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활동가들 잘 지내고 있나요

20여 년 헌신한 활동가들, 심각한 재정난에 자괴감 겹쳐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은 박은지 노동당 전 부대표가 안타깝게 생을 내려놓은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은 많은 진보, 사회운동 활동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활동가들이 처한 현실은 그때보다 악화되는 상황이다.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 뒤엔 한국 진보정치,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저임금, 활동 전망의 부재, 육아의 어려움 등이 삶의 우울함이 표상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12년을 관통했던 진보대통합의 실패와 진보정치 전반의 몰락 과정, 박근혜 정부의 강경 드라이브는 진보정당 활동가를 넘어 한국사회 노동.사회.변혁운동 활동가 모두에게 힘든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참세상>은 박은지 부대표 추모 1주기에 맞춰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 활동가들의 어려움을 들어봤다. 상대적으로 호시절을 보내기도 했던 노동당 활동가들에게 닥친 어려움은 한국사회 노동운동, 사회운동, 변혁운동에서 헌신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일반적 모습이면서 대중정치인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의 특수한 모습이기도 했다.


노동당 중앙당 부대표 등을 지낸 활동가 A(40대, 여성)는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 이후 여성활동가들이 과도한 자신감과 씩씩함을 보이면 당의 상황과 겹쳐져 걱정이 많이 든다. 그전에는 그런 자신감이 부러워 보였는데 그 이후에는 내부의 자괴감을 자신감으로 뭉개고 표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많이 표출할수록 자괴감도 큰 것 같았다.

자존감 높은 활동가들에게 자괴감은 어디서 올까. A에 따르면 “어느 순간 가난한 진보정당 활동이 비루함을 낳게 되고 그 비루함을 느끼는 상황”이 오면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일단 경제적으로 삶이 너무 불안해요. 당이 잘되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당이 죽 쑤고 있다 보니 그 활동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데서 열패감을 느껴요. 의미 없는 활동이 돼 버리는 거죠. 누가 뭐라고 해도 화부터 나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진보정당 활동가들은 여기를 그만두면 다른 건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문제는 이렇게 삶이 비루한데도 그 비루함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다는 거죠.” 그런 비루함을 지속적으로 느끼다 보면 어디선가 터질 수 있다는 것이다.

A 역시 가끔 자신이 대단히 비루한 상황이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럴 때면 “미치고 돌아버릴 것 같아 진보정당 활동도 다 때려 치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그는 “이렇게 비루함의 무게를 참아야 하나. 참을 가치가 없는 상황이라고 느껴질 때는 되든 안 되든 그만두고 싶다.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이 최선의 가치가 있는 일이기를 바라는데 그것도 아니면. 내 인생이 뭔가 싶다”고 말했다.

결혼 이후 육아 문제까지 더해지면 어려움은 절정에 이른다. 경제 사정이 안 좋은 경우 어려움은 더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당은 이를 지지해 줄 역량이 없었다. 특히 사안이 터지면 어디든 밤낮 없이 달려가야 하고 끊임없이 대중을 만나야 하는 진보 활동가에게 육아는 더욱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민주노동당 시절 시의원을 지냈고 현재 노동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 B(50대, 여성)는 “정치활동이란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현안에 개입해야 하는데, 육아를 더 담당해야하는 여성 활동가는 활동성 위축이 많다”고 토로했다. “저녁에 일찍 들어가야 하거나 모임에 매번 참석이 어렵거나 돌발적인 상황에 개입하기 어려운 점은 정치 영역에서 활동력의 위축으로 드러나요. 정치적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개입해 영향력과 활동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점에서 치명적인 거죠”

진보정치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가 중요한 지점인데 육아를 맡다보면 큰 역할이나 더 큰 일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조건의 한계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진보정치 활동가에게 육아는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서울 지역에서 지역당협을 꾸려가는 활동가 C(40대, 남성)는 재정 문제에 겹쳐진 육아 문제로 당 활동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사는 게 거지같고 현실이 끔찍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하교하고 나서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상황인데다 재정난이 덮쳤다. “진보정치가 잘될 때는 그나마 중앙당 상근을 하면 100만 원 대 중후반으로 임금을 받았어요. 그 정도면 흑자도 적자도 아니었죠. 지금은 진보정치가 잘 안 되면서 중앙당 상근자 정도를 제외하면 활동비 나올 구석이 전혀 없어요”

진보정당이 궤멸 상황에 처하면서 노동당 중앙당 월급은 100만 원대 초반으로 줄어들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교부금이 없어서 활동비 조달이 더 어려워졌다. 당 활동을 그만 두고 생계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었다. 점점 돈을 버는데 신경을 쓰다 보니 지역 당협은 짬을 내서 겨우 하는 수준이 되고 있다. 전업은 불가능하다.

