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정당 이번엔 건설할 수 있을까?

[쿠오바디스 진보정치](5) 계속된 계급 좌파 연합 실패...다시 체제 위기서 당 건설 꿈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 주류 진보정치 운동과 다른 계급적 좌파정치의 길을 걷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 추진 세력이 내년 1월 창당을 목표로 잰걸음을 걷고 있다.

‘변혁적 현장실천 노동자 계급정당 추진위원회(추진위)’는 노동절인 5월 1일 기관지 ‘변혁정치’ 창간호를 발행하고 본격적인 계급정당 건설 행보를 하고 있다. 추진위는 기관지 창간사를 통해 “진보정당이 퇴행의 역사를 걷고 있다”며 “노동자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노동자 계급정당 출범의 토대”라고 21세기 사회주의 정당의 전망을 자신했다.

추진위는 2016년 총선-2017년 대선을 앞둔 내년 초를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최적기로 보고 있다. 좌파정당인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 08년 이후 투쟁으로 등장한 스페인의 포데모스 집권 가능성,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등에서 좌파 약진, 미국 사회주의 활동가 의회 진출 등 세계적으로 좌파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데도 유독 한국 진보정당만 우클릭하고 있는 현상은 계급정당 건설의 틈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진위는 기관지 창간사에서 “(정의당은) 헌법 안의 정치를 선언하고, 그나마 불완전하던 사회주의 이념은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화를 선언했다”며 “민주노동당 시절 사민주의 전략이라고 문제제기 되었던 사회연대전략을 떳떳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됐다. 차이만 있을 뿐 시혜로서 복지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원내 진보정당을 비판했다. 또 “(정의당) 강령에는 소득주도 성장을 명시하여 명실공히 문재인의 소득주도 성장론과 함께할 수 있게 됐다”며 “최저임금을 인상해 소득주도 성장을 꾀하고자 하는 초이노믹스와의 차이마저 없어져 버렸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진보정치는 실패했고, 살아있다면 퇴행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추진위는 이런 이념의 공백을 메꾸고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대중운동 조직에 사회주의 정치를 드러낼 공간을 확보해갈 예정이다.

추진위는 또 기관지 창간 외에도 강령규약제정특별위원회(강령 특위)를 통해 7월 총회에서 강령 초안 채택을 목표로 강령 건설 사업에 돌입했다. 강령특위는 “세계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서 강령 따로 실천 따로인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다”며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당의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전략은 분명히 하되, 현실에 조응하고 대중과 호흡하면서 변화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강령 특위는 추진위 출범 때 채택한 5대 정치원칙에 기초하고 기존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강령을 검토해 초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강령은 △지향과 목표 △당 활동의 방향과 운용 △실천 강령 3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하반기엔 이 초안을 토대로 토론회와 강연회를 통해 조직 바깥의 의견도 수렴할 계획이다.

이렇게 계급정당 추진위가 기관지 창간과 더불어 당 건설의 구체 일정과 결의를 밝히고 나섰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계급정당을 건설할 수 있을지는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97년부터 이어온 사회주의 계급정당 건설 논의 과정에서 나온 불신과 좌파 정치세력의 면피성 선언에 불과한 정치활동 과정에 있다.


2002년 대선 공투본 무산, 좌파 통합 동력 잃고 무기력한 대선 경과

좌파 활동가들이나 현장노동자, 사회운동단체, 진보정당 활동가들은 대체로 계급정당 추진 선언에 대해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이번엔 강령 토론만 하다 쪼개지지 않고 창당할 수 있을까?’와 ‘계급정당은 기존 진보정당과 어떻게 다른 정치활동을 하고, 무엇을 하는 정당이냐?’는 물음이다. 일각에서는 냉소마저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형편이다.

