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와 서구 제국주의의 현재, 어떻게 볼 것인가?

[좌담회] 제국주의, 좌파의 몰락과 극단주의의 부상

[기자 말] 지난해 6월 이라크 제2 도시 모술을 함락시키며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아프가니스탄, 잇따른 이라크 침공으로 반미 정권을 갈아엎은 미국은 오히려 더 잔혹한 적을 만나게 된 셈이다. 짧게는 지난 14년 간, 길게는 수백 년 간 지속된 서구 제국주의 피의 악순환 속에서 잉태된 IS. 서구 제국주의의 도플갱어라고 할 만한 IS에 이제 서구는 다시 대규모 전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IS와 서구 제국주의의 현재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까? <참세상>은 IS와 이들을 둘러싼 여건을 살펴보고 현재 중동의 질서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중동의 역사와 문화, 평화운동과 국제정세를 연구해온 활동가, 연구자들을 모시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IS와 서구 제국주의 현재. 이 논의를 정리해 독자여러분께 전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장시간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참가자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출처: 김용욱 기자(이하 같음)]

* 일시 : 2015년 3월 4일(수) 오후 4시 / 장소 : 참세상 회의실
* 사회 및 정리 : 정은희 참세상 국제부 기자
* 참여자 : 서의윤(평화도서관 나무), 원영수(국제포럼), 최재훈(경계를 넘어)

<참세상>에도 최재훈 씨가 IS에 대해 소개했고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졌지만 논의 진행을 위해 우선 IS의 발전 과정을 간략하게 짚고 시작하면 좋겠다.

최재훈(이하 최) : 사실 IS가 생겨난 이념, 역사적 배경에 대해 깊이 들어가자면 18세기 와하비즘의 탄생, 19세기 살라피즘, 20세기 초반 무슬림형제단의 창설과 더불어 본격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이슬람주의의 태동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먼 얘기고 또 IS의 역사와 정확하게 겹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좁은 의미에서 말하겠다. 흔히 알려졌듯 IS의 전신은 ‘유일신과 성전’, 자마트 알타우히드 왈지하드(al-Tawhid wa-al-Jihad)다. 이 점에 대해선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우선 알려진 흐름을 정리하고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사실 ‘유일신과 성전’은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2004년 고 김선일 씨를 납치해 참수한 조직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조직의 창설자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Abu Mus'ab al-Zarqawi)란 인물인데 요르단 출신의 이슬람주의자다. 이러한 사실이 상징하듯 최근 IS가 자국 조종사를 화형한 일로 인해 상당한 국가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대체로 요르단 내에서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만만찮은 지지를 얻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신과 성전’은 지역 내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1999년에 창설됐다는데 그 후로도 특별히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고, 2001년 9.11 테러 때도 한국뿐 아니라 서구 언론들 사이에서도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역 정세의 주요 변수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라크를 침공하고 점령하면서부터다.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이라크 정부와 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 뒤 하반기부터 과거 후세인 정권의 집권 바트당 세력과 수니파 민병대가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유일신과 성전’이 이라크에서 무장 저항 투쟁 대열에 합류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초기에는 시아파 성직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이끌던 마흐디 민병대에 비해 세력과 영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들은 시아파 주민들이나 외국인, 미군과 그 연합군을 대상으로 자살폭탄 테러와 납치 등의 테러 전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4년에 조직 명칭을 ‘이라크 알 카에다’로 바꿨다가 2006년 초에 주변의 소규모 조직들을 끌어들이면서 ‘무자히딘 슈라위원회(Mujahidin Shura Council)’로, 다시 그 해 하반기에 ‘이라크 이슬람국가(ISI)'로 계속 바꾼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직의 운영과 세력 확장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던 듯하다. 흔히 보면 장사가 잘 안 되는 가게들이 간판을 자주 바꾸지 않나. 게다가 2006년 6월엔 조직의 창설자였던 자르카위가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거기에다 2006년과 2007년 이라크에서 시아파와 수니파 간에 벌어진 ‘피의 내전’ 과정에서 조직은 거의 괴멸 직전의 수준까지 내몰렸다. 스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시인할 정도로 지도부 역량의 80% 가량이 붕괴됐고, 미군이 수니파 저항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수니파 주민들로 구성된 이른바 ‘이라크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친미 성향의 조직을 양성하면서 수니파 내에서도 고립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획기적인 반전의 계기를 맞게 된 건 2011년 3월부터 이웃 시리아에서 시작된 내전이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다양한 성향의 반정부세력들로 구성된 자유시리아군이나 알 누스라 전선 같은 이슬람주의자들과 뒤섞여 아사드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아사드 정부의 축출을 바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터키, 요르단 등의 친미정권들과 지역의 부호들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아 급격히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는 다들 알다시피 알카에다의 지도력조차 거부할 정도로 막강한 무장력과 자금력을 갖춘 조직으로 거듭났고 이제는 이라크 북서부에서 시리아 동부 거의 전체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토를 장악한 ‘국가인 듯, 국가 아닌, 국가 같은’ 조직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키운 상태다.

