

노동자들은 진동젤리와의 만남을 통해 ‘구일만햄릿’으로 연극 무대에도 섰다. 역동적인 연대 그리고 도전과 변화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노동자들의 노력과 용기로 탄생한 무대였다. 지하소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의 열기와 대학로 연극인들의 주목 속에 앵콜공연도 치러냈다.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졌다. 김성균 감독의 ‘기타이야기’(2009)와 ‘꿈의 공장’(2011)이 부산국제영화제와 극장을 통해 상영되었고,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함께 하는 감독은 투쟁이 승리할 때 세 번째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이다. 넝쿨 감독은 미니다큐 ‘공장’(2013)에 가스충전소로 변해버린 인천 콜트공장 농성의 일상과 마지막 순간을 담아냈고, 부수고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는 연대와 투쟁의 시간이 소중한 기록으로 남았다.

고통스러운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기타’는 새로운 의미가 되고 줄을 잇는 연대의 뿌리가 되었다. 지금껏 500팀이 넘는 뮤지션들이 투쟁을 지지하는 무대에 섰고 무수한 공연과 페스티벌이 이어졌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착취와 이윤의 도구로 전락한 기타에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연대하고 있다. 공장에서 클럽 빵에서 또 어느 거리에서 기타 만들던 투박한 손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는 콜밴과 여느 투쟁사업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문화예술인들의 깊숙한 연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천 콜트공장 용역침탈 후 공장 앞 문화제 [출처: 콜트콜텍기타노동자공동행동]

판결로 멈출 수 없는 투쟁, 법으로 가늠할 수 없는 삶

2012년 2월 23일 대법원은 콜트·콜텍 정리해고에 대해 엇갈린 판결을 내놓았다. 콜트의 정리해고에 대해서는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콜텍에 대해서는 대전공장의 폐업이 전체 경영 악화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지 심리가 필요하다며, 부당해고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판결문에는 기업이 전체적으로 흑자여도 일부 사업 부문을 폐쇄하며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가 담겨있었다. 대법원 주심 중 한 명은 얼마 전 국무총리 후보로 내정되었다가 거액의 전관예우가 알려져 비난여론에 사퇴한 안대희였다. 이 판결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2012 한국인권보고대회’에서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꼽혔고, 선정위원은 대법원이 정리해고라는 ‘지옥의 문’을 열었다고 평했다.

법이 정하는 최소한도 고려하지 않는 법원의 판결은 계속되었다. 2014년 1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은 자신들이 선임한 공인회계사의 감정 결과조차 뒤집으며 콜텍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정치판결을 내놓았다. 6월 12일 대법원의 선고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구호가 아닌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입증되고 있지만,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삶은 언제든 내팽개쳐도 된다는 힘의 논리가 법원의 정의로 둔갑해 반복되었다.

부당한 정리해고라는 판결에 잠시 웃었던 콜트 노동자들에게도 현실은 가혹했다. 박영호는 판결 이행은커녕 3개월 후 다시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인천공장을 폐업한 후 콜트악기는 법인의 사업목적에서 악기 제조·판매 등을 모두 삭제하고 동산·부동산 임대업만을 남겨둔 터였다. 국내에서 더 이상 악기를 생산하지 않는다며 인천공장 건물과 부지를 매각했다. 하지만 2012년 12월, 시효 20년의 콜트악기 상표권을 갱신하면서 지정상품으로 기타, 전기기타, 전자오르간, 전기오르간, 피아노 등을 등재해놓았다.

한편 저들의 법은 가차없이 집행되었다. 콜트·콜텍 투쟁의 거점이자 기타노동자의 집, 기계가 떠난 공간을 예술과 연대로 가득 채웠던 인천공장에 철거 대체집행 허가가 떨어졌다. 2013년 2월 1일, 설연휴를 앞둔 겨울 아침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경찰과 용역들은 잠들어있던 노동자들을 들어내고 공장 입구를 봉쇄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들과 함께 다음날 재진입에 성공했지만 2월 5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13명이 전원 연행되면서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자본과 법은 노동자의 투쟁을 짓밟고 연대하는 문화예술인의 작품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훼손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정문 앞 천막농성장에서 투쟁을 이어가며, 청춘을 바쳤던 애증의 공장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2013년 4월 17일,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만 6년을 싸우면서도 차마 꺼내지 않았던 콜트악기 ‘불매’를 선언했다. 다시 음악인과 문화예술인의 지지를 모으고 ‘No Cort’ 유랑문화제와 불매서명 등을 통해 착취와 이윤에만 골몰하는 콜트·콜텍 자본의 맨얼굴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듯 투쟁을 지지하는 인디뮤지션 19팀이 참여한 페스티벌 ‘콜트불바다, 우리가 진짜 콜트다’가 8월 홍대거리에서 열렸고, 콜텍문화재단의 헛발질에 뒤늦게 투쟁을 알게 된 신대철·최이철·한상원 등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들이 12월 ‘기타레전드, 기타노동자와 만나다’ 무대에 섰다. 자유와 저항의 기타를 연주하고 노동의 가치가 살아나는 기타를 꿈꾸는 이들의 마음이 만나 오래된 투쟁과 공명했다.

2014년 4월 24일에는 종교계, 법조계, 정계와의 연대를 통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투쟁의 사회적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문화제 ‘마음의 소리’가 열렸다. 1년, 2년 투쟁하는 건 이슈도 되지 않고 8년, 10년 투쟁해도 꿈쩍 않는 자본과 권력이지만 싸움을 중단하지 않는 한 함께하는 마음은 점점 늘어간다.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수한 싸움과 변신을 마다 않은 ‘평범한’ 노동자들과 그 곁에서 지극하게 연대하는 이들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싸워나갈 힘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투쟁 2,000일을 넘기며 새롭게 1일차의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다진 날로부터 다시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한 싸움의 날들이 고스란히 삶이 되었고 투쟁의 종지부를 찍는 건 노동자의 몫이다. 돈과 법이 모르는 자리에서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가며 더 탄탄한 싸움을 준비하는 기타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출처: 금속노동자(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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