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주의, 수정주의의 낡은 전략인가 대안적 경제정책의 토대인가?

[주례토론회] 경제민주주의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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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주의는 1920년대 이래 수정주의적/개량주의적 독일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강령적 이념이었다. 그러나 사민당의 베를린 강령(1989년)에도 경제민주주의가 명문화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래 사민당의 중도노선과 함께 당의 전략논쟁 중심으로부터 퇴조한 상태다. 사민당과 독일노총 DGB 지도부는 (1998년 이래 실천된) 슈레더의 현대화전략을 고수하였고, 1999년 이래 사민당 강령토론에서 자본주의나 경제민주주의는 언급되지 않았다. DGB 지도부는 2006년 공동결정법 30주년 기념 한스 뵈클러 재단(Hans-Böckler-Stiftung) 행사에서도 경제민주주의를 사회적 파트너쉽의 틀 안에서 언급할 뿐이었고, 베트립(Betrieb) 및 기업수준의 공동결정만 고수하였다.

그러나 개별 노동조합에서는 여전히 경제민주주의론의 전통을 대변하는 많은 논자들이 있다. 즉 기업과 콘쩨른 수준의 공동결정의 국민경제적 결정으로의 확대, 사회적, 국가적 통제와 조절, 경제과정에서의 개입을 요구한다. 또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사회적 책무와 긴박시키는, 사적 소유권의 자유를 제한하고 공공복지에 연계시키는 입법적 규제를 요구한다.1

특히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가져온 위기 속에서 대안경제정책의 하나의 토대로서 경제민주주의는 사민당 안팎에서 여전히 논의되고 활성화되고 있다. 이미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함께 등장한 독일의 대표적인 좌파 케인스주의 연구그룹인 ‘대안경제정책 연구그룹’(통칭 ‘메모란둠 그룹’)도 경제민주주의의 요구를 담고 있었다. 1980년대에도 구조위기의 진전에 따라 사민당 안팎에서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주목할 만한 토론이 있었고, 위기에 빠진 철강산업의 사회화 요구가 금속노조에 의해 제기되기도 하였다.2

2005/2006년 이래 독일 좌파당의 출범을 위한 강령 토론에서도 경제민주주의론이 제기되었다.(좌파당 창당을 위한 강령토론 문건들(‘격문’과 ‘입각점’, Ulla Plener, 같은 글 참조). 두 문건에서 경제민주주의 문제는 소유관계의 민주화, 경제권력의 통제, 공적 소유 및 생존보호, 공동결정권, 그리고 경제과정에의 국가개입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경제민주주의와 대안경제정책을 부르주아 국가의 틀 내에서 얼마만큼 실행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고, 여기에는 개량주의라는 딱지가 따라다녔다. 플레너에 따르면, 위 문건들에서도 정치의 우위를 말하면서도 국가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모델이나 복지국가의 표현 속에서 등장하고 국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토론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대안토론 속에서 경제민주주의를 다시 꺼내들 수 있는 건지, 경제민주주의론의 의의와 한계,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국가의 성격과 경제민주주의의 위치에 대해 엄격한 검토가 요구된다.