서두에서 오늘날의 IS가 ‘유일신과 성전’ 조직에서부터 그 뿌리가 이어져 내려온다는 일반적인 시각에 대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을 좀 더 짚어 달라.

  최재훈(경계를넘어)

: 현재 IS의 지도자이자,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이슬람국가의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가 조직을 이어받은 건 2010년 4월에 조직의 양대 산맥이었던 아부 오마르 알 바그다디(Ab Omar al-Baghdadi)와 아부 아유브 알 마스리(Abu Ayyub al-Masri)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바그다디가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이후에 재정비한 조직의 체계나 구성, 운영 방식을 보면 과거 ‘유일신과 성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밀했다. 뚜렷한 전략과 전술적 목표 없이 마구잡이로 경쟁조직들에 대한 도발과 민간인 테러를 일삼던 ‘유일신과 성전’과는 달리, 초기에는 바그다디 자신처럼 과거 미군에 의해 수감됐던 베테랑 이슬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의 기틀을 세우는 토대 구축 단계, 모술 점령을 계기로 과거 후세인 정권의 주축이었던 바트당원들과 정부군 장교들까지 끌어들이는 확장 단계,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장기적인 통치 체계를 마련하는 안정화 단계까지 미리 계획된 수순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IS 내에서는 군사, 이념, 선전, 자금 모집과 운용, 외국인 대원 충원과 관리 등의 역할이 아주 구체적으로 세분화돼 집행되고 있고,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개종한 과거의 공무원들을 활용한 가격 통제와 배급, 세금 징수, 병원과 학교 운영 같은 사회 기능이 어느 정도 작동하면서 일정정도의 통치 체제가 형성되어 가는 상황이라고 전해진다.

이를 종합해 봤을 때, IS가 태동하게 된 뿌리를 되짚어 가다보면 ‘유일신과 성전’에까지 가닿는 건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IS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탈바꿈했다는 걸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IS 발전 경로와 함께 음모론도 확인하고 넘어가면 좋겠다. IS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초반에 이를테면 IS가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 작품이라는 음모론이 돌았다. 논할 여지는 없는가?

서의윤(이하 서) : 정세 분석에 음모론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정확한 근거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어떤 흐름이 음모론을 낳았는지를 확인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의 감성과 규범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IS가 2010년쯤 갑자기 등장했을 때, 아랍 세계에서의 담론은 사실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종교를 내세워 극단적으로 나머지 전부를 배제하고 국가를 세우는 방식은 이 지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지역 사람들이 IS를 외부의 개입으로 등장한, 혹은 이식된 어떤 변종스러운 일탈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정부의 계획안 중 중동 지역을 분열시켜서 새 지도를 그리는 계획이 나온 적은 있다. 쿠드르, 수니, 시아 등 안정되지 않은 전국가단계의 분파별로 나누려는 계획이었는데, 그렇다고 미국이 계획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음모론이 맞았다는 것이 아니라, 외부가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해결책을 이식하려는 접근법 자체가 음모론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 첨언하자면, 조 바이든 현 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에 실제로 시아스탄, 수니스탄, 쿠르드스탄 분할안을 발표했었고, 국방부 내 몇몇 관리들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이라크 침공을 준비할 무렵에 이미 침공과 점령 이후의 이라크는 어떤 형태와 성격의 국가이어야 하는지를 놓고 부시 정권 내의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오고갔을 텐데, 그때 하나의 안으로 제기된 것이 이라크 분할안이었다.

: 한편으로는 중동 지역을 소위 ‘쓰레기 집하장’ 같은 곳으로 만들어 자국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접근법도 음모론을 배양해왔다고 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극단주의자들에 대해 자국 내 테러는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활동반경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으로 유도했다. 유럽은 그런 식으로 유대 인구를 배제시키면서 이스라엘로 보낸 것이고 미국도 이라크 전 끝나고 이 지역을 이를테면 ‘파리지옥’으로 삼고 있다. 자국 내에서 시민들을 지키는 것보다, ‘쓰레기들’을 이 지역에 몰아넣고 대응하는 게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구 중심주의는 서구 정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매우 보편화된 인식이라는 점을 짚고 싶다. 예를 들어, 시리아 북부에서 로자바 전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지상군을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면서 공습만 한 미국의 전략을 비판했다. 터키에 대해서도 지상군을 보낼 수 있었는데 보내지 않았다는 논의들이 많이 나왔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서구 중심적인 접근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IS다.

