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로스를 꿈꾸던 사내는 골방으로 숨어버렸다

"아빠 인생이 너무 불쌍해요"

“아빠는 언제 오세요”

혜리(33, 가명)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아버지는 현대중공업에 다녔다. 해치커버(hatch cover) 생산부 가공팀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딸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들고 퇴근했다. 혜리는 바나나를 좋아했다. 아버진 여름에는 바나나를 사들고 퇴근했고, 겨울에는 달콤한 팥 내음 풍기는 붕어빵과 함께 귀가했다.

“아빠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세 살 터울 언니와 혜리는 곧장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해군 특수부대(UDT)에서 근무한 아버지는 풍채가 남달랐다. 아버지가 두 팔을 뻗어 니은(ㄴ) 모양으로 굽히면 한쪽 팔에는 두 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다른 한쪽 팔은 엄마 몫이다. 아버지는 두 팔에 세 여자를 매단 채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마냥 이어질줄 알았던 웃음은 혜리가 고2가 되면서 한숨으로 바꿨다.

혜리의 아버지 임영복(63)은 경남 양산의 한 정신병원에 있다. 우울증. 영복의 병명이다. “고2때,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회사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누워만 있었어요” 혜리는 10여 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관련기사 http://www.usjournal.kr/News/63872]

마도로스 꿈 접고 조선노동자로

영복은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다. 경남 진해서 나고 자란 그는 바다와 친했다. 해군 지원도 그 때문이다. 영복은 1976년 군 복무를 마치고 당연한 것처럼 조선소 일을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조선업 등 4개 업종을 국책 사업으로 정해 육성했다.

정주영 전 회장이 울산 미포만에 만든 조선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초기 현대조선소는 말 그대로 지옥불이었다. 하루가 멀게 사람이 죽어나갔다. 조선 기술이 전무했고, 작업자는 모두 초짜였다. 대부분 시골에서 농사짓던 농군이었다.

영복처럼 해군 복무를 한 사람은 경력자로 인정받았다. 배 만드는 게 아니라 배를 탔던 사람이 경력자로 인정 받았다. 높은 곳에서 철판을 절단하면서 절단면에 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아무 기술이 없었다. 기술도, 기본도, 상식도 없는 곳이 조선소였다.

영복은 제대 무렵 만난 김순옥(63)과 함께 울산에 자리 잡았다. 조촐하게 가정도 일궜다. 신혼여행도 가지 않고 돈을 아껴 책장을 구입할 만큼 넉넉지 못한 신혼이었다. 작은 월세 단칸방에서 냄비, 숟가락, 밥그릇 몇 개만 가지고 소꿉놀이처럼 신혼을 시작했다.

부식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1980년 4천세대 가족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때 이사하려고 당신과 아파트 청소를 새벽 3시까지 하면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당신의 그때 모습...” 영복이 1988년 회사 사보에 기고한 글에는 그 시절 기억이 아련히 묻어있다.

조선소에서 일하면서도 영복은 마도로스의 꿈을 접지 못했다. 그때마다 순옥이 그의 손을 잡았다. “외양선 타고 나간다는 걸 제가 잡았어요. 한 우물만 파자. 가족이 떨어져 살지 말자고 내가 안 된다고 막았어요. 그때, 그걸 막지 말아야 했어요”

마도로스를 포기한 영복은 가족을 위해 살았다. 하루 기본 노동시간이 12시간이었다. 임금은 박했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 조선소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의 20% 수준에 불과했다. 오늘날 한국 조선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데는 저임금 노동이 큰 몫을 했다.

“한 달에 412시간을 일했어요. 몸 바쳐도 돈 더 주는 것도 아니라고 돈 받는 만큼만 일하라고 했어요. 그랬는데도 그렇게 열심이었어요.”

피곤하기도 할텐데 영복은 매일 아침 누구보다 먼저 눈을 떴다. 새벽같이 일어난 그는 순옥과 두 딸을 깨웠다. 집 가까운 울기등대로 아침 운동을 나서기 위해서다. 혜리와 언니가 용케 눈을 뜨면 함께 가고, 그렇지 않으면 순옥만이라도 함께 나섰다. 그는 운동을 좋아했다. 집엔 각종 아령에 자전거, 벤치프레스까지 갖춰둘 정도였다.