경제민주주의론의 역사

독일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이미 19세기 말 개량주의 노조지도자 레긴(Carl Legien)의 공동결정과 노자협조주의 노선과, 같은 시기 베른슈타인을 둘러싼 수정주의 논쟁으로 거슬러간다. 하지만 경제민주주의론의 구상은 독일노동조합총동맹(ADGB)의 위임을 받아 1928년 나프탈리(F. Naphtali)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이념노조 ADGB의 경제민주주의는 사회화, 공동결정, 계획을 기본 요소로 하였다.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는 힐퍼딩의 조직자본주의론에 입각하였고, 나프탈리 등의 집단저작 자체도 힐퍼딩 등의 자문을 받고 작성된 것이었다.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론은 세계대공황과 독일 파시즘의 등장으로 짧은 기간 역사 무대에 등장했을 뿐이었지만, 1917-33년 집중적으로 토론되고 선동되었던 경제민주주의 논쟁의 정점이었다.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보수당인 기민당(CDU)의 Ahlener Programm 도 자본주의를 비판하였고, 사민당(SPD)과 아울러 1949년 독일노동조합동맹(DGB) 기본강령도 완전고용과 공동결정, 핵심산업(광산, 철강, 화학, 에너지, 수송, 금융기관 등)의 공동소유로의 전환, 사회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 정권(CSU, CDU, FDP, DP 연정)은 핵심산업의 사회화, 국가계획과 개입주의, 공동결정 모두를 거부하였고, 경제민주주의, 하다못해 공동결정도 특히 경제부장관 에르하르트에 의해 초지일관 거부되었다. 그건 질서자유주의 즉 독일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반영이었다. 다만 사회적 시장경제(뮐러-아르막)가 확립됨으로써 독일에서도 국가개입주의, 사회적 균형, 소득분배,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독일 신자유주의의 이론 변화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전후 질서와 SPD 및 DGB 등 정치적 압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SPD는 그 후 당내 좌우파의 논쟁을 거치면서 이미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에서 사회화 요구를 삭제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기본 질서로 수용하였다. 반면 노동조합에서는 1961년 독일 최대노조인 금속노조 위원장 브레너에 의해 경제민주화 요구가 다시 제출되었는데, 그는 1949년의 DGB 기본강령에 의거해 경제민주화 구상을 3단계 이론으로 정리하였다. 즉 거시적 수준에서 완전고용과 사회복지를 위한 국민경제적 계획, 중간 수준에서 경제권력의 통제, 미시적 수준에서 기업의 결정과정에의 노동자 참여가 그것이다. 그 목표와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브레너의 경제민주주의 3단계>

1970년대 이래 경제민주주의 구상은 공동결정의 미시적 수준에서, 작업장 공동결정과 노동의 인간화에서 보완되었다. 이는 기계화된 반복 부분노동의 비인간적 노동구조는 방치한 채 법률과 임단협 그리고 공동결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과정 프레임조건의 인간화를 추구하던 이전의 구상에서 질적으로 도약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래는 중간수준과 거시적 수준에서 기업 및 경제정책의 생태적 지향과, 체계적인 노동시장 계획의 요구와 전략이 제출되었는데, 이는 장기침체 및 그 하에서 진행된 합리화와 생태위기가 그 배경을 이루었다. 에너지와 자원 절약/재생과 생태보존, 완전고용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 및 재분배와 노동창출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980년대 이래 경제민주주의는 후퇴하였다. 이는 장기침체와 대량실업, 재정적자, 그리고 신자유주의 득세와 복지국가 해체, 산업입지 이데올로기, 전후 사회적 시장경제 대신 등장한 시장근본주의와 관련되어있다. 특히 독일 최대 DGB 소유기업 노이에 하이마트(Neue Heimat) 매각을 계기로 금속노조, DGB가 공동경제의 이념으로부터 탈각하고 노동조합적 보수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1963년, 1981년 강령까지도 유지되었던 사회화 요구가 1996년 강령에서 포기되었고, 이 강령에서 DGB도 사회적 시장경제를 자신의 목표로서 선언하였다. 한편 그 와중에도 생태적 경제개조로의 전환은 새로운 발전이었고, 유연공정으로 전환한 기업들에서 그룹아르바이트의 확대된 노동업무에 작업장 공동결정의 요구를 반영한 것도 또 다른 성과였다.

요약하면 사회화와 경제민주주의는 사민당과 DGB의 역사에서 결국 퇴조하였다. 공동결정과 관련해서 보아도 1951년 몬탄 공동결정법을 차치하면, 공동결정법에서 노동조합은 패배하였다. 1952년의 베트립기본법3과 500인 이상 기업과 협동조합에서 감독이사회의 1/3 대표는 사이비 공동결정이었고, 베트립 기본법은 지금까지도 공동결정을 갖추고 있지 않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기존의 기업 및 베트립 수준의 공동결정도 공격받았다. 2005년 공동결정은 기업수준에서는 1/3 대표까지 포함해서 전체 피고용자의 13%(약 3천만 명 중 4백만 명), 베트립 수준에서는 전체 기업의 17%(서독, 피고용자의 47%), 15%(동독, 피고용자의 38%)만 베트립 평의회를 갖고 있다.4