  원영수(국제포럼)

원영수(이하 원) : 제가 보기에 음모론은 대부분 전제가 잘못됐다. 음모론은 미국의 치밀한 전략이 성공했다는 전제에 기초하는데, 큰 그림에서 볼 때 석유를 포함해 미국, 유럽의 중동 전략은 실패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고 가야 한다. 2004년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미국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10년 이상의 무장저항에 직면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 미국이 일정한 통제력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배력은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다.

: 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냈던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이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며 외교안보전략을 구상하고, 치밀한 내부 논쟁을 거쳐 그 내용물을 채워간다. 그런데 막상 드러나는 결과를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고, 이라크 사례가 대표적이다. 부시 정권의 핵심들은 후세인을 끌어내리고 수니파를 배제시키면 이라크를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비록 이라크 정부를 시아파가 주도한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잘하면 이란의 반미 시아파 정권에 맞서는 친미 시아파 정권을 등장시킬 수 있겠다는 성과도 은근히 기대했던 듯하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이라크에서는 IS와의 전투를 명분으로 이란의 혁명 수비대 병력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다. 다소 과장하자면, 이라크가 이란의 속국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막자고 나서자니 IS의 세력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모르겠고, 그대로 놔두자니 죽 쒀서 이란 좋은 일만 해준 격이고. 이것이 바로 미국 정부가 맞고 있는 딜레마다.

미국이 제국주의로 반미 정권들은 전복시켰지만 지역 민중들에 대한 장악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전투에서는 이겼는데 전쟁에서는 졌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라크는 군사적으로는 이겼는데 정치에서는 진 것이다. 대중적 정서나 이데올로기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더 강해진 반미 흐름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 아닌가. 설사 리비아 같이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있는 리비아 국민들이 미국을 지지하겠는가. 거꾸로 봤을 때 지역의 불안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 실제로 IS가 시리아 내전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이 있었다, 설사 미국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요르단 등이 모두 IS를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을 지원해 주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미국은 결정적으로 오판을 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지금 이란, 시리아, 레바논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소위 시아파 초승달 지역 내에서 그 중간에 위치한 아사드 시리아 정권만 몰아내면 지역 내 반미 시아파 세력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IS를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성격상으로 보면 사실 지원할 수 없는 세력인데 말이다. 그러나 IS는 미국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담대하고 치밀했다. 그들이 시리아에서 힘을 키워서 아사드 정권과 싸울 거라는 생각만 했지 갑자기 모술로, 이라크로 치고 내려올 줄은 미국이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본다. 일례로, 오바마 정부는 6월 10일 모술이 함락된 뒤, 2011년 전투병력 철수 이후 2년 반 만에 이라크 공습을 재개하기까지 두 달이란 시간을 끌었다.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 우파들조차도 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느냐고 비난을 퍼붓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개입을 주저하다가 결국은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미국과 영국인 인질들이 차례로 참수된 일이 벌어지니까 시리아로까지 공습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즉 불과 얼마 전까지 시리아에서 반군 지원이란 명분 아래 이슬람주의자들을 키워주면서도 몇 달 뒤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측을 못한 것이다.

부시정권 때부터의 오판이 계속돼는 것인데, 원래 군사개입을 할 때는 반드시 출구전략을 마련해놓아야 한다. 하지만 부시 정권은 굉장히 단순하게도 후세인을 끌어내리고, 친미 정권 세운 다음에 만세 부르고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부시의 실패를 고스란히 지켜봐온 오바마 정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출구 전략을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거다.

그럼에도 미국은 IS의 치밀한 전술에 말려들면서 계속 전쟁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IS 스스로도 요르단보다 넓은 땅덩이를 장기적으로 장악하고 통치하려면 자발적이건 그렇지 않건 지역 주민들의 동의와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 같은 가치들을 요구하며 독재정권에 맞섰던 지역 주민들이 이슬람 율법에 의해 통치되는 초기 이슬람 사회로 되돌아가자는 자신들의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IS에게 있어 방법은 딱 하나, 미국과 그 연합국들의 전투기와 군대가 폭탄을 퍼붓고 전쟁을 해대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과 친지를 잃은 주민들이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IS 편에 서게 될 것이고, 그 순간 IS는 더 이상 침략자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IS의 셈법인 것이다.

