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정당화시키려는 무차별 폭력

[양규헌 칼럼] 35년 전 촛불집회, 그리고 여전히 촛불

그림자조차 투명하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 그림자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가 존재인가 아닌가도 구분하기 어려운 각박한 삶. 방황하는 의식은 점차 짓눌리며 시간을 따라 좌측에서부터 우측으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사회전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폭력으로 유지하겠다는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이다.

투쟁현장에서는 ‘투쟁은 이제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자위의 틈바구니로 처절하고 굴욕적이었던 역사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국가의 억압, 통제기구는 애당초 폭력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와 검열은 물론, 그보다 더 가혹한 자본의 통제와 폭력이 엄연한 법의 이름으로 군림하고 있다. 때로는 폭력의 실체도 분간하기 어려운 자본의 통제와 억압에 목숨을 담보하는 노동자 민중의 처지가 거대한 태풍 속에 갇힌 촛불이 되어 나풀거린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처음 경험하는 35년 전 촛불집회 그리고 여전히 촛불

35년 전 11월 초순의 기억이다. 차가운 영하의 날씨에 수도권에 있는 60여명의 노동자들이 비밀리에 여주의 남한강에 모여 샛강을 건너 캄캄한 산속으로 숨어든다.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조직된 민주노조를 열망하는 노조간부, 활동가들이다. 산중턱에 평평한 곳에 모여 열사를 추모하고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살인마 같은 ‘군부독재’를 끝내고 민주사회와 민주노조를 쟁취하기 위해 결의를 모으는 자리이다. 추모시 낭송과 ‘우리 승리하리라’, ‘친구(당시엔 대표적인 투쟁가)’를 부르는 동안 60여개의 촛불이 어두운 산골짝을 밝혔다. 마지막 결의에서는 작고 나약한 촛불이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이 사회를 환하게 밝혀줄 그날까지 투쟁하자는 결의와 함께 높은 나무꼭대기에서 축구공보다 큰 횃불이 장작더미로 떨어지면서 뜨거운 캠프파이어가 대미를 장식한다. 그 후 35년이 경과한 지금은 서울 중심부와 각 지역에서 여전히 촛불이다.

신자유주의의 경쟁논리는 노동자계급을 분할해 내고 고도의 경쟁구도는 패배의식으로 몰리며 끝없는 무기력증이 나타난다. ‘내가 살아남아 성공하면 모든 과정이 정당화 된다’는 것은 쿠데타 세력의 살인폭력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내면에는 폭력의 정당성을 정의의 잣대에 걸쳐 놓겠다는 더러운 의도가 담겨있다. 정의와 불의의 범주를 모호하게 만들고 착취와 탐욕이 정의의 과정인양, ‘경제 활성화’라는 이데올로기는 물론, 법 제도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대고 있다. 최악의 경우 ‘모두가 나쁜 놈’이니 ‘새롭게 시작하자’라는 뻔뻔함도 보인다. 그리고 법이라는 잣대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폭력은 정의이고, 사회적 약자의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몰아감으로서 삶의 기본권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간접,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대물림되는 유전자

세월호와 관련해서는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진상과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았고 시신조차도 찾지 못한 암울한 상황이다. 국회의 처마 끝과 광화문 길바닥에서는 사고의 진상규명을 위해 세월호에 갇혀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일정(선거) 와중에는 국민을 섬기겠다고 입을 모았던 정치권에 정치가 없어졌다. 정치권은 진실규명은 뒷전이고 딴 짓으로 일관하며 유가족의 요구를 보상금, 대학특례 등으로 몰아감으로서 세월호 유족들을 왕따 시키기 위한 전략이 성과를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의 위기를 차단할 목적으로 유족들의 요구를 왜곡, 폄하하는 것도 모자라 비아냥거리는 그들의 행태에서 인간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보조를 맞추듯, 초상집에 찾아가 제사상을 뒤엎고 유족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대며 실실 웃어대는 ‘엄마부대봉사단’, ‘나라지킴이 여성연합’ 회원이라는 자들의 비이성적 작태는 자신들이 국가폭력의 대리인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거나 정의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이런 가정의 자녀들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까. 도덕과 정의와 진실을 도외시하고 자라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겪어야할 군대생활과 사회생활이 어떨지 사뭇 궁금해진다. 작금의 군대폭력의 발단에 대해, 그 원인과 본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다.