두 가지 반응 모두 97년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준))를 거쳐 ‘노동자의 힘(노힘)’ 등으로 대변되는 비제도적 계급정당(투쟁정당) 운동 세력이 걸어온 10여 년의 행보와 그 이후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사노준)’-‘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를 거쳐 온 과정에 대한 냉소와 불신이 담겨 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좌파 노동, 학술, 학생 단체들이 결합한 정치연대는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과 대선 투쟁을 위한 공동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국민승리21이 선거정당 등록을 추진하면서 불참파(한국노동청년연대->사회당), 참가 후 탈퇴파(노동자의힘->사노준->사노위->계급정당 추진위 주요 세력), 잔류파(민노당 좌파)로 나뉜다. 여기서부터 계급정당 추진위로 수렴되는 무기력하고 지난한 사회주의 정당 추진 움직임은 18여 년간 이어져 온다.

18년 동안 계급정당 추진 세력이 대선과 총선 등에서 제기한 대중적 핵심 의제는 개량주의와 의회주의 청산, 야권연대 반대 등 민주노동당에 대한 반정립의 정치였다. 반정립의 정치는 구체적인 계급정당의 상, 활동 방식, 새로운 현장정치 활동의 전형을 보여주지 못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2002년 민주노총을 등에 업은 민주노동당 중심의 대선 정치활동을 견제하고 좌파 운동 세력의 공동투쟁을 이끌고 좌파 통합 논의까지 바라본 2002년 대선 공동투쟁본부(공투본) 무산 과정에서 보여준 노힘의 태도는 좌파 운동의 신뢰를 흔들었다. 당시 대선 공투본 무산과정과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해산 과정을 보면 좌파 운동과 계급정당 건설운동의 역사가 왜소화를 겪으며 무기력한 방어적 대응으로 반복됨을 알 수 있다.

  2011년 4.30 사노위 주최 사회주의 정당 건설 정치대회

2002년 10월 26일 중앙대에서 열린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해산 총회에서 젊은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들은 노동운동 좌파 선배들이 포진해 있는 노힘을 심판하러 왔다고 맹비난했다. 노힘이 스스로 제안했던 대선 공투본 제안을 공동의 보조를 맞추던 다른 좌파들과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철회했기 때문이다.

노힘은 2002년 대선 대응방침으로 대선 시기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진보진영)이 투쟁과 대선 대응 공동집행을 목표로 하는 '전국공동투쟁본부'(공투본) 결성을 추동하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투쟁과 선거 대응이 올바로 결합하게 하자고 운동 세력에 제안했다. 이 방침은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대선 후보를 단일화하고 선거 대응과 후보 전술이 투쟁을 조직하고 강화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또 공투본 안에 대통령 선거 공동선거대책본부(공선본)를 두고 무차별 국민 경선이 아닌, 계급 대중 경선을 통해 단일 후보를 선출하자고도 했다.

이를 위해 노힘은 경선에 참여할 계급적 좌파진영 후보 추대운동을 주도하고, 이를 위해 전국 현장노동자 중심의 1만인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을 조직한다는 실행계획을 냈다. 공투본과 관련한 중요 결정은 대선실천단의 결정에 따른다고 했다. 노힘은 “명실상부하게 계급적 좌파진영과 현장 활동가들에게 우리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장을 확보한다는 의미로 검증받을 수 있는 과정이자, 강화 수정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대선실천단의 의미를 강조했다.

하지만 2002년 10월 23일 밤 10시에 열린 대선공투본 6차 예비모임에서 노힘은 공투본 건설 제안을 철회하고 만다. 좌파 후보를 구하지 못한 데다 사실상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공투본 후보로 확정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공투본이 결정한 후보의 법적 등록 요건에 대한 이견이 나오면서 민주노동당으로 대선 후보 등록을 할 경우 노힘이 포괄하는 노동현장에서 민주노동당과 함께할 수 없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6차까지 진행된 공투본 예비모임 논의에는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 민주노총 김형탁 정치위원장과 신언직 정치국장, 전국연합 정대연 정책위원장, 한청 김근래 정책위원장 등이 직접 참석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통합진보당 합당.해산-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역사에서 드러나는 공투본 논의 참여인사를 본다면 당시 공투본이 무산되지 않았을 경우 또 다른 진보정당의 경로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노동당은 좌파 정치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노힘이 공투본을 무산시키자 사회진보연대는 강력히 반발했다. 3일 뒤인 26일 밤 사회진보연대는 대선실천단 총회에서 노힘의 책임을 물으며 대선실천단 해소를 요구했다. 노힘의 한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공투본 철회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 “대선실천단이 제출하고 있는 대선 방침으로 현장에 들어가면 누구도 호응하지도, 동의하지도 않는다. ‘민노당에 동의하려는 제스처 아니냐. 한 번의 우회로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도 민노당으로 대표되는 의회주의 정치가 어떻게 노동자의 삶을 갉아먹는지 역설해 봤지만, 우리도 벽에 부딪힌다. 민주노총의 (민노당 배타적 지지) 정치방침이 바뀌지 않는 한 노힘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100명 이상을 조직할 수가 없다. 이게 노힘의 현실이다. 우리는 그런 벽에 부딪혀 있다”고 토로하며 대선실천단 해소를 반대했다.