  이른 아침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20여년전 저들처럼 활기찬 아침을 맞았던 영복은 이제 좁은 정신병원 병동 신세를 지고 있다. [출처: 울산저널 이상원 기자]


망가진 어깨, 불행의 시작
혜리가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부터 영복은 엎드린 채 혜리를 불렀다. 작은 혜리가 자신의 어깨를 밟도록 했다. 혜리는 그마저도 놀이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왜 어깨를 밟으라는지 몰랐다.

1990년 3월 작업 중에 왼쪽 어깨를 다쳤다. 작업 자체가 어깨에 무리가 많이 갔다. 주로 거대한 철판을 절단하는 작업이었다. 작업은 먼저 지렛대를 이용해 철판의 중심을 맞추는 일부터 해야 했다. 이 일이 어깨에 많은 부담을 줬다.

회사 안에도 자기처럼 아픈 사람이 많았지만 굳이 산업재해 신청을 해서 승진에 나쁜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윗사람이 곤혹을 치르는 것도 싫었다. 영복은 혼자 아픔을 감내하며 참았다. 어깨는 4년 만에 완전히 망가졌다. 1994년 2~9월까지 근 200일 동안 어깨 때문에 쉬었다.

망가진 어깨는 이후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고 작은 사고를 여러 번 당했다.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1998년 6월에는 후배 박진수(가명)와 작업하던 중 후배가 지렛대를 놓쳐 철재가 오른쪽 무릎을 때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 때도 영복은 산업재해는 커녕 공상 요구도 없이 스스로 해결했다.

회사를 위해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다친 곳은 점점 악화됐다. 자상하고 성실했던 영복이 조금씩 변한 이유다. 집에 오면 신경질을 부리는 일이 잦아졌고, 몸으로 하는 일에 자신감도 잃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회사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했다.

결정적 사건은 1999년에 일어났다. 영복은 작업장에서 한 여성 노동자의 일을 거들어 주다가 후배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다.

김중오(가명)는 영복보다 8년 후배로 영복에게서 일을 배웠다. 영복이 몸 상태 때문에 자주 회사를 비우고, 작업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사이 중오는 영복보다 먼저 반장으로 승진했다.

1999년 9월 어느 날 중오는 영복이 작업을 게을리 한다고 삿대질에 멱살까지 잡았다. 중오는 “다른 부서로 전출을 보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반장에게 ‘찍힌’ 영복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따돌림 당했다. 수모를 견디지 못한 영복은 무단결근했다.

회사는 20년 넘게 회사를 위해 살아온 그에게 업무에 복귀 않으면 자동퇴사 될 것이라는 통보를 남겼다. 그리곤 그해 10월 18일 자동퇴사 처리했다. 영복은 회사마저 자신을 버린 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골방에 숨어버린 아버지

고2 혜리는 집에 돌아오면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매일 어두운 다락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벽만 쳐다봤다. 예뻐하던 딸이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영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고, 웃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고, 씻지도 않았고, 잘 먹지도 않았다. 순옥이 먹을 것을 준비해 거실에 두면 어두운 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슬그머니 내려와 정말 죽지 않을 만큼 먹었다. 순옥은 “시체 썩는 냄새보다 더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말했다.

우울증이란 병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 시절이다. 순옥은 영복을 원망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한순간에 사람이 변해버리니까. 원망스럽기만 했어요” 지인을 통해 정신병원을 소개 받아 확인한 영복의 상태는 심각했다. 입원치료를 시작했다. 수입은 없고 지출이 늘었다. 가정이 무너졌다. 자수성가한 집을 팔고 다시 월세방으로 돌아갔다.

15년이 흘렀다. 영복은 여전히 마음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던 혜리는 서른을 넘겼다. “아빠 인생을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해요. 아빠 아프고 나서부터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잘 안나요. 안 아플 때 아빠는 정말 풍채도 좋고 스타일도 좋았는데 지금은,,,” 혜리는 울먹이며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검은색 폴라티에 청바지를 멀끔하게 입은 한 남자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머니와 나란히 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말

이상원 기자는 울산저널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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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설노동자

    노동자들이 폐기물처럼 살아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