*독일의 공동결정은 3형태로 구분되어있다. 초베트립수준, 기업수준, 베트립수준의 공동결정. 초베트립적 공동결정은 연방노동에이전시 같은 사회보장 자주관리기관, 기업수준 공동결정(감독이사회)은 3형태, 즉 1951년 몬탄 공동결정에서의 동등한 공동결정(몬탄 공동결정법, 피고용자 1000인 이상 광산 및 석탄철강기업), 1976년 공동결정법에서 동등한 공동결정(피고용자 2000인 이상 기업), 1/3 참여 공동결정(2004년 1/3참여법, 그전에는 베트립기본법에 의해 규정, 피고용자 500인 이상 2000인 이하 기업), 마지막으로 베트립수준의 공동결정[베트립기본법].(이상에 대해서는 공동결정/경제민주주의, 위키피디아 독일판 참조.) 이렇게 공동결정이 적용되는 기업 범위도 제한되어있지만, 그 내용도 냉철하게 살펴보면 제한적이다. 우선 일정 수준의 기업(피고용자 2000인 이상)에 대해서만 감독이사회에서의 동등한 공동결정을 인정한다. 몬탄공동결정(1인의 노동이사)을 제외하면 집행이사회에서의 노동자대표는 없다. 동등한 공동결정이라 해도 몬탄공동결정을 제외하면 노자 동수의 경우 자본가를 대표하는 감독이사회 의장이 결정권을 행사한다. 동등한 공동결정이라 해도 노동조합은 피고용자 대표의 일부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공동결정은 아니다. 그리고 동등한 공동결정이라 해도 결국에는 자본가들의 주주총회가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결국 노자 공동결정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Heiz-J. Bontrup, 같은 글 참조).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론

1920년대 독점화의 강화가 경제민주주의와 조직자본주의론의 출발점이었다. 독점의 조직과 함께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의 관리에 참여할 수 있고 노동자와 기업가의 이해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토대가 경제의 민주화고, 자본주의 국가가 그 실행의 1차적 담지자가 된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민당 개량주의 지도부는 자본주의 국가가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전화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점점 더 계획적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5

1928년 나프탈리 주도하의 집단저작 <경제민주주의>에서 기본 테제들이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이하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경제민주주의를 통해서 사회주의로”,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경제체제의 전화 과정으로서” 이해된다. 경제민주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구체적, 현실적 길로 규정되었다. 나프탈리는 다른 글6에서도 노동해방 투쟁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이 문제라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주의 경제가 이념적 지향임을 밝혔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입각한 기업가의 독재체제며, 자유경쟁 경제로부터 독점의 조직화된 경제로의 자본주의의 변화 자체는 경제민주화와 아무 관계가 없고, 오히려 반대로 자유경쟁 시기보다도 더 자본주의적 권력의 거대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조직자본주의로의 발전으로부터 경제민주화로의 추동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국가를 통해 대표되는 공동의 이해에 거대 기업조직의 운영을 종속시키려는 요구 말이다. 동등한 권한을 갖고 노동조합의 대표자도 참여하는 특별 기관을 갖춘 국가의 통제를 통해 거대 기업조직의 행동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를 통한 위로부터의 통제만이 아니라 직접 경제에서 노동자들의 공동참여Mitwirkung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 구상은 당시에 이미 현실적 토대도 갖고 있었다. 나프탈리가 주목한 바처럼, 당대에 독일에는 이미 석탄과 칼리산업에서 경제적 자주관리조직이 존재하였고, 혁명기 타협으로 실현된, 사적 독점체와 사회주의 경제조직 사이의 중간형태도 고려대상이었다. 나프탈리는 공기업의 확장경향도 주목하였고, 공기업의 가격정책이나 노동조건이 자본주의적 환경에 종속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더 이상 이윤추구가 결정적 관점이 아닌 공동경제의 건설에서 공기업이 수행하는 역할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소비협동조합에도 주목하였고,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교육제도의 개혁도 열거하였다. 노동시장과 관련해서 나프탈리는 임금 및 노동조건에서 전후 공동결정 입법화가 노동시간, 노동자 보호, 사회보장 등 국가와 법령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시킴으로써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나프탈리도 경제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요구고, 그 자체로는 아직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않지만, 아마도 기업가의 독재를 일층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론은 앞서 말한 바대로 힐퍼딩의 조직자본주의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힐퍼딩은 1910년의 <금융자본>에서는 불비례 공황을 주장하였고, 조직자본주의론의 단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자본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지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오면 이미 조직자본주의론의 관점을 제출하였다. 1924년 힐퍼딩은 자유경쟁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였고, 이는 조직자본주의며, 거대독점체가 은행과 결합해서 이전에 산업, 상업, 은행자본의 분리된 형태들이 금융자본 형태로 통합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자유경쟁자본주의로부터 조직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는 것이다.7