반면 사회진보연대의 한 회원은 “후보의 법적 등록 문제는 형식의 문제다. 민주노총이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우리 운동을 못 하느냐”며 “대중과 만날 공간을 만들어 내자는 건데 법적 등록이니 이런 것으로 (대중투쟁 공간을) 닫아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날 총회엔 당시 학생운동 단체에 속해 있던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힘은) 공투본 철회 결정이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민노당에 투쟁의 성과가 갈지 모른다고 했다. 하반기 대선 투쟁의 성과는 조직에 돌아가지 않는다. 민중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노힘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선실천단 발족식 때 민중 경선을 성사시키고, 민중 경선 안에서 논쟁하고, 범민중후보로 단결해 하반기 공동투쟁본부를 중심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공투본 무산과 함께 대선실천단도 해소하면서 사회당을 제외한 좌파는 2002년 대선에서 할 일이 없어졌다. 대부분 좌파는 투표방침조차 제대로 논의하지 못했고, 어떤 정치적 실천도 못했다. 그렇게 변혁적 좌파들은 현실 정치 활동 공간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2002년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해산 총회

계획만 난무한 좌파연합 대선 방침 반복

역사에서 과거를 반추하며 역사적 가정을 하는 것은 부질없지만, 2002년 대선 공투본이 잘 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주요 좌파 단체들이 통합과 새로운 질서로 나아갔다면 현재 한국사회 좌파 정치 운동은 다른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좌파 운동의 역사를 보면 미래의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한 에피소드를 바꾼다고 해도 역사의 큰 줄기는 그대로였을 가능성이 크다. 노동 현장 조직에 갇혀 정치적 기획력과 실행력 부족, 한계 절감이 되풀이됐고, 주요 정치적 계기에서 하는 것은 없이 비판만 무성한 변혁 좌파라는 인식만 낳아왔기 때문이다.

노힘은 2007년 대선 국면에서 다시 ‘좌파 연합’을 골자로 한 대선 방침을 제출한다. 노힘은 “반신자유주의, 반제반전, 반자본의 기치 아래 이에 동의하는 계급적 변혁적 좌파 진영과 함께 정치활동을 전개하겠다”며 “좌파 진영의 정치활동 성과를 바탕으로 좌파연합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노힘은 좌파 연합의 파트너가 ‘노동, 빈민, 장애, 여성, 문화, 인권, 학술 등 진보진영 내 제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민주노동당과 한국진보연대 등 민족-통일 운동진영과는 선을 그었다. 또 좌파 연합을 중심으로 좌파 선거연합과 독자 후보 전술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좌파 대선후보를 내세운다는 방침도 세웠다. 당시 노힘 내부에선 대선방침을 둘러싸고 “섣불리 대선에 결합할 경우 조직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을 담보해내지 못할 경우 정치조직으로서의 동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입장이 부딪혔다. “대선방침 없이 투쟁으로 돌파하자”는 안도 나왔다.

