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어서 쓸모 있다?

[기획연재]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

대중들이 철학을 찾는다. 그걸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철학은 우리가 세상을 아는 데 도움이 될까? 지금의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만족스러운 변화를 가져다줄까? 인간은 누구며 어떻게 사는지를 역사라는 배경에서 생각해 보면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있지 않을까? 독자들과 함께 묻고 답해 보려 한다.

상식통념과 사회과학 버무려놓은 ‘대중철학’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까지도 철학과를 다닌다고 말하면 가장 흔한 반응은 점 볼 줄 아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점집을 철학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오해를 제외하고는 우리 사회에서 철학이 실용적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여겨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유신독재의 이념을 제공했던 한국 철학계의 거물 박종홍 정도가 철학의 실용성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대개 철학은 비실용적 학문의 대표격이다. 그런데 이십년 이상 대학 철학과에 한발을 걸치고 있어서 이런 취급에 익숙한 내 눈에는 신기한 일이 몇 년 전부터 벌어지고 있다. 철학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중강의를 하는 철학자 중에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와 수입을 누리는 이도 있다. 철학이 무언가에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수가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왜 철학을 필요로 할까? 철학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얻은 철학적 지식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철학에 대한 대중적 인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대중 철학서, 강의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면 큰 원인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인기 있는 대중적 철학자들은 대중들의 인생의 멘토 역할을 자임한다. 대중적인 철학서, 철학강의를 통해 내 삶의 구체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으려는 이들이 많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거침없이 가르침을 주는 소위 “철학자”들이 인기다. 때론 자상하게 조언해주고 때론 호통 치지만 그 자리에서 묻고 당장 그 자리에서 시원한 소리를 들으면 대중들은 안도하고 만족한다. 심지어 호통조의 질책과 비난을 듣고 카타르시스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재벌 기업 경영자들과 집권당의 국회의원들까지 앞 다투어 철학자들의 강의를 듣는다. 대기업 경영자들의 조찬 모임에 인기 있는 철학자를 부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철학과를 오래 다녀서 질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음한 다음날 아침으로 짜장면을 먹기보다 아침밥 먹으며 철학 강의 듣기가 나한테는 더 고역일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찾는 철학이 그동안은 왜 그렇게 쓸모없는 공리공론으로 취급 받아왔을까? 또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의 철학과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왜일까? 조찬 모임에 간 철학자가 회장님을 체하게 만들기라도 한 것인지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학들에서 철학, 인문학은 더 찬밥 신세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도 역시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철학과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철학이 상당히 다른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점술가들이 동양철학의 기초 위에서 그 개념과 용어들을 일부 공유하지만 점술과 동양철학이 별개인 것처럼 대중들에게 실용성을 인정받고 대규모로 소비되고 있는 철학은 제도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 많은 자원을 빌려 오지만 철학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오히려 상식적인 통념과 사회과학적 지식의 일부를 불충분하게 가져와 버무려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부터 이런 철학을 편의상 대중철학이라 부르자. 물론 둘 사이에는 대략적인 경계만 있고 그 경계선은 쉽게 넘나들 수 있음은 분명하다.

과학에 밀려 쓸모없는 학문이 된 철학

그러면 대중철학이 아닌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쓸모가 없다는 말인가? 철학과를 없애려는 대학 운영자, 교육정책 담당자들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대학운영자들의 이유와는 다른 이유에서 그렇다. 사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비실용적인 학문으로 취급 받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서양철학은 현대로 올수록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에 직접 답하는 것을 과제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의 성격이 이렇게 된 역사적 과정이 있었다. 철학(philosophy)이란 말은 인류 문명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오랫동안 거의 모든 학문과 사유를 의미했다. 오늘날 철학과 가장 거리가 먼 학문이라 생각하는 자연과학도 갈릴레오와 뉴턴의 시대까지도 자연 철학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애초에는 철학도 실용적인 목적 역시 가지고 등장했다. 우리 삶에서 뭔가 불편한 게 있다면 당연히 그 원인을 찾고 불편을 줄이거나 없애려 할 것이다. 철학은 불편함의 원인과 불편함을 해소할 방법에 대한 모든 생각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원시적 단계를 벗어나 발전한 서양철학은 독특한 접근법을 사용했다. 현실의 문제를 그 지평에서 직접 다루지 않고 다른 지평을 통해 우회해서 설명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생각한 이데아의 세계가 가장 좋은 예다.

