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현실성’이라는 차가운 돌

[새책] 공산주의의 현실성(브루노 보스틸스, 염인수 역, 갈무리, 2014)

칫솔이 닳는 일, 물이 마르는 일, 머리카락이 빠진 뒤에 새로 자라는 일, 내가 잠시 아프다가 낫는 일,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 사랑하던 사람과 돌연 헤어지는 일, 어느덧 부모가 죽는 일, 나무가 쓰러지는 일, 힘써 대통령을 바꾸려다 지는 일, 그런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는 일.

그러니까,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변하는 일들 일색이다. 변화에 대한 언급이 잦아짐에 따라 차이와 창조에 대한 강조가 유행처럼 번진다. 이렇게 변하고 있는 사실들 가운데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것들을 기록하고 서사화한 것을 역사라고 하자. 여기에 알랭 바디우의 견해를 덧붙이면, 실은 역사는 국가라는 권력으로부터 절대 빠져나올 수도 없을 뿐더러, 국가의 역사만이 국사(國史)이자 세계사(世界史)임을 주장함으로써 역사를 국가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구성된 역사의 지평 속에서 다시금 진리를 고찰해보았을 때, 고정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바디우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진리는 오히려 우리가 매번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하나의 사건 자체에 가깝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한 인식과 갈망은 계속해서 우리가 진리, 혹은 이념(idea)이라는 내용의 이삿짐을 더욱 번듯하고 새로운 집으로 옮기도록 끊임없이 추동해왔다.


정치라는 개념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크 랑시에르의 경우에는, 몫이 없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가르는 분할선과 각자의 구획된 영역을 고정시키고 유지하려는 치안(la police)의 문제였던 정치를 다시 생각하며, 그러한 분할선의 제도화를 방해하려는 행위가 벌어질 때 그 틈새에서 새로운 정치(la politique)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름답고 솔깃한 견해로, 최근 랑시에르를 비롯한 여러 정치철학자들의 새로운 사유는 예술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지점에서, 혹은 사변적인 문제를 떠나, 국내에서 벌어진 여러 재앙과도 같은 사건들을 다시 생각하고 그 재앙 이후의 삶을 함께 모색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비판 이론의 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브루노 보스틸스는 이러한 견해에 새로운 주석을 달고자 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공산주의의 현실성』(갈무리, 2014)이다.

브루노 보스틸스는 『공산주의의 현실성』에서 앞서 언급한 일련의 경향을 묶어 “사변적 좌익주의”라고 논평한다. 랑시에르나 바디우도 순수한 이론적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사변적 좌익주의로 간주하고 피해가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들도 공산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 규정하고 사변으로 빠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 역시 공산주의가 가질 수 있는 현실성과 실행(act)의 문제를 자신도 모르게 포기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스틸스가 비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여럿의 노력에 의해 다시 사유되고 있는 정치라는 개념이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실행성, 혹은 역동성에 활력을 보탠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두뇌에서만 작동하는 독점적 권한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철학은 실행의 정치가 아닐 것이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철학자의 욕망에 애써 이름을 붙인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더욱 격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론화 작업 속에서 일어나는 정치의 배제(de-politicization)라는 것이 바로 보스틸스의 주장이다. 이는 ‘미학 안의 불편함’을 지적한 랑시에르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좌익주의 안의 불편함’이기도 하다.

보스틸스가 보기에 우리는 공산주의가 어떻게든 이미 현실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심지어 랑시에르는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으로부터 에둘러 출발하는 것이 이득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여러 형식으로부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적극적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은 결국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공산주의를 생각할 경우에, 때(時)가 없고, 장소(所)가 없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언제나 공산주의의 현실화라는 가능성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현실화의 타당성 여부를 가늠하는 문제 앞에서 우리가 실행에 옮겨야 할 모든 것을 중단하게 한다. 이제는 정치적 실행과 운동이 진퇴양난의 장소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좌파에게는 너무 많은 실패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보스틸스는 좌파가 스스로 끊임없는 좌절의 역사 속에서 자기 학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염려한다. 그는 웬디 브라운의 말을 빌려, 좌파가 희망 가운데 머무르기보다는 자신의 주변성과 실패 가운데 머무르는 일이 가장 편하다고 느낀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실패의 악몽 속에서 만들어지는 헛된 사변들, 도달할 수 없는 이념들보다 강력한 현실이 눈앞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때 보스틸스가 주목하고 있는 현실은 볼리비아의 부통령인 알바로 가르씨아 리네라의 정치적 행보와 이론이다. 그에게 공산주의란 현실적으로 전방위적인 집단적 자기 해방의 실행이며, 이는 공산주의를 통해 어떤 공동체, 시민사회, 민족국가, 혹은 국제 조직으로서의 인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쥘 수 있다는 확신으로 드러난다. 보스틸스는 이를 좌파가 직면했던 불가능성의 유산을 극복하는 시발점으로 제시한다. 국가가 개인과 소유물, 권력의 관리자로 작동할 때, 공산주의는 사회의 내재적 구조 속으로 눈을 돌려, 이미 조직된 국가와는 관계가 없는, 다소 불연속적인 인민과 사회의 힘을 북돋고 있기 때문이다.

보스틸스의 일관된 주장처럼, 분명히 공산주의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실패해 왔다. 하지만 언제나 현존하는 질서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닿을 수 없는 이념이 아니라 절대로 변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확언하기에 앞서 짚어보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가능한 상태에서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에 도달한 상태에서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라면, 우리가 공산주의의 불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비현실성을 생각하는 것은 공산주의가 정말로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 우리가 도달한 단계를 대변하고 다시금 성찰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불가능성에 도달한 이상, 우리는 그것을 초과하여 현실성과 가능성을 다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때가 되면 나타나는 어떤 변화와 유동성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역사 속에서 줄곧 보여주었던 일관성과 완고함에 기댄 확신이다.

이제는 보스틸스의 책을 덮고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여러 정치철학이론의 범람을 맞이하여 잠시 흥분해 있었던 것 같다. 랑시에르나 바디우, 지젝과 같은 굵직한 학자들의 이름을 여러 번 찾거나, 어디에서나 그들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런데 보스틸스가 『공산주의의 현실성』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가지 논의들은 이러한 유행에 잠시 제동을 걸고 뒤를 돌아보게 한다. 정신없이 걷다 문득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 손가락 끝에 닿은 낯선 물건의 감촉을 느끼고 잠시 발걸음을 멈춘 기억이 있다면, 그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보스틸스는 우리의 황망한 걸음을 멈추게 할 ‘공산주의의 현실성’이라는 차가운 돌을 우리의 호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 두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찬초(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