좀 전에 IS에 대한 지역 친미국들의 지원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각국의 이해관계도 IS의 부흥과 맞물려 있는 것 같다.

: 사우디아라비아는 IS의 확산으로 인해 그다지 손해될 게 없다. 수니파 왕정국가인 사우디 입장에서는 지역의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란과 그 위성정권인 이라크가 IS와의 전쟁으로 인해 역량이 소모되는 사실 자체가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꼭 IS에 대한 사우디의 재정적 지원 때문이 아니더라도, 주로 와하비즘을 신봉하는 이들로 구성된 IS가 와하비즘의 버팀목인 사우디 왕가에게까지 총을 겨눌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이란 역시도 IS의 존재는 그다지 나쁜 수가 아니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이유도 상당하다. 미국과 그 연합국들이 IS와의 전쟁에 집중하게 되면서 당장 이란이 지원하던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이란의 핵개발을 놓고 위협을 가했던 미국 정부는 IS 때문에 이란 정부에 협력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터키에게도 IS는 골칫거리가 아니다. 일찌감치 시리아 아사드 정권 축출에 베팅했던 터키 에르도안 정부는 IS가 이란과 시리아의 시아파 정권을 계속 괴롭혀주기를 바라면서 IS를 암암리에 지원해왔다. IS가 최종 공격 목표로 설정한 이스라엘도 현재의 상황이 전혀 우려스러울 게 없다. 알 카에다가 그랬듯이 이슬람주의자들은 무슬림 사회에서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항상 이스라엘 제거를 입에 달고 살지만,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주위의 무슬림들이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어져 물어뜯고 싸우는 상황은 대이스라엘(Greater Israel) 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준다.

그렇다면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나라는 이라크, 시리아 이외에 레바논이 될 것이다. 기독교 마론교도, 드루즈, 수니파, 시아파가 골고루 뒤섞인 ‘무지개국가’ 레바논은 역사적으로 이미 15년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종파 간 내전을 겪은 바 있는데, IS가 테러 등으로 시아파들을 자극하고 거기에 시아파들이 대응해 수니파들에게 보복을 가하기라도 하는 날엔 언제든 내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구는 IS를 악마화하지만 지역 주민은 일정한 동의를 보내고 있다. IS에 대한 이라크 현지 주민들의 구체적인 입장이 궁금하다.

: 이라크도 그렇고 아랍지역은 부족적 성격이 강하다. 사람들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영향도 어떤 신학을 통해서나 선동적 차원보다는 지역 단위 모스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풀뿌리 구조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사람들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소통하고, 지원을 받거나 구제를 하고, 이런 식으로 분배 순환구조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이라크 같은 경우 1000년이 넘게 시아파와 수니파가 같이 살고 있었다. 물론 크리스찬과 쿠르드와 함께. 그 관성은 남아 있었고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2003년에도 이 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제가 있던 곳이 바그다드 안의 시아파 지역이었는데, 같은 마을에 쿠르드, 크리스찬이 함께 살았고 결혼도 해서 놀러 가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 문화가 바뀐 계기는 2003년 침공 때였다. 가장 큰 첫 번째 공격이었던 유엔 본부가 있던 카날호텔 공격에 이어 같은 해 말에는 급기야 시아파 성지에 대한 공격이 발생했다. 성지라는 것은 수니파 보다 시아파에게 훨씬 큰 의미를 지니는데, 이 대목에서 이라크 사람들이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들은 “이것이 과연 무슨 일인가!”라는 것이었다. 갈등이 분명히 있었고 사담의 경우 쿠르드, 시아와 수니를 봉인하는 동시에 수많은 폭력적인 독재적인 방편들을 동원해 이 사람들을 억눌렀지만, 갑자기 봉인이 풀렸다고 한 순간 다른 부족이 시아파 성지를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의 갈등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불과 1년, 2년 후에 자살폭탄 테러라는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성지 공격이 시작됐다. 이라크 민중들은 이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2003년 폭탄 테러가 있었을 때 정부 국가안보 수장이든, 민중들이든, 이런 폭탄 테러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 희생자 시아파가, 수니파를 대상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래서 이들은 약 2년 동안 바그다드 내 순찰대와 자체 체크포인트를 세워서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굉장히 강하게 보여줬었다. 민중들은 그렇게 상황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었다. 2010년 즈음에도 각 정파들은 함께 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도 시도했었지만 결국 이런 노력들은 다 좌초됐다.