1927년 킬 당대회에서 힐퍼딩은 다음처럼 주장하였다. “조직자본주의는 ... 계획적 생산의 사회주의 원리로 자유경쟁의 자본주의 원리를 원칙적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식적으로 관리되는 계획적인 경제는 ... 사회의 의식적인 개입 가능성, ... 다시 말해 국가를 통한 개입 가능성의 토대다.”8 이로부터 힐퍼딩은 심각한 경제공황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또한 힐퍼딩은 트러스트의 계획적인 (반순환적) 투자 배분과, 이에 조응하는 대은행의 신용조절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등에 주목함으로써 경기순환정책을 선취한 측면도 있다. 이는 국가의 경기순환정책에 대한 사회개량주의적 논거의 하나9를 이룬다. 1928년 또 다른 문헌에서 나프탈리는 이제 경기순환을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그게 경제정책의 대상일 수 있다고 하였다10.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당의 경제정책 목표는 공황의 극복, 완화 그리고 방지다.”11.

이로부터 공황기 노동자계급의 생존조건을 위한 경제투쟁 요구가 제기되었다. 마이쓰너에 따르면 당대 마르크스주의자가 공황기에 계급대립이 첨예화되고 혁명적 운동이 고양된다는 관점을 가졌던 반면, 나프탈리는 반대로 공황기에 혁명적 기세가 퇴조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에 따라 이 시기 노동자들은 경기회복을 위해 투쟁한다는 결론을 끌어내었다. 이렇게 사민당 지도부는 대공황 시기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한 경제정책의 제안을 뒷받침하였다. 그러고도 정작 대공황 시기 ADGB의 대규모 고용창출 프로그램인 WTB(Woytinsky-Tarnow-Baade)플랜(1932)에는 힐퍼딩도, 나프탈리도 회의적이고 소극적이었다.

나프탈리 경제민주주의론: 비판과 쟁점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론은 당시 부르주아 진영으로부터 격렬하게 공격받았을 뿐 아니라 탈하이머를 비롯한 당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수정주의 전략이라고 집중적으로 공격당했다.12 탈하이머는 경제민주주의에 의해 지배된 1928년 ADGB 함부르크 대회에 대해 노동조합이 이제 임금과 노동시간 같은 직접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거나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고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방식으로부터 미래의 사회주의 경제방식으로 가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나 반문한다. 경제민주주의가 정말로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아니면 기만이고 망상인지 문제제기와 함께 경제민주주의란 게 가능한가, 경제민주주의는 정말 사회주의로 인도하는가, 경제민주주의로 노동자들의 상태가 개선될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 문제를 검토한다.13

탈하이머는 우선 민주주의와 경제는 완전히 다른 심급의 개념이고(민주주의는 정치에 속하는 것), 경제민주주의는 두 개념을 혼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경제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경제의 본질은 어떤 계급이 생산수단과 잉여가치를 지배하는가 하는 것이며, 이 계급의 정치적 지배가 민주적이냐, 전제적이냐, 과두제냐 여하는 경제의 기본 성격에 대한 평가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탈하이머에 따르면 경제민주주의는 좋게 생각해도 소유의 평등이나 기회의 평등인데, 이는 반동적인 소부르주아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독점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수정주의자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주식회사와 소액주주를 들고 나왔지만, 주식회사는 자본집중의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노동자계급이 감독이사회 같은 독점의 지도기관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관념도 탈하이머에 따르면 계급투쟁의 지반이 아니라 계급평화와 계급조화의 지반위에 있는 것이다. 사민당의 정부참여가 부르주아 국가의 동일한 기반을 토대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탈하이머는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원칙적인 비판에 더해 경제민주주의의 실천을 들이대면서 자신의 관점을 변호하였다. 즉, 당시 독일에는 제국석탄이사회와 제국칼리이사회, 그밖에 철강 및 전기산업에도 상응하는 조직이 있는데, 예컨대 제국석탄이사회(제국석탄협회의 최고기관)는 60명 중 노동자대표는 22명인데, 여기서는 우선 합리화의 촉진이 추진되었다고 한다. 그로써 자본집중은 강화되었고, 기업가의 이윤 몫은 증가되었으며, 노동자의 임금 몫은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시간은 증대되었고, 경기상승에도 합리화로 인해 실업이 창출되었으며, 소비자에 대한 폭리는 증대되었다. 노동자대표는 이 기관에서 독점에 매우 유용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경제민주주의는 계급투쟁의 약화에 기여했고, 가격인상을 위한 그럴듯한 논거가 되었으며, 노동귀족 중 특정계층의 부패 수단이 되었다. 결국 탈하이머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독점조직으로 밀고 들어간 게 아니라 역으로 독점이 노동자조직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제한한 게 아니라 독점의 착취를 위한 보호벽을 세워준 것이고, 사회주의 세력의 강화가 아니라 억압이라는 것이다.

