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스타일 위해 사라진 사람들...“할머니, 안녕하세요”

[길 위의 노점상](1) “잊힐까 두려워” 끝나지 않은 싸움

강남대로의 노점상들이 자취를 감췄다. 벌써 두 달째다. 노점 불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돌화분과 원형의자가 촘촘하게 들어찼다. 노점상과 강남구청이 뒤엉켜 소란을 벌였던 모습도 옛 일처럼 까마득하다.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강남대로의 연말연시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누가 봐도 강남구청의 완벽한 승리였다.

전쟁 같은 싸움을 벌이다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돌화분과 원형의자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노점 상인들은 과연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걸까. 강남대로 노점상 중 최고령이었던 윤춘애(여, 80)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뵙고 싶어서요. 그런데 내가 수술을 해서 걸을 수가 없는데 어쩌지? 제가 댁으로 찾아뵈면 안 될까요? 사는 꼴이 별론데...그러면 와요.

강남역에서 버스를 타고 윤춘애 씨가 사는 성남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윤 씨가 새벽녘, 막차로 퇴근하던 길이다. 집 앞에 도착하니 윤 씨가 마중 나와 있다. 지팡이를 짚은 채였다. 다리 연골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철거 용역반과 충돌했고, 수술 자리가 덧났다. 거기다가 고관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참고 참다가 12월 중순 병원을 찾았다. 윤 씨가 병원에 입원하던 날, 강남대로에 용역반이 들이닥쳤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윤 씨를 비롯한 노점 상인들은 강남대로로 돌아가지 못했다.

[출처: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윤춘애 씨 집에 모인 반가운 얼굴들, “불면증과 우울증, 화병 때문에...”

윤 씨는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방 두 칸짜리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었다. 멀리서 왔는데, 이런 부끄러운 집에 들여서 미안하네. 윤 씨는 살림살이를 남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지 계속 사과를 했다. 그러다가도 “이왕 기자가 온 거, 그냥 집안 사진까지 다 찍어가요. 이게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사람의 집인지”라며 얼굴을 붉혔다.

지자체는 언제나 노점상들이 불법적인 상행위로 엄청난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거에는 도시빈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중산층이 아니냐는 논리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상승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노점과 같은 도시빈민들은 언제나 빈곤의 굴레에 가둬둔다. 생존권 투쟁은 본질은 사라지고,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지난해 한 언론사는 아예 강남대로 노점상들이 한 달에 얼마나 버는지 꼼꼼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일부 지자체는 노점상들의 재산까지 공개토록 하는 조례안을 준비 중이다. 윤 씨를 비롯한 노점상들은 조악한 살림살이까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일상이 발가벗겨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윤 씨를 따라 집안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 모여 있다. 강남대로 쥐포 노점상 김옥이(가명, 여, 58) 씨와 떡볶이 노점상 최옥희(가명, 여, 65) 씨다. 양말 노점상 이영순(여, 64) 씨도 뒤늦게 도착했다. 기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였다고 했다. 일터를 빼앗긴 그들은 종종 윤춘애 씨의 집에 모여 한바탕 한풀이를 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지내시냐는 안부 인사에, 짙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30년 넘게 남편과 노점을 운영해 왔던 최옥희 씨는 최근 남편의 이상증세에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우리 아저씨가 요새 가위에 자주 눌려요. 어제 저녁에도 잠을 자면서 막 소리를 지르더라고. 깨우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때리려고 달려들어. 꿈에서 깨어나질 못하는 거야. 어찌나 놀랐는지. 겨우 정신 차려서 물어보면 용역들이 때리는 꿈을 자꾸 꾼대.”

김옥이 씨 역시 매일 밤 갑자기 분노가 치미는 탓에 뜬 눈으로 긴 밤을 견딘다. 윤춘애 씨도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타들어가는 가슴을 부여잡곤 한다. “반송장으로 살았지 뭐.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으니. 밤마다 용역들이 우리를 패고, 000(구청직원)이 그걸 즐기면서 보고 있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불면증 때문에 죽겠어. 화병이 나서 집에서 옷을 못 입고 있겠어.”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삶이야”

석 달째 일손을 놓은 탓에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가슴을 짓누른다. 윤 씨는 벌써 석 달째 사글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앞이 깜깜해. 내가 전쟁도 겪어봤잖아. 서울 바닥에 집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 시체도 엄청 봤어. 마치 그때 같은 기분이야. 나한테는 강남거리가 지금 딱 그래. 나이 여든에, 몸도 엉망인데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잖아. 먹고 살 길이 없어.”

  노점상 윤춘애 씨

최옥희 씨는 혼기를 훌쩍 넘긴 딸의 결혼까지 기약 없이 미뤄야 했다. “딸이 교제하는 남자친구가 있어. 그 친구가 인사하러 오겠대. 근데 내가 지금 그것도 막고 있어. 식을 올려줄 상황이 안 되니까. 떡볶이 장사하면 돈 많이 번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야. 단속 나오면 리어카랑 그릇을 다 망가뜨리고, 우리는 거기에 또 돈을 투자해야 하고.” 딸 이야기를 하는 최 씨의 목소리가 얕게 떨렸다.