한편 사담 후세인은 물론 독재였고 사람도 죽였다. 하지만 이라크 민중들 입장에서는 의료체계도 좋았고, 교육제도, 복지, 남녀평등에 대해 어쨌든 개선하고자 하는 제도적인 모양새는 보여줬었다. 그러나 미국에 힘입어 등장한 말리키 정권이 보여줬던 일은 똑같은 독재일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수니가 IS에 문을 열어준 이유이다. 갑자기 민중들의 상식선이 변화해 IS에 환호한 것이 아니라 나의 적에 대응해 이용할 수 있는 강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손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IS와 이라크 서부 수니 부족들의 근본적인 목표는 완전히 다르다. 이라크 수니파 세력은 뿌리 깊은 부족 세력으로서 그동안의 이권, 가치체계와 통치방식을 지니고 있다. 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말리키 정부에 의해 배제되고 억눌리면서 그러한 가치 체계를 지키려고 IS에게 길을 열어주었던 건데, 목욕물을 버리자고 아이까지 버리진 않을 것이다.

: 결국은 진보세력들이 사회운동이나 파업, 평화 집회 등의 방식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와 토대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실제로 이라크 북부 수니파 주민들이 아랍의 봄 당시에 그런 시도를 했었다. 수니파와 여성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테러법 폐지, 재건과 경제개발 등을 요구하며 비폭력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무참히 짓밟혔고 이를 본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식에 의한 사회변화에 회의하면서 결국은 IS 편을 드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본주의 문제가 중동지역 좌파의 상황과는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궁금하다.

: 근본주의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또 좀 더 거시적 측면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현재 근본주의가 아랍/중동의 반미주의와 결합돼 있지만, 역사적으로 근본주의가 득세하기 전에 세속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해서 반미의 주류를 형성했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은 미미한 세력이 된 중동좌파의 몰락과 그로 인한 정치적 공백으로 인해 근본주의가 반미-반제국주의 세력으로서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는 중심세력이 될 수 있었다.

부연하자면 20세기 전반은 식민체제 하에서 개별적인 운동의 형성기라고 볼 수 있다. 50년대 2차 대전 후에 세력화가 많이 된다. 그 시기가 아랍 민족주의의 최정점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세속주의였다. 세속주의의 정권과 좌파가 필요에 따라 적대적일 때도 있었지만 포용적일 때도 있었는데, 좌파가 넓은 의미에서 민족주의와 동맹을 한 것이다. 그런데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해체 됐고 미국에 거꾸로 포섭됐다. 여기만이 아니라 유럽 쪽에서도 전체적으로 좌파운동이 쇠퇴하는 시기가 되면서 중동 지역에서도 좌파 자체가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근거들이 별로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같은 세속주의 내에서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세력들이 소수화되고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근본주의의 확산에 주요한 요인이 아니냐고 보는 것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인데, PLO의 궤적은 중동 좌파운동의 전반적 흐름과 일치한다. 1960-60년대 아랍 민족주의가 정점을 이룬 시기에 결성됐고,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유럽에서 공산당 등 좌파가 우세하고 신좌파의 등장과 그로 인한 급진화 효과가 제국주의 중심부를 뒤흔든 시기에 PLO는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해방의 전망이 멀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투쟁이 퇴조하면서 PLO 역시 투쟁노선을 전환하게 되는데, 결코 무기가 없어서 투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각도에서, 공산당을 포함한 세속적 좌파세력은 아랍의 주민 입장에서 외래세력이었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아랍에서 좌파의 실패는 토착화의 실패였다. 자기 힘으로 대중들을 획득해서 거기에 기반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소련 커넥션이든 중국 커넥션이든 외부로부터의 이데올로기적,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데 의존했다. 이런 외부가 크다 보니까 어떤 격변기로 들어갔을 때는 물론 탄압을 당한 측면도 있지만 쉽게 몰락하거나 쇠퇴했다. 좌파의 몰락/해체라는 정세 속에서 강력한 반미주의라든지, 부패한 관료독재와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근본주의의 전유물이 된 것이다.

: 팔레스타인에서도 공산주의,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에 지식인 다수는 깊이 빠져 있었는데 사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가 썩어온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했다. PFLP가 무장투쟁을 했을 때에는 지지 기반이 매우 컸었고.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전통은 오슬로 평화협정과 함께 완전히 붕괴돼버렸다. 소위 엘리트들이 주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슬로 평화협정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이 외부에 개방됐고 이때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이 NGO들이다. 수많은 NGO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국제 프로젝트 등의 많은 일을 했는데, 거의 정부 기관이 없던 당시 이들이 고용한 사람은 소위 좌파 엘리트들이었고 이들에게 현지 경제 수준과는 큰 차이가 나는 월급과 대우를 해주면서 팔레스타인 좌파들은 굉장히 빠르게 부르주아로 넘어갔다.

