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특혜를 위한 위장매각과 정리해고, 자존과 생존권을 지키는 투쟁

[오늘, 우리의 투쟁]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텍지회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특혜와 착취로 배불린 자본이 노동자의 생존권을 저울질하는, 공단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인접 지역을 알리는 시·군 입간판에서 심심찮게 ‘기업하기 좋은’ 이라는 수식어를 마주친다. ‘기업하기 좋은’ 조건이 노동자가 일하고 살아가기에도 좋은 조건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금과옥조처럼 요지부동으로 내세우는 슬로건이다. 그에 걸맞게 전국 곳곳에는 무슨무슨 밸리니 허브니 하는 이름을 붙인 1,000개 이상의 각종 산업단지가 존재한다. 바로 공단이다. 공단은 기업을 집단적으로 설치·육성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개발한 공업지역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1962년 울산국가산업단지와 1964년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 조성을 통해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래 그 역사는 50년을 넘어섰다.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가난한 시골집의 대표선수가 되어 도시로 떠밀려와 하루의 반 이상을 기계처럼 일하며 가족과 나라 경제를 살렸다는 이른바 ‘산업역꾼’의 비참하고도 빛나는 신화의 한 쪽만 그늘로 남았다. 세대가 바뀌고 얼굴이 바뀌었지만 산업구조의 말단에서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으로 연명하는 공단 노동자들의 처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파견노동이 넘쳐나면서 고용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공단 노동자의 현실은 외면한 채, 낙후한 공단을 번듯하게 만들겠다는 정부의 갖은 계획들은 더 많은 이윤을 탐하는 자본의 이해와 만나 익숙하고도 새로운 위기를 끊임없이 빚어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공단의 개발계획에서 노동자는 존재감이 없다. 1997년부터 추진된 첨단화 계획으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된 구로공단에는, 시세차익을 노린 임대사업자들이 몇 년간 돌리고 떠나는 공장에서 불안한 파견노동을 지속하는 노동자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25만 명의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없다. 공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즐비한 고층건물들이 가득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정부는 ‘구조고도화’를 통해 지원시설 명목의 호텔과 백화점 등 상업시설을 늘이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의 반도체업체인 KEC 역시, 노조와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을 무시한 채 ‘구조고도화’ 사업 민간대행사업자로 참여해 현재의 공장 부지에 백화점과 호텔 등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시화하고 있다.

각종 산업단지의 개발계획은 오십 년째 현재진행형이고, 그 방향은 언제나 규제 완화를 통한 민간자본의 참여 확대였다. 체감할 수 없는 막대한 돈이 투입되는 사업계획에 중앙정부 산하 다수의 유관 부처들이 개입하고, 지자체는 선거철 단골 공약 삼으며 유치를 약속한다. 개발의 이익은 지역 주민도 공단 노동자도 아닌 기업으로 흘러들고, 유착한 정치권도 알게 모르게 주머니를 채웠을 것이다. 수많은 법률이 통·폐합되고 심지어 각종 인·허가 절차의 간소화를 위한 특례법까지 제정되며 지속된 산업단지 개발계획에서 수혜자는 언제나 돈과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산업단지 개발은 손쉬운 돈벌이를 갈망하는 자본에게 정부가 나서 길을 터주는, 견제 장치도 감시망도 없는 그들만의 리그다. 노동조합이라는 ‘걸림돌’이 없다면 말이다.