정의의 폭력과 불의의 폭력

폭력은 인체에 내포되어 인간이 주체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닌 자연적 폭력도 있지만, 현재 진행되는 폭력은 지배세력이 개입 혹은 조장하는 직접적 폭력, 사회 및 세계의 구조에 의해 비도덕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 지속 가능성을 약회시켜 다음 세대에게 해를 입히는 시간의 폭력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직접적 폭력과 간접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이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경우는 대부분 지배 권력으로부터 행사되는 폭력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폭력의 주요원인은 공포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데, 모든 것을 소유한 지배층의 두려움은 더 많은 돈을 모으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를 두려워할 것이다.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정의, 국민행복, 소외계층 복지, 창조경제 등등을 앞세우는 것은 불의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술수에 불과하다. 애당초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에 관용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역사는 투쟁을 통해 변화,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인류역사발전이 온갖 구태와 모순을 깨는 민중들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활용하여 엄청난 폭력으로 역사의 발전을 저지하려 했다. 지배 권력은 민중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고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침탈을 기획하기도 하고, 모든 재도와 법(저들이 만든 법)을 동원한다. 제도의 이름으로, 법의 이름으로 불의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며 살인적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기본 권리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투쟁이다. 그리고 폭력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도 투쟁이며, 이 투쟁에서 ‘폭력은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투쟁의 결과는 패배감, 무기력 외에 별로 남을 게 없다.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맞서겠다는 각오와 결의는 폭력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지배 권력은 늘 불의의 폭력으로 민중들을 짓밟지만 노동자 민중은 정의라는 확신으로 투쟁한다. 때문에 모든 폭력을 나쁜 것으로만 규정하며 투쟁하는 것은 투쟁의 이벤트화를 벗어날 수 없고, 대중에게 무기력증만 안겨줄 뿐이다.

국가의 성장과 더불어 사회전반에 걸친 정책은 국민의 삶의 질과 국가의 자원분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노동계급은 이러한 국가정책에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거대한 논리로 작동한다. 계급정치는 정당, 노동조합 등 제도화된 정치와 파업, 투쟁 등 비 제도화된 정치로 노동자, 민중의 삶의 수준을 측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제도화된 계급정치의 영향력은 평가하기 어려운 수준에 놓여있으며, 비 제도화된 계급정치도 사안별 투쟁성과와 정세반전에 기여한 성과들은 있었지만, 사회 불평등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는 계급정치가 국가 영역에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제도정치의 한계점을 평가하자는 것이다. 소위 진보정치가 제도권에 진입하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된 이후 투쟁에서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은 투쟁동력 유지에 심각성을 초래한다. 투쟁의 동력이 무기력해지면 투쟁의 성과조차도 물거품 되는 것이며, 전교조, 공무원노조의 비 제도화 강요와 민영화 등등은 우리의 투쟁동력 상실, 혹은 투쟁오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나 정부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결과는 노동자, 민중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매우 심각하다.

광주항쟁에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시민군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국가와 정치집단의 제일 큰 과제는 먹고사는 문제였으며 21세기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문제를 가장 어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불안정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

오늘, 신자유체제의 구조조정의 영향은 노동자, 민중과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탐욕은 모든 가치의 중심이 돈이며 인간의 목숨은 부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그 투쟁방식이 어떤 것이든 정의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투쟁이 평화와 합법만을 고집하는 전략과 전술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촛불만을 유일한 투쟁수단으로 생각하기보다 적극적인 투쟁, 즉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전술구사의 폭도 넓어질 것이며 암울한 정세에 균열을 내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대오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4년 전, 5.18 민중항쟁에서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함락될 때, 가공할만한 화력과 잔인무도한 공수부대 진압군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데, 고작 낡아빠진 카빈총으로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사라져갔던 시민군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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