: 중동 좌파의 쇠퇴에는 특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아주 오랜 전에 PLO 자체는 일종의 통일전선이지만 그 내부에 PFLP란 강력한 좌파가 있으니까 이들이 아라파트를 넘어 주력이 되면 다시 급진화되지 않을까 하면서 주관적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서 관련 자료를 검토해 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점잖은 노인 공산주의자들을 보게 되면 한편에서 존경의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운동은 실패했고, 1,2차 인티파다 등 새로운 세대의 운동이 등장하면서 구세대 좌파 대부분이 세대 간 단절 속에서 체제내화되거나 주변화됐다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는 동유럽과 러시아만의 현상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동지역에서 구좌파의 몰락과 해체는 진보적 대안의 공백을 만들었고, 제국주의의 개입에 대한 저항과 급진화의 동력이 세속좌파가 아니라 종교적 근본주의로부터 추동되는 상황이 됐다,

중동 좌파의 역사적인 성장과 쇠퇴에 관해 짚어주셨는데, 논의를 IS 부상 전 중동과 북아프리카 정세를 뒤흔들었던 ‘아랍의 봄’과 연결해 보았으면 한다. 아랍의 봄은 현재 ‘겨울’이라고 불리는데, 이 과정에서 좌파, 진보세력의 대응을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 지점은 없을까? 이집트와 튀니지의 경우 아랍의 봄으로 독재 정권을 몰아냈다가 이집트는 쿠데타에 의해, 튀니지는 선거에 의해 구독재 세력이 복귀한 상태다. 이 과정을 경유하면서 IS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는 강화됐다.

: 먼저 염두에 둬야 할 사항은 이 지역에서 정치적 대결은 기본적으로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아니면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파 간 구도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의제나 진보 세력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열렸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이 아랍의 봄이었다. 이 때 가장 핵심적인 요구가 “빵,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었다. 그래서 지역 민중들이 들고 나왔고, 사실 그 동안 정치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었던 수많은 시민운동이나 좌파 등 진보세력들의 의제가 이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랍의 봄이 겨울이 됐고 지역의 현안은 IS가 됐다. 이제 독재정권들은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의 부흥과 확산을 말하며 독재를 펼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이슬람주의자가 참수시키고 화형시키는데 여기에 집중해야지 무슨 파업을 하고 인권을 얘기하고 노동권을 말하느냐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수사를 국민들도 수긍하고 있다. 지금 구도에서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진보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 좌파라고 했을 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를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아랍의 봄 때 주력은 좌파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들과 기층민중이 거리에서 피 터지게 싸워 뒤집어 놓으니까 그때서야 좌파들이 다시 모이게 된 셈이다. 혁명투쟁을 경험한 청년들이 경향상 좌파적이지만, 그들은 구세대 좌파에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대를 넘어 다양한 좌파를 서로 연결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필요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라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좌파들은 대개 다 따로따로였던 것이고 심지어 어디까지가 운동권이고 아닌지 좌파의 경계조차 명확치 않다. 오히려 문제는 이들 주체들보다는 아랍의 봄에 열광한 유럽의 자칭 좌파들이다. 이들은 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자기와의 인맥을 통한 제한적 정보를 주관적 희망과 연결시켜 상황을 재단했다.

예를 들어 튀니지 같은 경우 노조도 반합법 노조가 혁명전후의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할 만큼의 구조와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러다 보니까 상황들 사이의 인과가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튀니지 혁명의 관건은 혁명의 중심 세력인 노조가 기층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정치세력화를 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좌파적(?) 주장이 제기되지만, 튀니지의 현실이나 주체들의 상태와는 아무런 관계없다. 한마디로 자칭 좌파들의 근거가 없는 주관적 희망사항이다.

