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헌장이 파행을 맞기까지, 서울시는 무엇을 했나?

서울시민 인권헌장 평가 심포지엄 열려...‘서울시의 무책임’ 성토

지난해 말 스스로 참여한 시민의 힘으로 직접 만들었지만 서울시의 선포 거부로 파행을 맞이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 서울시는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가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에 반대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만장일치 없이는 인권헌장 선포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이 때문에 성소수자 인권단체가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인권헌장은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 소속 전문위원과 시민위원들이 서울시의 외면 속에 직접 선포해야만 했다.

물론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러한 파행과정에 대해 사과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나, 인권단체와 서울시 간에 생긴 불신과 갈등의 쟁점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서울시 인권위원회,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 등은 25일 서울대 법대 백주년기념관에서 평가 심포지엄을 열고,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서울시가 보인 ‘인권행정’의 문제점 등에 대해 총체적으로 점검했다.
 
  서울시 인권위원회,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 등은 25일 서울대 법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무엇을 남겼나?' 심포지엄을 열었다.

책임자인 서울시는 도망가고, 시민 간 갈등 탓으로 돌리기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무엇보다 박원순 시장의 무책임한 태도, 특히 인권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을 ‘만장일치 합의’라는 행정적인 절차로 대체한 문제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왔다.

우선 인권정책연구소 김형완 소장은 박 시장이 성소수자 단체의 시청 로비 점거 후반부인 지난해 12월 10일 내놓은 사과문의 내용을 거론하며, “박 시장의 상황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박 시장은 당시 사과문에서 “이번 일로 인해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제가 살아 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은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우리 사회에서 삶이 송두리째 모욕당하고 부정당하는 일상을 살아온 자가 과연 누군가.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이런 고백은 적어도 성소수자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언사”라고 꼬집었다.

또한 박 시장은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시민위원들이 보여주신 헌신적인 과정을 잘 알고 있지만, 엄혹한 현실의 갈등 앞에서 더 많은 시간과 더 깊은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라며, ‘합의 우선’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이에 대해서도 김 소장은 “만약 일부라도, 아니 대다수 사람들이 ‘고문’에 대해 찬성한다고, 이를 시민들 간에 만장일치 합의가 이뤄져야만 정치인이 고문에 반대하고, 제도적 제재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가능하게 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김 소장은 “헌장이 사회적 협약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협약은 시민의 인권보장을 최대화하려는 갑(서울시민)과 그 이행책무를 최대한 축소.회피하려는 을(서울시) 사이의 갈등이 핵심적 쟁점이었다”며 “그런데 한 쪽 당사자인 서울시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시민 간 ‘합의 미수’로 인해 헌장 제정이 좌초됐다는 논리 왜곡이 나타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시장이 “(그럼에도) 모든 차별행위에 맞서 ‘차별 없는 서울’을 만들겠다는 ‘처음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최근 (성소수자를 위한 비영리공익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이 법무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이어 서울시에 의해 잇따라 법인 등록신청 자체가 거부되었다”며 “신뢰도 근거가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으로 참여했던 이하나 씨도 “수개월에 걸쳐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6차례의 장기간 회의에 참여해 보편적 인권의 원칙을 지키는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것은 충분히 경이로운 것이었다”며 “이러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빛을 바래게 한 것은 단연 서울시의 행보였다”고 지적했다.

이 씨는 “‘시민이 시장’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스스로 마련한 시민 참여의 판마저 시장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어김없이 뒤집어엎는 마당에 어떤 시민이 박원순 시장을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꼬집었다.

헌장에 ‘자유권’, ‘사회적 약자’ 부분은 빠져...문제 제기돼

한편, 인권헌장은 서울시의 거부로 공식 선포되지는 못했지만, 표결을 통해 절대 다수의 시민위원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제정과정에 참여했던 다수의 시민위원들이 직접 선포했기에 헌장의 효력은 살아있다는 것이 서울시 인권위원회 등의 입장이다.

이렇게 시민들이 직접 선포한 헌장은 총 6장 50조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1장 일반원칙 △2장 시민이 참여하고 소통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서울 △3장 안전한 서울, 건강한 서울, 살기 좋은 서울 △4장 쾌적한 환경과 문화를 누리는 서울 △5장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서울 △6장 헌장을 실천하는 서울 등이다.

헌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발제한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는 헌장이 자유권에 대한 부분이 상당 부분 빠져 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장도 최종 논의 과정에서 빠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선 자유권 부분이 상당히 빠진 것과 관련해 홍 교수는 “처음부터 이 헌장이 서울시에 대해 서울시민이 권리를 주장하고 이행책임을 부과하는 것을 지향하다보니, 지자체 수준에서 할 수 없는 내용은 굳이 포함시키지 않았다”며 “다만, 자유권에 해당하는 개인정보권은 서울시에서 많은 개인정보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넣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도 집회 시위와 관련해 서울시가 일부 관여하고 있기에 포함시켰다”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약자’ 관련 장이 빠진 것에 대해서도 “다른 조문들을 통해서도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관한 내용이 얼마든지 담길 수 있다는 의견이 다수를 점했다”며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소수자에 대한 호명을 포기하는 대신, 어떤 유형의 소수자건 상관없이 경험할 수 있는 권리 목록을 아주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방향을 택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토론자들은 인권헌장에서 ‘자유권’과 ‘사회적 약자’ 부분을 누락한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광주대학교 은우근 교수는 “본인도 광주인권헌장 논의에 참여할 당시 자유권과 평화권 등 지자체 수준에서 이행할 권한이 없는 내용은 가급적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며 “지자체와 주민이 국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장을 요구할 필수적 인권 목록을 헌장 안에 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주장했다.

은 교수는 “예컨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주민들이 인권헌장을 제정하면서 일본 국가에 대해 평화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 아니겠나”라며 “군사적으로 요새도시이자 휴전선과 가까워 전쟁위협에 노출될 우려가 높은 서울의 시민들이 군사 기지와 무기 배치에 대해 일정한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인권연구소 ‘창’ 류은숙 활동가는 ‘사회적 약자’ 장의 삭제에 대해 “일반적인 국제인권기준들은 보편적 권리를 열거한 후,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권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과 집단을 특정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며 “권리취약자가 처한 상황을 강조함으로써 보편적 권리들은 구체성을 갖출 수 있다”라고 반론했다.

  심포지엄을 마치고 참가자들은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담긴 리플렛을 들고 단체사진을 찍으며, 앞으로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실효적 이행을 위한 실천을 지속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덧붙이는 말

하금철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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