논쟁 끝에 좌파 연합-대선 후보라는 방침을 세웠지만 실천적으로 대선 방침은 무력화됐다. 노힘은 당시 “단순히 누가 대선후보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닌, 좌파진영이 향후 5년, 10년을 내다보며 독자적인 자기 전망을 세워야 한다”고 했지만, 이 말에 갇혀버린다. 노힘은 (가칭)‘판을 열자! 내가 민중 후보다’ 운동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정치활동을 벌여나간다는 계획을 내고 집단적 예비후보 등록 전술을 채택했지만, 끝내 예비후보는 한 명도 등록하지 못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전 좌파정치 활동가는 “후보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 차일피일 미루면서 아무도 예비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회를 다시 열고 결의를 했는데도 끝내 하지 못했다. ‘내가 후보다’ 전술을 반대할 명분이 없으니 총회에서 통과는 시켰는데, 사실상 현장의 회원들은 아무도 안 움직이고 반응을 안 했다. 그렇게 총회 결의를 주저앉혔다”고 지적했다. 07년 대선에서도 자기 대선 방침을 계획으로만 제출하고 구체적 후보 전술을 실행하지 못한 채 넘어간 것이다.

노힘의 한 핵심관계자는 2009년 ‘진보전략회의’ 토론회에서 “주요 부르주아 선거 때 선거연합 문제를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고 성사시키려고 노력한 바 있다”며 “자체의 한계와 개량주의 정치 세력의 패권주의 때문에 한 번도 실행한 바는 없지만, 이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출처: 사노위]

사노위, ‘강령을 통한 사회주의 정당 건설’ 실패

2008년 10월 노힘 회원 등 100여 명이 모여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준비모임’(사노준) 건설을 결의한다. 다음 해 2월 노힘은 “지난 10년간의 우리 자신을 버림으로써 한 시대를 매듭짓고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려 한다”며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의 한 주체로 서자”고 결의하며 단체를 해산했다.

사노준은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성격으로 △사회주의 정당 △노동자 정당 △생태, 여성, 소수자 등 21세기 사회변혁 과제 △사회변혁을 위한 정당 △민주적인 정당 △당원이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정당 등을 토대로 삼았다. 또 ‘대중 자신의 권력화’라는 ‘대체권력’을 형성하기 위한 당의 임무와 역할, 활동과 사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재조직-재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대대적인 사회주의 정치캠페인(활동)을 벌여나가려는 구상과 계획을 고민하고, 기존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비판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정하는 모든 단위와 함께 당 건설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사노준은 이렇다 할 족적을 내지 못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등과 함께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를 2010년 5월 9일 출범시킨다.

사노위는 창립총회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 △노동자 권력(대체권력) 수립 △사회주의 관점에서 여성, 소수자, 생태문제 등 정치원칙과 사업계획을 확정한 후 본격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결의했다. ‘강령을 통한 당 건설’을 기치로 사회주의 표방 정치세력들이 모인 사노위는 2011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건 대중집회 4.30 정치대회 등을 개최하며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를 꾀하지만 결국 강령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사노위는 2011년 5월 28일 총회 전부터 강령기초위원회 내부에서 강령 내용과 체계를 둘러싸고 쟁점을 좁히지 못했다. △쇠퇴기 등 현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태도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평가 △이행론에 대한 입장 △여성 및 생태에 대한 관점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단일한 강령 초안에 끝내 합의하지 못한 채 총회를 끝냈다. 그리고 6월 1일 사노위 집행부였던 오세철, 고민택, 양효식, 박준선과 고 남궁원 활동가 등 회원 28명이 조직 해산을 요구하게 된다.

이들은 “사노위가 실패한 것은 단지 강령 문구상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때문이 아니다. 강령 상의 불통일은 혁명이냐 개량이냐와 관련한 총노선의 차이를 드러냈으며, 이는 ‘어떤 당’을 건설하고 ‘어떤 정치활동’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산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해산선언문에서 “강령(이행요구)에 입각한 노동자투쟁 조직화로 우리의 정치활동을 끌어올려야만 조합주의와 부문운동주의를 극복하고 당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거듭 제기했었다”며 “다수파 앞에는 ‘주체형성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조합운동과 부문운동들을 병렬적으로 모아놓는 연방주의, 추수주의 조직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사노위 2012년 대선, 반자본 운동 세력과 ‘공동 선거본부’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모임에 합류