: 앞서 밝혔듯 이 지역 좌파들 자체가 거의 미미했다. 리비아 같은 경우에는 1972년도 정당사회에 관한 법으로 일체의 좌파 정당들을 금지했다. 이라크는 원래 1968년 아랍사회주의를 내걸고 쿠데타를 한 바트당이 일정정도 좌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담 후세인 정권은 좌파들을 정말 가혹하게 탄압했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좌파 세력들은 철저하게 친미 권위주의적인 군사독재 정권이나 이슬람 왕정 하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갖출 만한 계기 자체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아랍의 봄이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아랍의 봄 기간 좌파가 민중항쟁을 이끈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해서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4월 6일 운동’의 경우, 실제로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들이 혼재된 것이었고 이후 이집트 수에즈 운하나 각 지역 관광분야 노동자나 조세 징수원들이 파업했을 때 이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사람들이 극히 미미하지만 노동운동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여를 했는가 아닌가 보다는, 그래서 이제 진보세력이 싹을 틔우려고 하는 과정에서 다시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전면에 등장해 종파간 대결구도의 덫에 빠지게 됐다는 점이다. 이 대결 구도가 강화되면 될수록 진보세력이 독자적인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든다. 대표적으로 튀니지가 그렇다. 튀니지는 IS의 부흥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니까 보니까 지역 전체가 세속주의, 이슬람주의와의 대결 구도 속에 빠져 일부 진보세력이 세속주의 독재 세력과 다시 손을 잡게 되는 과정을 밟았다고 본다.

이집트 좌파들이 무르시를 뒤집어 엎기 위해 알 시시 군부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크나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도 여기 앉아서 편하게 평론가적 입장으로 결과를 가지고 얘기하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제가 이집트 좌파였다면 쉽지 않은 고민이 됐을 것 같다.

: 혁명 후 집권한 무르시 정권의 정책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과연 군부 개입을 예상하면서도 정권타도투쟁으로 갔어야 하는지는 의문스럽다. 혁명의 주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조직돼 있던 무슬림 형제단이 혁명의 성과를 가져간 것에 대한 분노와 상황 오판이 반혁명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다양한 혁명 주체들이 파편화된 상태에서 이를 넘은 주체형성에 정치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실패한 셈이다.

IS는 중동사회 뿐 아니라 서구 그리고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구 언론들은 IS에 자원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연일 보도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김군이 자원해 큰 충격을 낳았다. 향후 IS가 중동과 서구 그리고 우리 사회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전망을 나눠보면 좋겠다.

: 아직은 막연하지만 조심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IS가 집중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이다. 중동 지역이 중요하다는 것도 맞고 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는 IS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사회의 담론의 틀까지 만들고 있다. 매우 우려되는 문제다. 요르단 지식인들은 이름까지 ISIS라고 강조하면서 거리를 둔다. IS는 ‘이슬람 국가’로 이슬람 전체를 대표하는 듯 보이지만 ISIS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 국가’로서 지역적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들의 방식이 다소 이해되는 점은, 우리도 일베, 서북청년단을 아예 담론화 하지 말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갑자기 비상식적인 것이 어느 순간 담론 안에 들어와 버리는 것 자체를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담론을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이 점에서 최근 재미있게 봤던 것 중 하나가 요르단의 만화제작가인 술래이만 바킷이 말한 “이슬람의 가장 큰 적은 IS다. 가장 큰 이유는 영웅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 영웅모델은 뒤틀린 영웅 모델이고 이것은 서구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 우리가 예를 들어 샤를리 엡도와 호주 테러, 또는 김군이 IS에 가담했을 때 받은 충격은 사실 매우 컸다. 그런데 이 충격과 이들 사건이 사회에 미치는 위협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IS에 자원한 김군의 경우, 한국에서 이런 사례가 나왔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일일 수 있지만 사실은 과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가깝게는 시리아 내전 때도 서구 청년들 중 상당수는 이 지역에 들어가 총을 들고 싸웠다. 다만 이제 한국의 김군이 처음으로 IS에 자원한 것은 SNS 등 가담할 수 있는 도구가 생겨서 간 것이지, 그 자체로는 그렇게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너무 과장하고 있다. 그렇게 과장을 하니까 매비우스의 띠와 같은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 결국 사건을 어떻게 전달하는가라는 채널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서구 언론은 마치 중동 문제에 자연스러운 연결고리가 있는 것처럼 “이라크에는 수니와 시아의 분열이 있었는데 그것이 갈등으로 심화됐고 그 배후에 알 자르까위가 있었다”는 식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라크 사회에는, 우리로 치면 서북청년단이나 일베가 갑자기 우리 사회를 전복시켜서 한 가치가 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선정적인 부분만 이슈화되고 과장되기 때문에 결국 우리나라에서 폭탄테러를 했던 소년이나 김군이 IS에 자원하는 것과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IS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총알받이거나 또 다른 선전도구로 이용된다는 것까지 잘 알려져 있다면 과연 김군이 IS를 찾아갔을까.

물론, 영국 여권을 가진 이가 IS에 자원한다는 것은 서구사회에 매우 놀라운 일일 것이다. 또 프랑스 샤를리 엡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단한 위협이라기 보다는 진공상태에 있는 ‘우리’와 저 ‘쓰레기장’에 내다버린 ‘저들’이 갑자기 섞이는 것에서 받는 충격일 뿐이다.