로마제국의 붕괴로 야만 상태에 빠진 중세 유럽은 고대 문명의 온전한 계승자였던 아랍 세계로부터 철학을 다시 받아들였다. 특히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라고 불렀던 사유의 주제와 방법을 주로 발전시켰다. 세속의 현실보다 초월적 세상이 철학의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이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기독교가 중세 유럽을 지배하는 계급의 이념이자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탓이 크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인간의 이성에 의존한 철학으로 보완하고자 했다. 철학에서는 천상의 것이 땅위의 일들보다 더 근본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에 믿음의 반대편에 있는 이성적 사유의 방식인 철학이 왜 필요했을까? 초월적인 세상을 지상의 인간들에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불신자들의 의심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언어, 이성적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과 천상의 천사들과 영혼을 다루는 신학, 형이상학적 철학도 지상과 연결되려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지상의 일은 천상이라는 초월적 지평으로의 우회를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서양 중세 철학은 보여준다.

근대에 와서 유럽인들은 다른 지평으로의 우회라는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의 영역 밖에 다른 인식과 문제해결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세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무한한 숙제다. 세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적 진리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것은 가능하다. 인류의 발전이 그 증거다. 이 숙제를 하기 위해 고안된 인식의 도구가 바로 과학이다. 과학 발전의 가장 큰 수혜자이면서도 동시에 과학에 대한 불신에도 익숙한 현대인들의 반과학적 통념과는 달리 근대과학은 인간의 인식이 갖는 한계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 노력이 성공인지 실패인지에 대한 평가는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철학은 이제 과학과는 다른 과제를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세상의 실제 모습과 원리를 아는 것은 철학의 과제가 아니라 과학의 임무가 되었다. 과학은 오감을 통한 관찰과 실험을 통한 인식, 분석과 종합, 가설과 검증, 보편적 원리의 발견과 그것의 이론화 등의 과학적 방법도 확립했다. 과학적 인식은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되고 기술 발전은 과학적 인식의 확장을 가속시켰다. 인식의 올바름은 사변이나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세상에 적용했을 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실용적, 실천적 기준으로 판명되었다. 실질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과학은 수정, 대체, 폐기 되어야 했다. 삶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서 과학과 기술은 철학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근대 세계에 널리 퍼졌다. 자연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도 과학적 방법을 따를 때 더 효율적으로 인식되고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사회과학들을 철학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철학은 쓸모없는 현학적 사변으로 아예 용도 폐기 되거나 과학적 인식과 사고를 원활하고 정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 철학에게 있다고 인정한 철학자들도 과학과의 역할 분담은 당연하게 여겼다. 구체적 문제는 과학과 응용 기술의 몫이기에 철학은 이전보다 더 추상적인 언어와 논리를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로 오면 철학은 형이상학(metaphysics)적 문제를 주로 다루던 중세 철학보다도 더 메타(meta)적이 되었다. 철학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가치나 관점의 문제, 인식의 정확성의 문제, 과학의 방법, 논리적 정합성을 주로 다루게 되었다는 의미다. 철학이 다른 학문들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메타라는 단어를 오해한 결과다. 메타적이라는 말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인식과 판단의 기능을 철학에게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직접적 문제 해결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철학은 과학의 일을 우회적으로 돕는다. 철학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단기간에 제공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과학, 기술 같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식과의 결합 없이는 철학은 현실에서 무기력하다. 이것이 제도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쓸모없는 학문으로 여겨지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사유, 함께 가야

