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혜실록 보부상 성완종편

[양규헌 칼럼] 백성들의 땀방울 찾는 것이 정의

왕의 칙서와 영의정 사표

근혜국왕이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성완종 쪽지’와 관련해 전체 백성에게 교지를 내렸다. 중남미 4개국 순방 뒤 심신이 엉망이라 ‘영양물 주사’를 맞던 국왕은 재보궐선거를 하루 앞두고 느닷없이 승전색 내시(청와대 홍보담당)가 교지를 대독하는 형식이었다. 옥체가 많이 힘들지만 국정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망극하옵게도 영의정의 사표를 수용했다. 아울러 영의정 문제로 백성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감정이 있다(유감)며 최근 사건(정치계의 보부상 경남상단 행수 성완종)의 진위여부는 엄정한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는 쪼가리 칙서도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근혜왕의 최측근인 도승지와 영의정은 물론이고 핵심 판서와 관찰사들이 연루된 것에 대한 유감표명이나 사과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특히 죽은 경남상단 행수는 상당한 돈이 근혜왕의 왕위를 계승하는 부정한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증언을 하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국왕은, 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엉뚱한 소리만 반복하는 너스레를 떨어 뇌의 작동이 멈춘 게 아닌가하는 우려로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행수 성완종은 누구의 물주인가

상황이 이러함에도 근혜왕은 한발 더 나아가 “경남상단 행수 성완종 보부상에 대한 연이은 ‘사면’은 백성이 납득하기 어렵고, 경제도 망쳤으며, 결국 작금의 사태가 ‘두 차례 사면’에 있으므로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어명을 내렸다. 조정과 보부상의 정치뒷거래 원인을 과거 선왕의 두 차례 사면 탓으로 돌리는 행태에 벌려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성완종 보부상 행수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은 “과거 선왕의 물주가 아니라 근혜국왕의 물주”임을 강변하며 억울하다고 통곡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러함에도 근혜왕은 수사 중인 사헌부에게 구체적인 수사 항목을 친절하게 지정해주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왕은 죽은 물주가 현재의 국왕과 한편이라는데 자신은 정작 모른다는 것이고, 제3자 또는 정치권 전체의 물주인 것처럼 낙인을 찍음으로써 물타기에 성공했다. 게다가 왕 자신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혁의 주체’로 나서는 뻔뻔스러운 태도까지 보였다. 결국 국왕이나 조정내부를 향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고 ‘국왕선출 불법자금’을 비켜가기 위한 몸부림만 보인다. 때문에 사헌부와 의금부가 아무리 철저한 수사를 한다고 해도 결과는 국왕이 면피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총체적으로 썩어 문드러진 공작과 뒷거래에 예외일 수 없는 국왕

보부상의 돈 뿌리기 뒷거래가 조정 전반에 걸쳐 선왕들부터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는 근혜왕의 주장은 지극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예외’라는 국왕의 태도에 역겨움을 느낀다. 역대 어떤 선왕도 보부상의 뒷거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근혜왕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줄곧 진행되어 온 정치적 뒷거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라의 안보와 방위를 책임지는 도원수(병조판서)에 의한 수천억의 비리, 세월호 참사로 확인된 통영함 비리, 원전비리, 자원외교비리, 저축은행비리, 사학비리, 4대강 비리 등과 같이 물주들의 돈 뿌리기는 돈의 액수가 천문학적이어서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문제는 돈 뿌리기 공작에 따른 부담은 백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보부상들의 정치공작이 정당할 수 없듯이 성완종 행수가 의인일 수는 없어

과도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뒷거래의 대상은 왕족과 문무양반, 서리, 향리까지 중앙과 지방에 걸쳐 진행되어 왔으며 보부상들에 의해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의 경남상단 행수 성완종 보부상 사건에서 성완종이 마치 의인처럼 비춰지기도 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언론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보부상이 자수성가하여 보부상이 되어 성공했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사회적 악의 요소인 돈 뿌리기를 고백한 점을 들어 정치 공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성완종 보부상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시절이 한이 되어 장학 사업을 한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는 망자에 대해 관대하다. 그러나 문제는 정확히 제기하는 게 맞다. 그렇다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천문학적 재화를 축적할 수 있었던 근거는 그가 부지런해서인가. 아니다.