탈하이머는 경제민주주의에 있어 이른바 비자본주의적 기업의 세 가지 형태 즉 공기업, 협동조합, 노동자소유기업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의 일반적 이해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공동의 복지가 아니라 전체자본가의 이해가 공기업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가격 결정에서 공기업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기준을 따라야 하고, 평균이윤 이하의 공기업은, 그렇지 않으면 사적 자본이 감수해야 할 손실을 노동자계급에게 떠넘기는 것이거나, 또는 전체 자본가의 이윤증대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부르주아 국가의 공기업이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선언하는 사고는 전체 자본가적 관점이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공기업은 본질적으로 사적 독점체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사적 독점은 사회화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기술적,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이지만, 이 사회화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토대위에 입각한 것이고, 그러한 한에서 모순적이다. 국가자본주의는 본질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로 사적 독점과 구별될 뿐이다. 기술적, 조직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경제 전의 마지막 단계이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동시에 극단의 반대물이다. 계급적으로 보면,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착취의 전 체계를 위한 가장 강력한 보호벽이고, 가장 광범위한 경제적 받침대다. 따라서 사회주의 투쟁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동맹자가 아니라 계급의 적의 가장 강력한 보루라는 것이다.

탈하이머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은 사적 자본가적 기업의 국유화에 맞설 이해관계도, 또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 또 개별기업을 위해 자본집중에 대항할 이해관계도,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 노동자계급은 퇴보적 관점 즉 개별기업이나 사적독점의 관점에서 국가자본주의와 투쟁하는 게 아니라 진보의 관점 즉 사회주의 경제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관점에서 투쟁한다. 언제나 국가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또 그 본질을 반대물로 변조하면서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에 대항해서 투쟁하면서 그리고 그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길을 열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탈하이머는 국가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 경제양식으로의 이행은 단계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이행은 한 번의 도약 즉 즉 자본주의 사적 소유(?)를 지양하는 혁명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탈하이머는 나아가 경제민주주의의 배아세포로서 노동자보호와 노동자권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노동자보호 입법은 그 자체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틀 내에서 착취를 제한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자본주의 착취의 지양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가 그어진다는 것이다. 베른슈타인, 슈미트 등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이게 사회적 통제와 사회주의의 한 걸음이라는 관념이 유포되었지만, 공동결정권도 기껏해야 공동체적 경제민주주의로의 발전의 배아세포고, 공동소유가 전제되지 않는 한 경제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공산주의 정통파로부터의 이와 같은 비판은 마이쓰너에서 보는 바처럼 현실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도 견지되었다. 물론 구서독 좌파의 관점으로부터도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론에 대해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바인첸은 나프탈리에 있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대해 처분권 제한을 넘어 언제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가 언급이 없다고 지적한다. 산업의 공동결정 요구에 있어서도 사적 소유의 지배하에, 소비협동조합 소유/노동조합 소유/국가 소유는 과대평가되었고, 처분권 제한은 독점적 소유에 한정되었으며, 부문 수준의 공동결정도 제한적으로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통부문과 관련해서도 나프탈리는 은행에 대해 구체적인 통제권 요구를 하지 않았고, 1931년 은행위기 이후에 비로소 은행감독청을 요구하였으며, 국가 경제정책 기관과 노동관계 및 교육제도의 민주화 요구는 주변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바인첸도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는 명시적으로 1920년대 중반의 힐퍼딩의 조직자본주의론을 토대로 하였고, 따라서 경제위기는 고려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나프탈리 자신은 발전된 공황론(?)을 갖고 있었지만, 1928년 슈테른베르크에 대한 비판에서 위기의 심화도, 자본주의의 붕괴도 부정하였고, 그에 반해 경제민주주의의 진보를 대치시켰다.