  2014.7.23. 풍산그룹 공장부지 특혜개발 중단 촉구 기자회견 [출처: 풍산마이크로텍지회]

방위산업으로 성장한 풍산, 개발 계획의 시동을 건 위장매각과 정리해고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위치한 반도체 리드프레임 생산업체 풍산마이크로텍 노동자들이 수년 간 투쟁하고 있는 이유 역시 풍산그룹과 부산시의 산업단지 개발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풍산그룹이 일찍이 방위산업체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히며 성장해 온 기업이고, 이를 통해 얻은 특혜를 개발과 연결해 막대한 이익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풍산은 1968년 부평공장을 설립하고 신동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해 비철금속, 방위산업, 정밀산업, 장비산업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벌여왔다. 1973년 정부로부터 탄약제조업체로 지정되었고 1982년에는 총알을 생산하던 육군 조병창을 인수해 동래공장을 운영해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장다변화와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해 200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 방산수출 1위 업체로 자리매김해왔다. 풍산의 또 다른 주력 생산품목은 동전의 원판인 소전이다. 1970년 한국조폐공사로부터 소전 생산업체로 지정되었고, 현재 60개국 이상으로 수출하며 세계 시장 교역량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생활재를 생산하는 기업만큼 일반에 친숙하지는 않지만, 탄약과 소전을 주력 생산품목으로 하는 풍산그룹은 창업 이래 국가의 긴밀한 파트너로서 적잖은 수혜를 누리며 사세를 확장해왔다.

풍산마이크로텍은 1991년 반도체 부품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동래공장 생산부를 분사해 설립한 (주)풍산정밀이 2000년 상호를 변경하고, 현재 중국과 필리핀에도 해외공장을 운영하는 상장사다. 공장이 위치한 부산 반여동 부지는, 1981년 12월말 조병창 민영화에 따라 그린벨트로 묶여있던 43만 평의 땅을 포함해 230억 원에 풍산이 인수한 땅이다. 향후 20년간 방위산업을 지속한다는 조건으로 헐값에 매입했다는 이 부지는, 개발제한구역임에도 1990년대에는 2,000억 원에 이르는 돈을 차입하는 담보가 되었다. 2004년에는 절반인 약 21만 평에 대해 공영 개발일 경우 그린벨트를 해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고, 풍산그룹은 이명박 정권 집권 이후 여당 출신의 부산시장과 지역구 국회의원 등을 접촉하며 특혜 개발을 위한 행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2008년 풍산그룹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기업지배구조를 변경했다. 이후 경북 경주에 위치한 안강공장에 탄약제조 현대화시스템을 구축해 동래공장의 방산부문을 이전하기 시작했고, 2009년에는 부산시에 돔 야구장 건설 계획과 함께 그린벨트 해제를 제안하는 등 부지 개발을 위한 계획을 가시화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돔구장을 빌미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려던 속셈이 여론의 역풍으로 좌절되자, 풍산이 내민 새로운 카드가 부산시와의 공조 하에 ‘반여도시 첨단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민주노조가 버티고 있는 풍산마이크로텍을 투기자본에 매각하고 부실경영을 통한 폐업 처리를 기대했을 것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풍산그룹의 류진 회장은 2000년에 취임한 창업자의 아들로, 2001년부터 전경련 부회장을 비롯해 국내외 다수의 산업협회와 자문기구 활동에 적극적인 인물이다. 다문화가정 아동의 인권과 복지 증진을 설립 목표로 내건 사회복지법인 한국펄벅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각종 교육·복지·장학재단의 이사로 사회공헌 등 대외활동에도 열심이다. 재벌 2세로서 이미지 관리까지 제법 잘 해왔지만 지난 봄 지주사 주식 증여과정에서 부인과 자녀들의 미국 국적 취득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고, 특혜 개발을 위한 위장매각과 창조컨설팅을 동원한 정리해고 등의 무리수가 드러나며 스타일을 구기고 있다. 탐욕을 제어할 줄 모르는 자본의 얼굴에 화장이 잘 받지 않은 탓이다.