이렇게 쓸모없는 학문이나 하는 대학 내의 철학자들이 대중 철학자를 폄하하는 것은 부당한 것 아닐까? 대중 철학에 대한 대학 제도 안의 철학자들의 비판은 엘리트주의이거나 시기심의 표현일 수도 있다. 대중 철학이 학문적 기준에는 미달한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좋은 것 아닌가? 대중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제한적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항변이다. 대중철학자들은 철학도 경험적 지식이나 사회과학 그리고 종교와 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학문적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니다. 철학이 아닌 것은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삶에 진짜 유용하다면 철학의 학문적 기준, 역사적 맥락 따위 무시하면 어떤가?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한계가 있음에도 인류의 인식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키기도 했고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과학은 몇 가지 경험적 사례와 편견과 통념에 의존하는 상식, 일상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었다. 과학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과학의 의미와 역할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또 철학은 그 역할이 아무리 축소되었더라도 정교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고 지향해야 할 가치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정립하고 반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대중철학이 철학과 과학의 장점만을 취한다면, 그게 진짜 가능하다면 엄청난 쓸모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사상의 역사는 그 과제가 거의 달성하기 힘든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대중철학이 주장하는 자신의 쓸모 있음은 과학에도 미달하고 철학으로서도 불충분하다는 것이 문제다. 기존사회가 만들어낸 통념을 전제로 과학적 지식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해서 구체적 문제에 대해 내놓는 상식적 처방을 철학이라 부른다고 해서 철학이 갑자기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쉬운 해결이라 느끼는 것은 대체로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념에 의존한 대중철학은 기존 체제의 이념적 틀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다른 한 편으로 철학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메타적인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무의미하다. 학문제도로서의 철학, 대학 안에 자리 잡은 철학의 순수한 쓸모없음은 실제로는 그 주장만큼 순수한 것도 아니다. 대개의 경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세상을 결과적으로 옹호해온 것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해온 일이다. 그런 한계로 인해 대중철학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결점은 기존체제의 전제, 개념, 원리, 논리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기보다 그것들을 확대 재생산하고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때로 비판과 저항의 제스처를 취하지만 그것은 제스처일 뿐이다.

철학이 진짜 근본적이라면 오히려 통념들을 반성하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반성은 사변의 방식, 문제틀을 반성하는 메타적 접근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 현실 자체가 통념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즉 과학적 인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실천을 지향하는 가치관, 과학적 인식은 철학이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사유가 세상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다음 회에 다룰 주제다.

통념과 체제 전복하는 실천 철학

철학의 쓸모없음은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바꾸기 위해서 사고의 우회를 하기 때문에 오는 잠정적인 특징이다. 현실을 더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할수록 지금과 더 다른 세상을 원할수록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로 더 잘 돌아오기 위해서 철학의 쓸모없음은 감수해야 하는 대가다. 철학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현실을 떠날 때와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만들기 위해서다. 지금 여기의 쓸모를 반성, 거부하고 다른 쓸모를 모색하는 것이 철학의 쓸모다. 지금 이 사회의 지배집단이 철학이 쓸모 있음을 애써 부정하는 진짜 이유는 이것이다.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 준다는 대중철학은 기존의 통념을 고착시키는 그래서 문제의 장기적 해결을 막을 위험이 있다. 또 자신의 쓸모없음으로 고상함을 가장하는 제도 철학은 자신들의 말 그대로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핵심은 어디에 쓸모 있냐는 것이다. 쓸모 있음을 판단하는 기존 체제의 기준을 넘어서는 데 쓸모 있는 철학을 실천적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구체적 문제에 대한 철학의 잠정적 쓸모없음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더 잘 이루기 위한 유예의 결과다.

실천적 철학은 대중적 철학처럼 제도 학문으로서의 서양 철학에서 출발한다. 여전히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많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하지만 대중철학의 방향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멀어질 것이다. 대중철학이 기존의 통념과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면 실천적 철학은 그것들을 전복하는 데 쓸모 있으려 한다. 즉 실천적 철학은 철학인 듯하지만 철학이 아니기를 지향하는 모순적 성격을 가진다. 앞으로 이 연재는 실천적 철학의 주요 문제들을 다를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실천적 철학을 연구하고 실천했던 이와 그의 계승자들을 참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 철학자이면서 철학자 아닌 이의 이름은 칼 마르크스(Karl Marx)다.
덧붙이는 말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회원. 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했다. 맑스주의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며 식당을 운영해 생활하고 있다. 저서: 맑스주의 역사강의, 현대 인도 저항운동사, 처음 읽는 독일철학, 인도 수구 난동사(근간), 맑스주의 철학입문(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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