세계대공황이 발발하고서야 나프탈리는 대위기가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바인첸은 또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는 힐퍼딩의 조직자본주의론과 함께 국가와 국가의 지원에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하였지만, 정작 나프탈리에 있어 발전된 국가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국가의 실제적인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나프탈리가 말하는, 국가를 통한 기존 경제질서의 틀을 넘어가는 경제정책의 실현은 허구적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경제민주주의의 첫 번째 담지자 바이마르 국가뿐 아니라 두 번째 담지자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프탈리는 단지 주변적으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파편화에 대해, 물질적으로 규정된 파편화와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잠재적 파편화(보수화에 노출될 위험)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적 잠재적 파편화도 노동자계급 내의 사민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나프탈리는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파편화보다는 반란으로 나아가는 피착취 노동자계급으로서의 동질성이 우세할 것이라며, 다만 일정 지위를 달성한 노동조합과 당의 활동가들과, 소시민에서 충용된 노동자 계층, 그리고 출세지향의 기회주의 계층의 이데올로기적 파편화의 ‘잠재성’만 지적하였다.14

대안경제정책의 토대로서 경제민주주의

다른 한편 경제민주주의는 오늘날 사민당 밖의 대안경제정책의 주요한 토대로서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메모란둠 그룹은 독일의 대표적인 반신자유주의 정책연구 그룹이다. 이론적, 정치적 입장은 좌파 케인스주의고 사민당 좌파 경향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결합 속에서 1970년대 중반 출범하였다. 케인스의 장기침체 명제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위기론의 토대 위에서 최소합의로 공동의 작업을 수행하였고, 확장정책과 유효수요 창출, 사회보장 강화, 대외팽창정책으로부터 내수시장으로의 전환, 군수산업으로부터 평화산업으로의 전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공동결정, 이윤동기로부터 필요동기로의 전환, 핵심산업의 사회화 등을 단기 및 중장기 정책요구로 내걸고 활동하였다. 물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독일통일의 역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메모란둠 그룹에서도 사회화 요구가 퇴조해왔고, 상대적으로 독일과 유럽연합에서의 민주개혁 또는 구조개혁 요구가 강화되었다.

출범 이래 매년 ‘메모란둠’을 발간해 왔는데, 이는 독일 언론에서 독일정부의 위임으로 발간되는 5인의 전문가위원회의 경제백서에 대한 대항백서로서 평가받고 있다. 노동조합을 주요 대상으로 작업하고 또 노동조합 내에 지지기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지식인 계층에서도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메모란둠 그룹은 유럽연합 수준에서는 유로메모란둠 그룹의 핵심 부분으로서, 또 아탁 독일 지부의 중심으로서 활동하고 있고, ‘선거대안그룹(Wahlalternative)’으로서 독일 좌파당 건설과정의 한 당사자로서도 참여하였다.

정책요구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메모란둠의 정책에는 경제민주주의의 컨셉이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메모란둠의 한 당사자가 사민당 좌파 경향이고, 이들을 매개로 하여 한편에서 사민당의 전통적인 전략인 경제민주주의론과, 다른 한편에서 케인스주의 좌파이론이 결합된 만큼, 이는 자연스런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합의를 토대로 사민당 좌파와 국가독점자본주의 진영의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논쟁과 달리 이 연구그룹에서는 당연히 경제민주주의의 수용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경제민주주의는 반신자유주의 구조개혁정책의 일환으로서 수용되었을 뿐이다. 1990년대 이래 정작 사민당에서 퇴조해왔던 경제민주주의가 메모란둠 그룹을 통해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5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국가의 성격과 경제민주주의의 지위

경제민주주의는 사민주의의 실천을 통해 오래 전에 이미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길이 아니라는 게 판명된 상태다. 그것은 노자협조하의 자본주의 개혁의 길이었고, 그나마도 사민당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나프탈리의 경제민주주의는 사회화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략을 단지 자본주의 개혁의 길이라고 평가할 수만은 없다.