  2011.10.17. 노동부집회 후 서면까지 행진 [출처: 풍산마이크로텍지회]

밑바닥을 드러낸 자본, 다시 세운 첫 마음으로 뭉친 노동조합

2010년 12월 30일, 풍산마이크로텍 노동자들은 연말 휴가를 보내던 중 날벼락 같은 매각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2009년 해운대 돔구장 건설 추진이 무산된 후에도 반여동 부지 개발에 대한 소문과 추측은 무성하게 나돌았다. 매각 관련 정황을 추적해 온 노조의 문제제기에, 풍산그룹 류목기 부회장이 직접 내려와 매각을 포기했다는 구두 선언과 함께 열심히 일하자는 독려로 어수선한 현장 분위기를 봉합한 것이 한 달 전이었다. 그러나 매각은 비밀리에 속전속결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은 배신감과 혼란에 휩싸였다. 2003년 3월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 이후 10%가 채 안 되는 조합원들이 외롭게 지켜왔던 노동조합에, 불과 한 달 사이 현장 노동자의 90% 이상이 가입했다.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텍지회는 풍산그룹 계열사 중 유일한 민주노조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노조 결성과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은 사업장이 풍산금속이었다. 1989년 1월 경주 안강공장에서 고강도 노동과 반복되는 산재 등으로 노조를 결성해 파업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1990년 9월 부산 동래공장에서 민주노조 출범 이후 노조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수천 명의 공권력 투입으로 연행되고 해고됐다. 특히 동래공장에서는 30여 명이 구속, 50여 명이 해고, 300여 명이 강제사직을 당했고, 이후 공장은 (주)풍산, 풍산마이크로텍, 풍산기계 등 세 개의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살인적인 탄압과 집요한 노조파괴 공작에 민주노조는 점차 무력화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명맥마저 끊겼다. 동래공장 법인 분리 당시, 상대적으로 젊은 노동자들이 풍산마이크로텍으로 넘어왔다. 1990년의 폭력적인 탄압과 대량 해고사태를 지켜본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2002년 연말 사측은 그룹 차원의 계열사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1996년 필리핀 공장에 이어 2001년 중국 공장을 설립·가동하면서 부부사원 중 한 명에 대한 강제사직이 실시됐다. 고용불안과 고조되는 불만을 동력으로, 2003년 3월 다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사측은 계열사 유일의 민주노조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임·단협은 지지부진했고 조합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구조조정이 반복되었으며, 탄압도 회유도 일상이 되었다. 십년을 참기만 하다가 용기를 낸 노동자들은 지쳐 떠나갔고, 스무 명 남짓의 조합원이 차별과 희생을 감내하며 7년간 금속노조를 지켜왔다. 그렇게 지켜온 깃발은, 듣도 보도 못한 투기자본에 일터를 빼앗기고 황망해진 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는 든든한 우산이 되었다.

2010년 12월 29일, 풍산마이크로텍 주식 지분 57.2%를 매입해 공장을 인수한 당사자는 (주)하이디스였다. 그러나 인수자금 차입처로 주식이 넘어가며 최대지주가 불분명해졌다. 2011년 3월 사장을 자임하는 사채업자들이 주주총회를 통해 사명을 (주)피에스엠씨로 변경했다.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주식을 차명으로 돌리고 7%의 지분으로 경영을 시작한 이들은 제일 먼저 사원주택과 자사주 등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노조와의 교섭에서는 한 달 만에 고용보장 약속을 뒤집고 임금 삭감과 구조조정 중에 선택을 강요했고, 심지어 아프리카 카메룬의 금광개발사업과 400억 원의 유상증자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투기자본의 속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제안을 노조가 거부하자 사측은 7월 29일 정리해고를 통보했다가 거센 반발에 8월 23일 합의서까지 작성하며 철회한다. 그러나 불과 열흘 만인 9월 2일, 돌연 입장을 바꿔 11월 7일자 정리해고를 예고하고 이후 희망퇴직자를 모집한다. 결국 11월 7일, 58명의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가 강행되었다. 평균연령 51세, 평균근속 25년의 노동자들은 청춘의 시간을 바치고 삶을 바친 일터가 투기자본에 의해 난장판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쫓겨나왔다. 그리고 12월 17일, 이 모든 사태의 배후인 풍산그룹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완공한 지상 16층, 지하 6층의 신사옥에 입주를 마쳤다.