2012년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부정경선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종결이 예고되면서 계급 좌파 운동은 연말 대선을 경과하는 독자적 세력화를 다시 꾀한다. 사노위는 2012년 9월 8일 총회를 열고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 후보’를 무소속 후보로 내세우고 후보 사퇴 없이 완주한다”는 18대 대선 방침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또 대선에서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 반자본 운동 진영과 함께 ‘공동 선거운동본부’와 ‘노동자 민중 후보 추대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특히 사노위는 정당 건설 문제와 2012년 대선 공동대응 문제는 분리했다. 대선 공동대응의 경험을 통해 대선 이후 정치적 신뢰와 대중적 기반을 구축한 후 정당 건설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사노위는 현장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 활동가 모임’(변혁모임)에 힘을 실었고, 변혁모임도 ‘노동자 대통령 공동선거투쟁본부’와 대선 공동 대응에 나선다.

10월 12일엔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연대회의)이 계급 좌파 진영과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꾀하면서 노동전선,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노혁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좌파노동자회 등 5개 단체가 함께하는 (좌파) 대선기획단을 함께 구성하고 대선 공동기구 구성을 합의했다.

대선기획단은 2012년 대선 투쟁에서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야권연대 반대, 완주하는 노동자 민중 독자 후보”를 합의하고, 주요 쟁점 중 하나였던 대선 투쟁과 대선 이후 당 건설 문제는 분리하기로 했다. 변혁모임도 대선기획단에 합류하면서 97년 정치연대엔 미치지 못하지만 진보정당 운동의 실패 속에서 만들어진 균열에 계급 좌파 운동 진영의 단일한 대응 흐름이 일어났다. 다만 진보신당이 대선기획단에 제안한 임시(가설)정당을 통한 후보 등록방법과 후보선출 기구 구성을 통한 선출방법은 ‘대선 공동기구’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이는 결국 최대 쟁점이 됐고, 이후 대선기획단에서 진보신당 내 사회당계가 주도한 가설정당을 통한 대선 후보 등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보신당은 대선 공동대응에서 빠지게 된다. 결국 변혁모임은 김소연 후보를 독자 후보로 추대하고, 진보신당 사회당계는 당 결정과 무관하게 김순자 후보를 추대하며 두 명의 좌파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좌파 정치세력들은 92년 대선 백기완 민중 대통령 후보 전술의 계승자처럼 대선 시기마다 계급좌파 연합에 근거한 노동자 민중 독자 후보 전술을 서로 제출해 왔지만, 정치적 원칙과 명분에 근거한 습관적 선언처럼 보였다. 이렇게 2002년 대선 공투본 당시 아직 힘이 미약한 민주노동당과 논쟁을 통해 진보정치 견인과 좌파 세력화를 시도하려던 기획이나 10년 뒤 2012년 진보정당의 실패 위에 다시 계급 좌파의 단일한 대응을 통한 세력화를 추진했던 기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노힘부터 면면히 이어진 변혁모임의 계급정당 추진 계획은 김소연 선거 투쟁을 거치면서 아직 이어지고 있다. 대선 독자 후보계획이 이후 계급정당 건설의 동력이었음을 감안하면 조그만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계급정당 건설운동은 계급정당 추진위를 건설하는 데까지 나아갔지만, 2013년과 2014년 모두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왔다. 정치연대로부터 시작된 계급정당운동 18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반복되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인한 분열과 써클화, 정치적 기획과 실행력, 결단 부족의 과정이었다.

추진위 회원들도 못 밝히는 사회주의 정당 실천 모델

계급정당 추진위는 지난 18년 동안의 한계와 오류를 잘 알고 있다. 기관지 창간호에 백종성 현장정치 특별위원장이 쓴 “현장정치활동의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장정치 특위의 문제의식을 담은 이 글은 “문제는 우리 스스로 ‘돈과 표’의 현장정치를 넘어 ‘이것이 우리의 정치’라고 할 만한 현장정치 활동의 전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새로운 현장정치의 존재를 실천으로 증명하는 것은, 곧 새로운 당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으나 우리는 이를 실천적으로 증명해 보인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추진위 바깥에선 이번엔 다양한 한계를 극복하고 당을 건설할 수 있을까 주목하면서도 여전히 의구심과 냉소를 드러내는 활동가들이 많았다.