문제는 경제민주주의의 사회화 요소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이론적으로 어떻게 위치지우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나프탈리는 부르주아 국가론과 조직자본주의론의 관점에서 진화론적 방식으로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망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나프탈리의 오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메모란둠 그룹의 대안경제정책도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관점에서는 좌파 케인시언과 달리 구조개혁과 이행의 연관 속에서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요소로서 경제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개혁의 요소로서 경제민주주의, 양자의 이론적 관련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한편에서 경제민주주의론에 대한 탈하이머와 같은 공산주의적 비판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하다. 경제민주주의를 통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망상이고 기만이라는 비판이야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생존조건의 개선과 사회보장을 위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일체의 개혁이 자본주의의 토대를 바꾸는 게 아니라며 그 과제를 부정하고 개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좌편향적 관점도 또 다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혁명적 운동이 지배하던 정세와, 전후 제국주의 중심국들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퇴조하는 정세에 이행의 전략과 전술은 상이할 수밖에 없어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평가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독일혁명은 역사적으로 실패했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생산관리라든가 통일전선 또는 인민전선 같은 당시의 정세에서 제기된 쟁점들이 경제민주주의론과 마찬가지로 그 실패와 일정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에서, 전략논쟁에서의 좌편향의 문제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대안이 무망한 현재의 정세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일체의 개혁을 부정하는 좌편향의 오류는 보다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세기 전반기 혁명적 공세적 기조 하에서 경제민주주의는 개량주의적 요구였지만, 전후 또는 현실사회주의 붕괴 후 혁명의 퇴조기에는, 또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그 위기 하에서는 경제민주주의가 어쨌든 사회화의 요소라는 점에서 공세적 전술의 의의도 갖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경제민주주의와 사회화의 문제는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 개혁과 이행투쟁의 변증법 속에 일반적으로(?) 위치지울 수 있다. 따라서 이행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치와 국가를 둘러싼 투쟁에 대한 필자의 다음과 같은 관점은 경제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반독점 사회화 강령의 지위와 그 실현경로에 대해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국독자의 성립과 발전에 따라 이제 현대자본주의 하에서 국가독점은 자본주의 확대재생산의 유지를 위해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으며, 생산과 유통, 분배와 소비 등 전체 재생산과정의 주요한 부분이 국가독점을 통해 매개되는 바, 국가독점[공공부문과 사회화 부문]은 계급의 재생산과 계급투쟁의 주요한 장소이자 대상으로 전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독점을 둘러싼 투쟁, 즉 사회화를 통한 국가독점적 부문, 공공부문의 확장과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둘러싼 투쟁을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현대자본주의에서의 투쟁의 주요한 고리를 상실하는 것이다. 독점자본주의 국가의 권력 하에서 반독점 사회화정책을 전략적 과제로 제기하는 것은 이와 같은 국독자의 성숙을 토대로 하며, 나아가 국독자 내에서 국가독점의 상대적 자율성과 그에 따른 정책변종의 다양성으로 인해 경제정책을 진보적인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독점의 상대적 자율성과 다양한 변종에도 불구하고 국독자 하에서 국가의 권력은 독점자본가의 권력이며 국가독점은 독점이윤에 궁극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므로, 반독점 사회화는 이러한 국가권력의 분쇄와 새로운 유형의 국가로의 전화 속에서 비로소 국독자의 틀을 넘어갈 것이다.

따라서 국독자 하에서 반독점 사회화투쟁은 사회화와 공공부문의 확장과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한 투쟁 속에서 민주적인 구조개혁을 강제해 내고, 그러한 개혁투쟁이 국독자를 너머가는 투쟁으로 전화할 수 있도록, 그 투쟁을 위한 유리한 정치적 조건과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국독자 하에서 반독점 사회화정책의 제기를 부정하는 좌편향적 태도는 국독자의 본질 규정에 사로잡혀 국독자의 현실과 구조개혁투쟁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반면 유럽코뮤니즘 우파의 구조개혁론은 국독자 내에서의 변종을 둘러싼 투쟁, 국가독점의 다양한 정책을 둘러싼 투쟁과 국독자를 너머가는 투쟁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전자의 투쟁으로부터 후자의 투쟁으로의 전화의 단절성을 사고하지 못한 것이다.”16