  2014.4.14. 투쟁 895일차, 충정로 풍산본사앞 퇴근 선전전 [출처: 풍산마이크로텍지회]

구호를 현실로 만들며 승리를 향해가는 싸움

2011년 11월 2일부터 풍산마이크로텍지회는 매각과 인수 과정을 거치며 2년간 미뤄졌던 임·단협 성실교섭과 정리해고 철회 등을 걸고 총파업을 벌였다. 누가 해고될지 모르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시작된 총파업, 3일 만에 58명에게 해고통지서가 도착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민주노조를 찾았던 노동자들은 열 달 만에 또 다시 사측에 의해 갈렸다. 총파업이 시작되었지만 180명에 이르는 조합원들 중 70명가량은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고, 이후 복수노조로 흩어졌다.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낸 108명의 조합원이 해고 여부와 무관하게 총파업을 이어갔다. “함께 살자!”는 당위가 된 구호, 그러나 외롭게 버려졌던 구호를 현실로 만드는 시작이었다.

반 이상이 해고자였지만 해복투를 따로 구성하지 않고 지회로 뭉쳐 함께 싸웠다. 생계도 투쟁기금도, 한데 모아 똑같이 나누어 가며 위기를 넘겼다. 2012년 2월 지방노동위원회는 구제신청을 한 52명 전원에 대한 부당해고 판정과 함께 노조집행부 대다수를 정리해고한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했다. 억울하게 쫓겨나 난생 처음 거리의 싸움에 나선 조합원들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2012년 5월 말에는 한 달 간의 희망국토대장정을 시작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으며 정리해고 투쟁을 알려나갔다. 오뉴월 땡볕 아래 전국의 투쟁사업장을 도보로 순회하는 고달픈 일정,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발은 물집 투성이가 되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새로운 결의가 피어났다.

7월에 열린 중앙노동위원회에서는 22명의 부당해고를 인정하고 30명에 대해 기각했지만, 함께 일한 이십 년 세월보다 더 진하게 투쟁의 시간을 공유한 조합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9월이 되자 지회는 꼬박 열 달을 함께 싸운 비해고 조합원 43명의 현장 복귀를 결정했다. 사측은 1명을 부당해고하고 42명에 대해서는 정직 3개월 등의 징계를 때렸다. 그 사이 단련된 조합원들은 징계와 교육을 거쳐 돌아간 현장에서 위축되지 않았고, 공장 안팎에서 싸우는 조합원들은 묵묵하게 투쟁을 이어가는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무거운 시간을 견뎌나갔다.

2013년 5월 16일, 서울행정법원은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을 뒤집고 소송에 참여한 48명 전원에 대해 부당해고를 판결했다. 2014년 9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서울행정법원 판결에 대한 사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노동위원회부터 행정법원까지 줄줄이 패소한 사측은, 고등법원 소송에서 법률대리인을 김앤장 로펌으로 교체하고 승소를 자신했지만 완패했다. 이틀 뒤 부산시의 도시첨단산업단지 개발을 위한 사업제안서 제출 마감일이었던 9월 26일에는, 부지 소유주인 풍산그룹이 참여를 포기하며 개발계획이 잠정 중단됐다.

물론 아직은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조합원들의 마음 속 자부심과 희망은 나날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풍산그룹은 개발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테지만, 지나온 삶이 그대로 담겨있는 정든 일터가 탐욕의 질곡이 되는 것을 함께 막아냈다. 대법판결 이전에 그리운 일터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한뎃잠과 천막생활을 감수하고 싸우며 여기까지 왔다. 낯선 거리에서 엄습하는 불안을 함께 떨쳐내며 다져온 동지애로,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텍지회 조합원들은 하루하루 승리를 향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정리해고 이후 4년 “함께 살자!”는 익숙한 구호를 현실로 만들며 투쟁해 온 동지들의 멋진 승리를 응원한다.

  2011.11.3. 총파업 2일차 본관앞 집회 [출처: 풍산마이크로텍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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