모든 행수와 상단이 그러하듯 성완종 보부상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은 게 아니다. 뒷거래를 하기 위한 돈 뿌리기로 줄을 대고, 권력과 결탁하여 엄청난 돈을 끌어 모으고 상단경영이 부실하여 돈이 바닥나면 은행돈을 행수의 돈인 양 끌어 쓰고 호조(금융)는 금고의 돈을 내주라고 압력을 넣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돈 버는 건 누워서 떡먹기다. 더군다나 공조(국토해양부와 지식경제부)의 특혜는 보부상에게 국가의 토목공사와 해외(배트남)에 ‘랜드마크72’ 건물에 1조2천억을 퍼붓도록 보살펴줬으며 ‘랜드마크72’에는 근혜왕까지 출연하여 ‘옷자랑 대회’를 선보이며 요란을 피웠던 사실은 그냥 스쳐 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 보부상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은 뒷거래가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고, 정치적으로 팽 당했기에 죽은 것뿐이다. 뒷거래의 영양가가 남아 있고 국왕이 자신을 알아주었다면 그는 더 큰 부를 모으고 더 큰 뒷거래를 계속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의인으로 미화시키는 행위는 상단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빼앗긴 땀과 눈물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고, 그러한 맥락자체에 구리고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느껴진다. 성완종 보부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과 인맥으로 부를 만들었으며 부패와 돈 뿌리기 공작으로 돈을 모은 보부상일 뿐이다.

정치는 지배자들의 전유물일 뿐

세계화로 일컫는 신자유주의의 경쟁위주 시장에서 보다 많은 재화를 축적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는 돈 뿌리기 뒷거래는 일상화, 보편화되고 있다. 곳간이 차고 넘쳐도 반복, 계속되는 모종의 밀월관계에서 파생되는 뒷거래의 핵심은 지배계급끼리의 ‘돈 모으기’, ‘권력 따먹기’ 경쟁이며 그들만의 계급정치이다. 한줌도 되지 않는 문무양반들과 뒷거래로 공생하는 보부상들은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기생하는 집단(국가)이며 이들에게 다스림이란 패도만 있을 뿐 정치는 없다. 패도정치는 법과 무력을 가진 자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로써 지배자들의 전유물이다

보부상들은 부자나 왕의 금고를 털어 곳간을 채워 온 게 아니다. 뒷거래의 보상과 허가받은 특혜로 뭉칫돈을 쌓아두고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일상적으로 돈을 뿌리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곳간 채우기’는 상단에서 일하는 백성들의 몫을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조정에 몸담은 정승들은 일하는 백성들의 이슬 같은 땀방울마저 앗아가는 제도를 완성시키려고 보부상들에게 ‘법’이라는 윤기 넘치는 선물을 안겨준다. 이런 결과는 백발백중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 없고, 백성의 기본권리(생존권과 생활권)는 철저하게 유린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기본권리 박탈에 저항하는 행위는 바로 불법으로 처벌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패도정치를 일삼는 자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헛소리를 연발함으로써 백성들의 비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강한 법과 계급제도로 무장한 사헌부, 의금부, 병조, 형조, 공조를 비롯한 각각의 조직은 소수 지배층의 전유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보부상, 상단 등과 끈끈이 유착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고착되어 있다. 보다 쉽게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을 빌려 일하는 사람들을 지역별로 갈라놓고 계층별로 갈라 치고 일의 성격으로 나눠놓고, 나이별로 차이를 유발하여 일하는 백성끼리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만드는 데 상당부분 성공하고 있다. 갈수록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정당한 땀의 대가를 주장하지만 지배계급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이 소외된 백성들은 목숨을 지탱할 자격조차 박탈당해 죽음을 선택하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사투를 벌이고 있다. 백성의 기본권리가 땅바닥으로 추락했음에도 백성을 대신한다는 정치 모리배들과 정승들은 백성 때려잡기에 혈안이 되어있으며 백성들의 저항이 두려워 허구한 날 ‘성벽 쌓기’에 여념이 없다.

모든 돈 뿌리기에 이용된 재화는 백성의 땀방울...그 땀방울을 찾는 것이 정의

한줌밖에 되지 않는 벼슬아치들과 보부상이 굳게 결탁하여 백년대계의 탄탄대로를 굳혀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 다수인 백성들의 궁핍한 삶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며 죽음으로 내 몰고 있는 작금의 절망의 늪을 어찌할꼬. 백성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정치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눈이 멀어 국왕과 정당의 노예가 되어 백성들을 우롱하는 오늘의 꼬락서니를 어찌할꼬.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술수에 말려 서로 다른 차이로 대립함으로써 하나로 모아지기보다는 깊은 감정의 골을 팸으로서 다수임에도 소외된 자들의 힘이 점차 소진되어 추수할 곡식에 싹이 나고 비료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어찌할꼬.

그럼에도 역사의 발전은 소외된 백성들의 항쟁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앞에 위안을 삼는다. 왕도 정승도 정치모리배도 주인행세를 하던 상단과 행수들도 백성들에 의해 몰아낼 수도, 바꾸기도 했던 사실들이 역사발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지배자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거대한 공동체가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일하는 백성들은 그동안 흘려온 땀방울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싸움을 통해 모든 백성의 삶의 질을 확대해가는 보다 단단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비타협적인 싸움의 현장이어야 하며 싸움을 통해 낡아빠진 악습의 봉건드라마를, 저들만의 유토피아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