김옥이 씨도 상황은 비슷하다. 서른 넘은 아들 두 명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상태다. 청년 실업난도 죽을 맛인데, 노점 장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당장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가 막막하다. 설날이 다가올수록 생계를 빼앗긴 사람들의 소외감은 늘어만 간다. “명절은 꿈도 못 꿔. 떡국 한 그릇 못 올릴 것 같아.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져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어.”

노점 일을 정리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를 선뜻 받아주는 일자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쉰 후반인 김옥이 씨는 헛웃음을 짓는다. “전단지 보고 찾아가면, 죄다 조건이 45세 이하래.”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몇 십 년 동안 줄기차게 떡볶이를 만들고, 쥐포를 튀기고, 붕어빵을 구웠던 사람들이었다. 할 줄 아는 것도 노점 장사뿐이었다.

이영순 씨도 그동안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간신히 고깃집에 취직을 했지만 하루 만에 쫓겨나다시피 일을 그만뒀다.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직업소개소에도 등록하고 아줌마 구한다는 데도 찾아다녔어. 그러다 고깃집에 들어가서 불판 갈고, 닦고 그런 일을 했는데 하루 만에 나왔어. (사장이) 일이 손에 익지가 않는다며 그냥 집에 가래.” 이영순 씨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러다가 한 푼이라도 벌어야겠다며, 오늘 나온 일당직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강남 노점상 투쟁, 과연 끝난 싸움일까

지난해 12월 12일, 강남구청은 강남대로 노점상들이 농성을 이어가던 컨테이너 박스를 압수했다. 규격마차와 먹거리 마차 등이 모조리 철거된 후였다. 마지막 보루였던 농성장마저 사라지면서, 노점상들의 흔적은 강남대로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는 돌화분 52개와 원형벤치 36개가 멀뚱히 들어앉았다. 강남구청은 강남대로에 방송차량을 주차해 놓고 노점을 이용하지 말자는 선무방송을 주야장천 틀어댔다. 용역반은 강남대로 곳곳에 상주했다.

노점상들은 너무나도 변해버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윤춘애 씨는 퇴원 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택시를 잡아탔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강남대로로 향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돌화분을 보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꼴도 보기 싫었어. 분풀이 할 데도 없고, 그냥 빨리 내 다리만 낫기를 바랐어. 용역들한테 ‘나 내일부터 장사 나올 거다’라고 선전포고 했지.”

[출처: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김옥이 씨는 강남대로를 차지한 돌화분이 마치 자신들의 ‘무덤’으로 보인다고 했다. “무덤 같아. 그냥 우리가 죽은 자리에 비석을 세워놓은 것 같아.” 그래도 노점상들은 그 섬뜩한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한다. 윤 씨는 “우리도 벗어나고 싶어. 근데 갈 데가 없어. 우리가 오죽하면 그 무덤에 가려고 하겠어. 죽어도 거기서 죽을 거야.”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명절 이후 윤 씨가 혼자 거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동안 같이 일 해왔던 노점상들이 모여 강남대로에 보따리를 풀 예정이라 했다. “두고 봐. 며칠 있다가 정말 큰일 날 거니까. 그 때도 꼭 취재 와야 해.”

거친 싸움에도 노점상들이 투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생존권’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노점 철거 반대 투쟁을 하다 구속된 강남대로 노점상 송 모 씨의 석방을 위해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강남대로에 계란빵 노점을 하던 송 모 씨는 지난해 9월, 공무집행방해와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등으로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구속수감 됐다. “송 씨 얘기는 기사에 꼭 써줘. 그 사람 너무 억울하게 감옥에 갔어. 강남구청이 사람들 겁주려고 본보기로 감옥에 넣은 거야.”

인터뷰를 준비할 때만 해도 강남 노점상 투쟁은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한 사정 탓에 투쟁의 말미를 기록해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아, 사건의 마침표를 찍는 기사를 써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싸움이기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마침표를 찍는다고 종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이들이 다시 강남대로에서 생존권 쟁취를 외치는 날이 오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장기투쟁에 따라붙는 얽히고설킨 문제를 푸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지금도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강남대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시로 몸을 다치고 구속까지 감행해야 하는 거리에서의 싸움이 두렵지는 않은지 묻자 윤 씨는 목소리에 힘을 준다. “우리같이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그러면서 신연희 강남 구청장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말을 이었다. “신연희 구청장한테 꼭 이야기하고 싶어. 합법적으로 세금도 내고, 정말 깨끗하게 장사할 테니까 우리를 좀 배려해 달라고. 우리도 질서 있게 장사하면서 강남대로를 문화의 거리로 만들고 싶다고.”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최옥희 씨가 조심스레 고마움을 전한다. “잊히는 게 너무 무서웠는데, 잊히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워.” 얼른 들어가시라는 인사를 여러 번 건넸지만 좀체 발을 떼지 못한다. 기자가 등을 돌릴 때 까지 내내 골목어귀에 버티고 서서 배웅을 한다. 한 평의 길거리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길 위에 있을 때가 가장 당당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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