돈이 없기 때문에 육아는 전적으로 활동가 본인이 맡아야 한다. 부부가 함께 생계를 맡는데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 등을 보낼 돈이 없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분담해야 한다. “진보정치 활동은 저녁 늦게나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데 애를 보다 보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회의하다가도 애를 찾으러 퇴근해야 해요. 어린이집 다닐 때는 5시에 찾아도 됐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니까 1시에 끝나는 거예요. 그럼 애가 갈 데가 없어서 집에 혼자 있는데 너무 무서워 해요. 그래서 집에 같이 있다 보면 활동력이 60% 정도로 떨어져요. 활동할 시간이 정말 부족해요.”

기본 생계도 힘들어지자 활동가로서 인간으로서 존엄이 무너지고 아이의 존엄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요즘은 그냥 버티고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요. 신념이 있고 없고의 문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버티는 사람들은 버틸만 하니까 버티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살면서 막판에 안 몰려 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먹고살려고 활동을 그만두는 사람 중에 신념이 모자라서 그만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활동가가 줄어들면 당의 활동이 줄어들고 당은 더욱 위축된다. 악순환이다. C는 “중앙당은 아이가 없거나 비혼자인 상근자가 대부분 일 것”이라며 “그나마 자녀가 없는 활동가들 중심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는 게 최선일까? D에 따르면 그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노동당 경기도당에서 당직 등을 맡아 왔던 활동가 D(50대, 여성)는 “기혼은 육아와 돌봄 노동 때문에 이중적 차별을 겪는데다,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전면에 자주 등장해야 하는데 늘 보조 활동에 익숙해 있다. 하지만 비혼도 성차별 문제로 정치판에 여성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한다.

D는 최근 당직을 떠나 생계에 전념하면서 전망의 문제를 겪고 있다. 사회운동 단체나 노조 등에서 그만큼 활동을 했으면 경제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겠지만, 진보정치 전반이 어려워지면서 D의 활동은 어디서도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갈 곳도 없고 전망도 안 보였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 위해선 적어도 3~4년 이상 지역 활동에 몰빵해야 하는 데 비전이 안 보이니 젊은 활동가들은 그렇게 몇 년씩 투자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통상 일하는 여성의 경력 단절은 육아 등으로 일을 중단해서 생기는데, D는 2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활동했지만 사실상 경력 단절 상태를 맞고 있다. D는 급여 문제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 보다 못한 조직 내 위치나 미미한 사회적 영향력에서 오는 자괴감이 더 컸다.

“진보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살았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인데도 정당 활동이란 게 특수해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아요.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엔 진보정당과 진보진영 전반이 국민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셈이 됐죠. 선거 결과로 인해 ‘너희들은 이 사회를 이끌어 갈 믿을 만한 집단이 아니라 딱 그 정도’라고 규정된 거죠. 20년 이상 활동한 입장에서 1~2% 지지를 받으려고 이랬나 싶은 생각이 들죠”

능력 있는 진보정치 활동가들이 생계문제로 당을 떠나는 상황에서 재정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이후 진보정치운동 전반의 발전을 짜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됐다. D는 “개인적 희생만 강요하면서 가기는 어려운 시대”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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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스다마토

    밭에 나가 공장에 나가 일하기 싫어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빛나는 명함이 진보정치활동가 아닌가요? 제 밥벌이도 못하면서 진보정치한다고 도와달라고 구걸하는 방법에 대해 이젠 진지하게 돌아봐야지요. 어머니 아버지들은 밭에 나가 일하시면서도 아이들 똑부러지게 잘 가르치고 목소리도 똑부러지게 냈습니다. 밥벌이하는 노동은 하면서 진보정치하셔야지요.

  • 조합원

    비루함을 감추고 살아간다는 게 안타깝네요. 감추어야 한다는 말이..

  • 조합원

    커스다마토님/ 현장 노동자도 필요하지만, 상근 활동가도 필요한 것 같고요. 상근 직원들이 생계가 어려운데, 현장에 가서 노동을 하라는 충고는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고요. 현장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상근자들도 생계걱정없이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고.

    돈이 없는 상황에서 현장에 가서 노동을 하라는 말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돈이 없는 건 문제인 듯 하고,

    저 같음 상근활동 포기하고 돈을 벌고 싶네요.

    그렇지만 당장 현장 노동자들과 다르게 기술이나 경험, 이런 게 없어서 그런 진로도 어쩌면 더 제한적일 수 있을 듯 하고요.

  • 노조원

    상근의 장단점은 있겠지만.. 생활이 않된다면야

    용기를 내셔서 현대판 인생막장 '마트'에 취직하세요.

    장사하셨었다고 이력서 내놓으면 연락옵니다.

  • 노예

    현노동당 상층지도부와 평당원은 현재와 같이 투쟁하지 않고 애매한 강령(적녹보라, 공화주의, 사민당노선, 인민전선 등)으로 일괄하고 싸우는 현장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상층간부를 통제하고 그들을 의회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감시해야 하고 일상적 논쟁과 토론해서 아니다면 일찍 떠나도록 논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상층간부는 박은지동지처럼 반노동 억압을 침묵으로 일괄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