노동당의 한 당원은 “이분들이 생각하는 정당이 뭔지 감을 못 잡겠다”며 “사회운동 단체에 정당이란 이름만 붙이는 건지, 아니면 제도권에 직접적으로 자기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상태에서의 정당을 얘기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그분들에게 노동당 등이 개량주의자들로 보일지 모르지만, 노동당조차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자기 노선을 가지고 다가가지 못하는데, 이름만 계급을 붙여 놨을 뿐 계급적 이해를 관철할 기획이나 노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현장에 계속 결합하고 이념에 헌신하는 모습은 존중하지만, 중요한 정치적 시기에 하다못해 지역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구체적 기획조차 없어 노동단체와의 차이를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전 좌파 정치 활동가는 “노힘으로부터 이어져 온 당 건설은 대략 △강령만 합의되면 당을 만들 수 있다는 강령을 통한 건설 △좌파 조직통합을 통한 노선 △투쟁을 통한 당 건설 노선이 있었다”며 “강령을 통한 건설은 사노위에서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2002년 공투본이나 좌파 6단체 논의 등이 조직 통합 노선이었지만 노힘의 무책임으로 실패했다. 현안 투쟁을 하다보면 당도 생기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사실상 당을 하지 말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어떤 투쟁을 어떻게 해서 어떻게 당을 건설할지 전혀 내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계급정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정당인지 명확하지 않은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민노당은 노동자 대표 의회 보내기라는 목적이라도 분명했는데, 계급정당 세력은 구체적으로 자기 과제가 뭔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어떻게 대중을 조직하고 어떻게 한국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구체적인 정치활동 내용, 목표, 방향 이런 게 다 부재했다”고 평가했다. 또 “한국 계급 좌파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자기 모델이 될 만한 좌파정치 모델이 없다. 노동당은 그나마 시리자 정도를 모델로 삼을 수 있겠지만, 계급 좌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야 한다”며 “사실상 우주적인 과제를 담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회주의 정당 활동의 전형이 없다는 지적은 사회주의 기치를 전면에 내건 사노준 시절부터도 계속 나왔다. 당시 사노준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21세기 한국사회에 걸맞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위상과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제시를 하라는 것이었다. 노동당의 다른 당원은 민노당 지역위원장 시절 사노위 서울지역 모임을 만났던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지역 모임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랜드앤프리덤’이란 영화를 봤다는 대답이 왔다. 영화 보는 것이 사회주의 지역 활동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진보정당과 다른 정치활동의 전형이 없다는 지적은 계급정당 추진위 회원들에게서도 나왔다. 한 회원은 “지금은 노동단체 수준의 정치만 있고, 사회적 정치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계급정치가 아직 다른 정치에 대한 상을 보여준 게 없다”며, “아직 모색하는 수준이고 다가오는 선거에서 무엇을 할지 답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추진위의 또 다른 회원은 “추진위 회원들 사이에서 정당에 대한 상이 다 다르다. 변혁적 계급정당으로 표현됐지만, 현실적으로나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내부적으로 합의된 게 없다”고 전했다. 그는 “노동단체 성격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기도 하다”며 “노조 조직률이 10% 정도인데, 노동자가 경제적 계급으로 서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설 수 있나. 노조 조직률이 50% 이상이 되도록 노조를 만들고, 조직률 확산이 핵심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한 시대 운동이 정치적으로 수렴하는 패턴 지켜봐야”

