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간의 탄생,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감성혁명과 예술진화의 역량

[새책]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갈무리, 2015)


두툼한 두 발로 서서 큰 공을 굴리는 곰이나, 불타는 원형 기구 속으로 거침없이 몸을 던지는 사자를 보고, 우리는 동물들이 예술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며 서커스 무대 위로 땅콩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줄 뿐이다. 야생에서 사냥을 하고 새끼를 낳아 기르던 동물들이, 인간의 명령에 따라 예상 밖의 행동을 취하고 진기한 움직임을 선보일 때 즐거운 찬사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서커스의 웃음은 ‘동물들은 여기까지다’라고 미리 한계를 긋는 우리의 상식이 입증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굳이 서커스 무대 바깥의 동물을 예술가로 이해하거나 자연은 언제나 예술가라고 선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경계를 넘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의 삶을 새로운 예술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갈무리, 2015)은 이러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제도화된 예술계에서 삶 속으로 예술의 시공간을 이전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묻는 책이다. 사실 예술의 호흡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헤겔 이후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너무 잦은 선고들이 있었다. 예술은 이미 어느 경계에 이르렀고, 더는 나아갈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자조들이었다. 하지만 예술은 종말이 도래했다는 아주 분명한 선고를 받는 와중에도 결코 죽지 않는 방법으로 그 종말의 순간을 지연시켜나갔다. 조정환은 여기에 주목하면서, 헤겔의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다양한 예술종말론의 맥락을 검토한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루어진 미학적 모색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의 종말이라는 사건 자체의 입증이 아니라, 삶미학과 다중예술의 지평을 여는 예술진화 또는 예술혁명의 시도들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20세기의 예술은 예술적 가능성 자체의 부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종말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하나의 몰락을 통해서 예술의 새로운 진화와 창조를 예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술을 진화와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견해와도 연결된다. 베르그손이 매순간 새로움을 산출하는 자연이야말로 예술보다 더 나은 예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면, 들뢰즈는 자신의 울음소리를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서로의 음조를 엮어 노래를 부르는 ‘세노포이에트 딘티로스트리’라는 새를 완벽한 예술가로 이해한다. 이렇게 자연과 동물을 예술가로 사유한다면, 인간 역시 언제나 예술가임을 주장하기는 훨씬 수월해진다. 요셉 보이스를 필두로 하여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라는 기치를 내건 아방가르드 운동이 그러했다. 하지만 후에 아방가르드가 자본이 지배하는 제도권으로 포섭되었듯이, 예술도 산업이나 노동으로 전이되어 버리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빚어졌다. 창조도 일종의 경제활동으로 인식되고, 노동자들도 돈으로 환산할만한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으면 성과를 인정받기 어려워졌다. 이 혼란의 정점에서 갑작스럽게 현 정부의 정체모를 ‘창조경제론’이 제시된 맥락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정환이 보기에, 삶 전체의 교환가치화와 자본가치화를 모토로 삼는 푸코의 ‘경제인간(homo economicus)’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운명을 선명하게 지시한다. 이제 ‘경제인간’은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추구하며 치열한 자본의 전장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이렇게 현상 분석을 완료한 뒤에, 여기에서 그만두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경제인간이 도리어 예술인간(homo artis)의 잠재력을 배태하고 있음을 주장하려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경제인간의 자기계발은 노동의 강도를 높이고, 생산을 확대한다는 의미에서의 양적 증강이 아니다. 더 심미적이고, 더 인지적인 방식으로 질적인 것, 즉 측정 불가능한 것의 개량을 모색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계발을 염두에 둔다. 이러한 경제인간의 두 번째 차원은 다음의 사례들과 같이 스스로 예술가임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의 발견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이 너나할 것 없이 집안일을 그만두고 유모차를 끌고 거리로 나온 2008년의 촛불시위나 세월호 참사 이후에 기획된 여러가지 예술적 퍼포먼스들이 바로 지은이가 긍정하고 있는, 예술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예술적 창조 행위의 사례들이다. 일상적 맥락으로부터의 일탈과 제도에 균열을 가져오는 저항의 행위들은 행위자 스스로의 창조 역량을 깨닫게 하고, 이를 발휘하게 함으로써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창작할 때와 다름없는 사건들을 촉발한다. 이밖에도 도시를 점거하고 시위나 농성과 같은 활동을 통해 도시의 구조를 재구축하며 ‘광장’이나 ‘관청’ 등으로 고정되어 있던 장소의 의미를 무대나 발언대로 느닷없이 변화시키는 것도 저자가 주목하는 예술 작품의 한 예시에 해당한다. 지난 11월 성소수자들이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 시청을 점거하고 그 공간을 무대 삼아 춤과 노래로 채운 문화제를 열었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얼마든지 창조적인 예술작품에 속할 수 있다.

분명 우리는 자본에 잠식된 경제인간이라는 자각에 이르는 순간에, 이 서커스의 무대에서 절대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쇼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땅콩과 과자부스러기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 네그리, 아감벤 등의 이론가들은 끊임없이 예술의 역량을 역설해오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기를 권고해왔다. 조정환은 오랜 시간 이들의 생각을 공부해왔고, 이에 기대어 <예술인간의 탄생>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결코 중단하지 않는 순간에 마주하게 될 새로운 극복의 가능성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조정환은 후기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만화인간’이었고, 자신만의 예술의지로 사유하고 행동했지만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 인물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현하며, 그에게 이 책을 바치고 있다. 곡진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읽는 사람의 마음도 움직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보통은 힘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불가능성을 거듭 확인하는데 많은 힘과 노력을 쏟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데 힘을 기울인 만큼이나 ‘그럴 수도 있을 거야.’라고 웅얼거리는 일에 남은 기운을 써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정도의 의미와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