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 비율이 아니라, 경영권 변칙 승계의 문제
의견이 달라 논쟁을 하다보면 왜 논쟁을 하게 됐는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말에 꼬리를 물고 각자의 근거만 얘기하다보면 문제의 시작과 원인은 뒤섞이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문제의 원인인양 얘기되곤 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논란이 그렇다.
이 사태의 발단이 된 것은 자산이 세 배인 삼성물산의 주식을 제일모직 주식가치의 3분의 1 정도로 평가해 합병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합병 비율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제기를 한 집단이 다름 아닌 엘리엇이라는 헤지펀드다. 엘리엇은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의 주주가치를 훼손시킨다며 문제제기를 했고 소수주주들을 모으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가 될 가능성이 큰 기업으로 합병한 기업의 주가는 오르게 된다. 그래서 삼성물산의 소수 주주들도 합병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논란의 중심이 된 엘리엇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지배구조 재편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편에서는 엘리엇이 합병에 반대해 놓고 시세차익을 노려 이익을 본 후 먹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국부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합병과정에서 과도한 주주보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런 논란과정에서 현재의 합병 비율이 더 높아져 해외 투기자본이 이익을 볼 수 있으니 잘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주주가치 수호든, 국익 수호 든 어느 쪽이나 합병 비율이 문제인 것이다. 과연 적정한 합병 비율을 찾는 것이 이 문제의 해법이 되는 것인가? 삼성물산의 주주와 제일모직의 주주가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합병 비율이 나오면 이 합병은 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해 보자. 문제의 발단이 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재용이 무리수를 써가며 합병하려는 것은 이 합병이 삼성그룹 경영권의 3대 세습에 유리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그룹의 순환출자구조에서 핵심인 삼성전자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합병을 통해서 이재용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획득하려는 것이 합병의 목적이다.
애시 당초 이 합병은 이재용의 사익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국부유출이나 국익수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합병 과정에서 과도한 주주보상이 이루어지든 말든 그것은 대부분 삼성의 문제다. 또한 합병 비율은 삼성과 주주들 사이의 이익 배분의 문제라 삼성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가 없다. 엘리엇이 주장하는 삼성물산에 대한 주주보상은 합병에 따른 통행료를 삼성이 더 지불하라는 얘기밖에는 안된다.
땅 투기꾼이 해서는 안되는 곳의 땅을 매입해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니, 알박기 하고 있던 또 다른 투기꾼이 보상금을 더 내놓으라고 싸우고 있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나. 땅 투기 자체를 못하게 하고 아파트를 짓지 못하게 해야지 보상금이 얼마가 적정한지 따지고 드는 논란에 휩싸일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논란은 주주가치 수호나, 국익 수호의 문제도, 양쪽의 주주가치를 보장할 적정한 합병비율을 찾는 문제도 아니다. 재벌의 변칙적 경영승계, 합병을 통한 순환출자의 변칙적 악용이 문제다. (우리는 수차례 소셜파워를 통해 이 주장을 했다.) 새로운 순환출자는 현재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합병을 통해 사실상 새로운 순환출자 구조를 만들어 이재용이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발판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기존 순환출자를 변칙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순환출자구조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국민연금, 죽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호구이거나
여기에 단일로는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입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최근 SK와 SK C&C의 합병에 반대한 바 있다. 국민연금이 삼성의 합병에 반대하면 사실상 합병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국민연금이 주식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재벌과 금융자본의 돈주머니와 거수기 역할만 해온 ‘호구’로 통했다. 국민이 모은 수십 조 원의 연금기금을 주식시장에 쏟아 부으면서도 ‘재무적 투자’로 제한되어 말뿐인 중립 속에서 그냥 돈만 넣어두고 있었다. 금융자본의 호구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국민연금은 ‘사회책임투자’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의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책임투자는 여전히 개살구일 뿐이다. 국민연금은 말로는 사회책임투자를 말하지만 삼성을 비롯해 재벌 대기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국민연금은 2014년 상반기 기준으로 시가총액 대비 국민연금 투자금 비중이 6.8%로 국내 주식 시장의 최대 주주다. 투자금은 모두 90조원에 육박한다. 국민연금의 상위 5대 재벌기업에 대한 투자액 비중은 83%, 10대 기업은 93%에 달한다. 이 중 삼성그룹의 지분 평가액이 20조 원을 넘어 30대 그룹 가운데 40%를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전히 국민연금은 재벌 특히 삼성의 돈주머니 역할을 해 왔을 뿐이다.
또한, 2013년 이언주 의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회책임투자 상위 20개 기업 중에서 최근 5년 간(2008~2012년) 공정거래 위반으로 적발된 기업은 11개로 55%에 달하며 총 60개 기업이 공정거래 위반으로 적발되어 사회책임투자 기업 274개의 22%를 차지했다. 국민연금이 사회책임투자한 기업의 상당수가 공정거래 위반 업체인 것이다.
한편, 최근 국민연금은 주주가치라는 이름으로 기존 이사회에 반대하는 의견을 아주 조금씩 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허울뿐이다. 애초에 사회책임투자도 기업의 사회적 가치가 아니라 주주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이루어졌다. 말이 좋아 사회적 책임이지 사실상 주주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하청업체 단가 후려치기, 내수시장가격의 차별, 골목상권 접수, 인력 구조조정 등 독점이윤 확대를 위한 재벌의 활동은 주주가치라는 측면에서 늘 외면해 왔다.
국민연금은 SK의 합병에 대해서도 주주기치 훼손을 이유로 들면서 합병에 반대했다. 국민연금이 명분을 찾기 위해 주주가치를 들먹인 게 아니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SK와 SK C&C의 합병도 재벌 지배구조의 변칙 재편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합병은 애초에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이었던 SK C&C가 이를 교묘히 피해가면서 현재 사기, 횡령으로 구속수감 중인 최태원 회장의 지배구조를 더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국민연금이 최소한 사회책임투자를 표방하고 나섰다면 범죄자인 최태원 회장의 자리를 더 공고히 하는 이 같은 합병에 찬성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고 그게 분명한 합병 반대 이유여야 했다.
주주가치가 문제라면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합병에 반대할 이유도 분명치 않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주식만이 아니라 제일모직 주식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합병이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 가격 상승에 기여할 수도 있다.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국민연금을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 혹은 주주로 역할을 제한하는 것은 금융자본의 호구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과도 같다.
국민연금은 심지어 합병비율이 다시 산정되고 삼성과 엘리엇이 합의를 보더라도 재벌의 3대 세습을 방지하기 위해, 순환출자의 변칙적 악용을 막기 위해 합병을 반대해야 한다. 재벌이 총수일가의 소유에서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서 의결권 행사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적연기금이 주주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국민경제에 더 크게 이바지하는 길이다. [참세상연구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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