이런저런 우려와 냉소 속에서도 계급정당 추진은 주체의 의지와 정세적 조건에서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 추진위 쪽 판단이다. 김태연 추진위 정책교육위원장은 올 초 <참세상> 주례토론회에서 “계급정당은 의지만 갖추면 되는 것이 아니라 때도 맞아야 한다. 계급 역관계, 모순구조의 폭발 정도 등 때도 필요하다”며 “특히 자본주의 위기 해결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폭발적 과정으로 진행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고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세력의 얘기가 전혀 뜬금없는 상황은 아닌 듯하다. 다른 대안에 대한 고민이 미친놈들만의 얘기는 아닌 상황이라 정세로만 보면 좋은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또 “추진위의 준비 정도를 넘어 전체 노동자 투쟁조건이 쇠하느냐 성하느냐도 중요한 조건인데, 침체기에서 완전히 돌아선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투쟁의 기운이 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며 “진보정당도 아직 길을 찾고 있지 못하고, 구태를 반복하거나 의회중심이 되고 있어 다른 길이 필요하다는 주의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정세는 나쁘지 않다”고 덧붙였다.

김태연 위원장은 투쟁 정당의 위상으로 당 건설이 가능할지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한 시대의 운동이 정치적으로 수렴하는 패턴을 보고 있다. 민주화 운동이 민주당으로 정치화되고, 90년대 정리해고 신자유주의 반대 노동자 투쟁 성과가 진보정당으로 정치화됐다. 그 이후는 어떻게 정치화되느냐의 문제다. 비정규직이나 정리해고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열악한 곳에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담기가 어려운 것 같다. 투쟁력이 약한 면도 있지만, 착취방식에서 다른 대안을 못 낸다. 여기에 대해 어떤 정치적 전망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길은 달라질 텐데, 그런 점에서 큰 투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큰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 하나와 87년처럼 세상이 뒤집힌다 하더라도 바로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상태가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다른 세상의 전망이 맞아떨어지면 그것이 정치화의 길로 갈 것이라고 본다. 될까 싶겠지만, 역사적 흐름을 보면 그 두 개가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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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판만 바꿔다는 식으로 만들수는 있겠으나 합법정당을 만들기는 어려울거 같네요 인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나요

  • 무늬 좌파

    강령논쟁만 하다가 또 깨진다...에 한표 던진다..
    실력도 없는 인간들이 볼셰비키 혁명 주체인 것 처럼 착각한다는게 제일 큰 문제..

  • 한표

    무늬좌파에 한표!

  • 음음

    당사자들은 정말로 지금 규모와 수준에서 '실질적인' 당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나요? 이름 붙인다고 당이 되는 건 아닐텐데 말입니다...

  • 조합원

    우와 심층기사네요! 잘 봐봐야겠습니다.

  • 조합원

    역사를 잘 정리해 두신 것 같네요! 좀 더 운동권이 제도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재야에 있는 것도 좋은데,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으니, 사회진보연대나 계급정당 위원회 모두 정당으로 등록해서 활동해나가면 좋겠습니다.

  • 조합원

    음... 위 댓글들을 보면서 / 어떻게 보면 운동단체 활동가가 많이 위축되어 있는 것 아닐까요? 운동단체 활동을 하다보면 힘든 게 많을 것 같고, 현재 수준을 지키는 것도 벅찰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당은 어쨌든 열린 공간이어서 그런지, 보다 활력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정당보조금 같은 부분은 거부할 수도 있는 거지만, 무엇보다 등록정당은 내부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공간이라 내부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더 반영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목소리가 모아져서 운동을 만들어가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게 정당의 장점 같습니다.

    단체 같은 곳도 총회도 있고 기타 의견 수렴 공간도 있지만, 정당처럼 투명하지는 못한 것 같고, 이런 점에서는 어쩌면 단체 차원에서는 정당으로 전환하는 게 조직 의사결정 및 조직 주요 의사결정 그룹을 공개적으로 바꾸는 하나의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당은 단체의 의사결정 그룹도 정당 내 선거를 통해 경쟁을 하고 자연스럽게 교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게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체는 뭔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기 쉽고, 단체를 이끄는 주류그룹도 폐쇄적으로 계승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당등록은 어쩌면 단체 외부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단체 내부에 대한 쇄신일 수도 있습니다.

  • 이 기사를 보는 시간이 아까움

    차라리 백기완 선생님 모셔다가 백선본 시즌 투를 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