경제민주주의와 사회화? 국유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 실패한 낡은 모델을 다시 가져오나?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논자들이 다수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좌파에서도 이런 비판이 다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런 문제제기는 마르크스의 미래사회의 구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국유화, 사회화 없이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국유화를 말하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는 소멸한다고 하는데 국유화라니? 이렇게 비판자들은 반론한다. 그러나 국가의 소멸이란 계급과, 계급지배기관으로서의 국가의 지양을 말하는 것이고, 공동체의 일반적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은 공산주의 하에서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특히 전사회적으로 재생산을 계획적으로 조정하는 기관은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급과 계급지배가 소멸한다면, 이걸 국가라고 부르든 생산자연합이라 부르든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공동체의 공동의 소유 즉 국유화와 전인민적 소유가 전제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는 건설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국유화 하에서 생산자들의 실질적 통제를 확보해 나가는 것, 후자 속에서 계급지배의 도구로서 국가가 공동체와 생산자연합의 공동의 업무를 관장하는 자율적인 기관으로 전화해가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한 것도 본질적으로는 바로 이런 전화를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실천하지 못했던 데 기인한다.

사회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구상은 단순한 미래사회의 구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발전하는 역사적 경향이다. 국유화는 따라서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 속에 피해갈 수 없는 경향이고, 마르크스주의의 국유화 요구는 이념적인 공문구가 아니라 역사적 필연에 근거한 현실적인 프로그램이다. 신자유주의 하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의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 국가가 국영화를 실행하는 게 오늘날의 현실 아닌가?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이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사회화의 관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사회화 요구 없이는 이 역사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개입할 수단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 좌파는 무슨 대안을 갖고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 나는 무책임하게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사회화를 비판이나 하는 논자들로부터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합당한 답변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도, 그것에 의해 세계적 시장통합이라는 어려운 조건이 부과된다하더라도,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한 국민국가의 권력장악과 국유화를 통해 나갈 수밖에 없다. 국유화의 이론적 포기는 사회주의로의 길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고,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이론적, 실천적으로 무장해제하는 거나 다름없다. 유감스럽게도 국민국가의 권력장악 전망을 상실한 공상적인 무정부적 좌파들이 국유화(형식적 사회화)를 매개로 실질적 사회화로 나가는 길을 부정하고 잃어버린 전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각주

1) Ulla Plener, “Wirtschaftsdemokratie in der Programmdiskussion der neuen Linken”, in UTOPIEkreativ, 2007. 1. 9.

2) 김성구 편, <사회화와 공공부문의 정치경제학>, 문화과학사, 2003에 수록된 하이너 헤젤러/루돌프 히켈, 하인쯔 비어바움/니콜라우스 쉬미트, 루돌프 유디트/위르겐 페터스의 글 참조

3) Betriebsverfassungsgesetz

4) Heiz-J. Bontrup, “Wirtschaftsdemokratie statt Shareholder-Kapitalismus”, in UTOPIEkreativ, 2006. 4. 11; Fritz Vilmar, “Wirtschaftsdemokratie - Zielbegriff einer alternativer Wirtschaftspolitik”, http://www.globallabour.info/de/2008/06/wirtschaftsdemokratie_zielbegr.html, Posted on June 4, 2008 9:32 AM; DGB, 위키피디아 독일판 참조

5) H. Meißner, hrsg., Geschichte der Politischen Ökonomie, 1985, 492ff.

6) F. Naphtali, “Die Verwirklichung der Wirtschaftsdemokratie”, H. W. Weinzen, Wirtschaftsdemokratie Heute?, 1980

7) R. Hilferding, "Probleme der Zeit", Die Gesellschaft, Erster Band, 1924/1968, S. 2, Meißner 495에서 재인용

8) 당 대회 문서, Meißner, 496에서 재인용

9) Meißner, 497ff

10) F. Naphtali, Konjunktur, Arbeiterklasse und sozialistische Wirtschaftspolitik, 1928, S. 3

11) 같은 책, S. 7, 이상 Meißner, 497-498에서 재인용

12) A. Thalheimer, “Über die sogenannte Wirtschaftsdemokratie”, H. W. Weinzen, Wirtschaftsdemokratie Heute?, 1980

13) 같은 책, 120ff.

14) H. W. Weinzen, “Wirtschaftsdemokratie heute?”, in H. W. Weinzen, Wirtschaftsdemokratie Heute?, 1980

15) 김성구 편, <사회화와 공공부문의 정치경제학>의 앞서 인용한 글들의 저자들도 다름 아닌 이 그룹에 속해있는 연구자들이다.

16) 김성구, “사회화와 구조개혁 그리고 이행의 쟁점에 대하여”, 김성구 편, <사회화와 이행의 경제전략>, 2000, 3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