: 문제의 핵심은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라고 본다. 예를 들어 샤를리 엡도 사건이 터지는 순간 프랑스 국민은 다 같이 하나가 됐다. 그 동안 숨겨왔던 인종주의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 내면화된 인종주의가 IS 같은 극단주의의 풍부한 풀(pool)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무슬림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개입과 신자유주의 재편의 불가피한 결과이고, 과거에는 자유주의나 운동권이 문제해결의 부분적 통로 역할을 했는데, 사회 전체의 우경화로 그런 통로가 봉쇄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의 개입과 내재화된 인종주의가 낳은 불행한 구조이고, 문제는 특정한 경계를 넘어선 지금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고, 모든 피해는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종적 소수와 중동, 아랍 지역의 주민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 시민들도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국에서는 500명 가량이 IS에 합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영국 사회에 이 사람들이 더 위협적일까, 아니면 5만 명이 넘는 당원들을 보유한 영국독립당과 같은 극단적인 신나치 인종주의자들이 더 위협적일까? 저는 후자가 훨씬 위협적이라고 본다. 프랑스 국민전선이나 독일 페기다도 마찬가지다.

: 한국의 제도언론도 기본적으로 친미, 친유럽적인 수준을 넘어, 진실은 외면한 채 내면화된 인종주의를 퍼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 내 지역주의의 배타성도 문제지만, 외국인에 대한 이중잣대가 굉장히 강하지 않은가? 외국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종주의에서 벗어난 듯 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서구의 인종주의는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

그러면 운동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직면해야 할까? 우선 눈에 띄는 점은 2003년 이라크 침공 때에는 반전 여론이 크게 일었지만 지금 운동사회는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때와도 분위기가 다르다. 어떻게 봐야 할까?

: 팔레스타인 사안은 명확했다. 게다가 이미 서구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크다.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내면화 시킨 제국주의가 있는데, 그것을 깰 만큼 이 지역의 정세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얘기하기가 힘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서구가 중동에 대해 단순하게 석유 때문에 침공했다고 말하지만 예를 들면, 이란의 천연가스, 시리아 가스관처럼 실제로 그것이 각 나라들을 어떤 구도로 이끄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겠다. 왜 사우디와 카타르가 시리아에 치를 떨고 이 나라의 힘을 빼고자 했는지에 관한 맥락이 있을 것이다.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렇게까지 흘러가게 만든 것은 자발적인 민중의 힘만은 아니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 2003년도 이라크 침공 당시 진보진영의 호소로 많게는 몇만 명까지 모였었는데, 당시 수준의 운동은 사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과는 다르게 좀 복잡한 문제, 대표적으로 코소보 전쟁 같은 경우에는 의견을 모으기 쉽지 않다. 당시 진보진영은 나토의 군사 공격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그 상대편에 있던 밀로세비치라는 소위 거대한 악마로 인해 의견이 나뉘었다. 리비아도 마찬가지다. 리비아에 대해 레바논계 프랑스 지식인 질베르 아슈카르와 같은 사람들은 군사 개입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좌파들이 반미, 미국의 제국주의와 패권 전략에 반대해야 된다는 도그마에 빠져서 역사에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IS 문제는 과거의 이런 사례들 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런데, 진보운동을 하시는 분들조차 미국이 이 지역에서 패권과 석유를 위해 개입하려는 것 아니면서 그렇지만 IS도 미친놈들이라고 말하는 정도다. 그러다 보니까 진보진영도 인종주의로 치닫는 것이다. 적어도 정확한 정보와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라는 시각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정보와 시각을 전달하는 싸움인 것 같다.

: 운동권도 좋게 얘기하면 민족주의적 편향이 강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인종주의적 편견에 물들어 있다. 기본적으로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적 멘탈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내면화된 인종주의에 대한 철저한 자기투쟁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다.

: 개인적으로는 최소한 지금 이 시기에, IS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것이 강제적으로 보편화 되고, 그것이 이제는 자발적인 상식처럼 돼버린 집단적, 지역적 경험이 있다. 이스라엘 말이다. IS는 이처럼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그 충격 때문에, 레반트 지역의 분열이나 약화는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질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이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개인적 집단적 이야기의 문맥이 이곳으로 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최소한 대화나 이해의 기반은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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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코프스키

    페이스북의 한 문서에서 확인한 사실인데 작금의 상황에서 좌파의 개입지점은 극단주의자들이 (명칭과는 달리) 반 서구, 제국, 열강의 모토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강령, 정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